글_ 염태진
맥주칼럼니스트
책을 읽는 방식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맥주’와 함께 책을 즐기는 ‘책맥’ 문화가 확산되고 있다.
왜 이토록 책맥을 찾는 것일까? 염태진 칼럼니스트와 함께 책맥의 매력에 빠져보도록 하자.
진주에 있는 라이비어리(Libeery)에 방문해 봅니다. 이곳은 책과 맥주가 어우러진 문화공간입니다. 일종의 사설 도서관처럼 꾸며진 공간에서 시원한 생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책꽂이가 있는 도서관 책상과 밖을 향해 있는 바 테이블, 곳곳에 흩어져 있는 책들과 은은한 조명 장치들 그리고 잔잔히 흐르는 재즈. 이러한 분위기에서 책을 읽고 있으니, 마치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된 듯한 기분입니다. 하루키는 일본의 유명 소설가이면서 맥주를 유독 사랑하는 작가입니다.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보면, 주인공이 제이스바에서 레코드를 듣거나 책을 읽으면서 맥주를 마시는데, 이렇게 한낮에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으니 소설 속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책과 맥주를 결합하는 의미는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시간을 느리게 쓴다는 공통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현대인들은 시간을 빠르게 쓰려고 노력합니다. 그게 효율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을 느리게 쓴다는 것이 게으르거나 일을 미루어 둔다는 말은 아닐 것입니다.
시간을 느리게 쓰면 원래의 흐름을 잠시 벗어나 생각을 정리하고 회복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을 느리게 썼을 때의 가치와 경험을 원래의 흐름으로 되돌아갔을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보통, 시간을 느리게 쓰기 위해 사용하는 도구로 커피를 떠올립니다. 하지만 저는 맥주도 훌륭한 도구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차이라면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또렷해지면서 깨어 있는 느낌을 받지만, 맥주를 마시면 긴장감이 풀어지고 여유로운 느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커피와 맥주 모두 시간을 단순히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시간에 가치와 경험을 부여하고 시간을 느리게 쓰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기사에서는 맥주에 집중해 보겠습니다.
그럼, 맥주가 책과 결합했을 때 어떤 점이 좋을까요? 새로운 결합의 미학, ‘책맥’. 조금 더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주의, 이번 기사에서는 하루키의 책들이 자주 언급됩니다. 하루키 독자라면 가슴이 심하게 설렐지 모릅니다.
우선, 책과 맥주 모두 시간이 주는 마법으로 탄생한 결과물이라는 것이고, 우리는 그 결과물에 시간을 들여 즐기는 것이 닮았습니다. 책 한 권을 만들기 위해서는 책을 기획하고 출판사와 계약을 맺음으로 시작합니다. 책 속의 문장 한 줄을 쓰기 위해 수없이 많은 사고를 할 수도, 자료를 수집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과 문장이 차곡히 쌓여 한 권의 책이 완성됩니다. 맥주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맥주를 만들기 위해 양조사는 재료를 수집하고 맥아와 홉을 넣어 끓이고 효모를 투입하고 시간을 두고 기다립니다. 효모는 적당한 온도와 환경에서 당분을 알코올로 변화시키는 마법을 부립니다. 그 시간은 맥주에 따라 수주에서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책과 맥주 모두 시간이 없으면 완성되지 않는 결과물입니다. 우리는 이런 결과물에 우리의 시간을 내어줍니다. 활자를 따라 사유의 시간을 내어주고, 천천히 맥주를 음미하면서 경직된 몸을 내줍니다. 책과 맥주 모두 일상의 속도를 늦추고 시간을 느리게 쓰는 도구입니다.
책 한 페이지에 맥주 한 잔
맥주는 책을 읽을 때 ‘몰입의 즐거움’을 주는 도구로서 작용합니다. 맥주가 커피처럼 집중력을 향상시키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적당히 긴장이 완화되면 오히려 몰입이 강화될 수도 있습니다.
책에 집중하기 위해 과도하게 글자 한 자 한 자에 집중하다가 오히려 글 읽기를 해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오히려 느슨한 감각이 책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현실을 벗어난 세계를 묘사한 책이라면 맥주가 주는 얼근한 기분과 어우러져 묘한 분위기를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현실과 허구를 넘나드는 하루키의 소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맥주와 함께 읽는다면 현실 너머를 더 현실처럼 느낄지도 모릅니다.
책을 읽는 행위와 맥주를 마시는 순간의 리듬을 맞추면 사유의 경험을 높일 수 있습니다. 가령 저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책의 한 장을 읽는다거나, 거꾸로 한 장 혹은 목표한 페이지까지 읽고 맥주 한 모금을 마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면 책을 읽는 사이 사이에 나만의 사유의 시간을 더욱 알차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읽은 내용을 곱씹어 보기도 하고 다음 내용을 예측해 보기도 합니다. 이런 멈춤의 순간에 도움 되는 것이 맥주입니다. 맥주는 사유의 강도를 높이고 상상력을 자극합니다.
어쩌면 맥주를 마시다 책에 드러나지 않은 의미까지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책을 읽다가 잠시 책을 덮고 맥주를 마셔보세요. 피로해진 눈에도 잠시 휴식의 시간을 줍니다. 눈이 쉴 때 목은 바빠지겠지만요.
책맥 페어링
그럼 어떤 책을 읽을 때 맥주가 어울릴까요? 음식과 맥주를 페어링하는 것처럼 책과 맥주를 페어링해 보면 어떨까요? 물론 책맥 페어링은 어떠한 원칙이나 객관적 사실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음식과 맥주를 페어링할 때 둘의 균형과 강도, 무게감을 맞추는 것처럼 책과 맥주의 균형을 맞추는 쪽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가볍게 읽는 에세이라면 청량한 라거를 추천합니다. 일상에서 주로 마시는 라거를 마시며 에세이를 산책하듯 읽을 때 비슷한 균형감이 생깁니다. 가령, 저는 하루키의 에세이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를 읽으면서 실제로 라거가 생각났습니다. 하루키가 마라톤 도중 힘이 들 때, ‘맥주, 맥주’ 하면서 달렸다고 해서 더욱 그런 듯합니다. 말랑말랑한 시집을 읽는다면 독일의 바이스비어나 벨기에의 위트 비어 같은 유럽의 밀맥주는 어떨까요? 밀맥주의 부드럽고 은은한 과일 향이 시의 감각을 깨워줄 수 있습니다. 최근 제가 밀맥주를 마시면서 읽은 시집 하나를 추천해 드리겠습니다. 최승호의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시집인데요, 산문처럼 가볍게 쓰인 시에 유럽의 명화들이 삽입되어 읽기 편했습니다. 저는 이 시집을 읽으며 각 시에 삽입된 그림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산문 같은 시와 유럽의 명화에 유럽의 대표 맥주 스타일이 더해져 사유의 감각이 깨어나는 듯했습니다.
· 우연한 서점
독립 서점 ‘우연한 서점’은 책과 맥주의 조화를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다. 맥주 외에도 와인과 하이볼 또한 즐길 수 있어, 책에 따라 술을 고르는 재미가 있다. 서점 곳곳에 적힌 메모를 읽어본다면 ‘우연한 서점’을 더욱 다양하게 즐길 수 있다.
위치 : 수영구 민락본동로11번길 12
· 이터널저니
아난티코브 속 또 다른 즐거움인 이터널저니는 전시회, 북토크 등 복합공간으로 활용된다. 벽면 곳곳에 적힌 책 속 문구를 읽다보면 이터널저니의 매력에 흠뻑 빠지게 된다. 인문학, 철학, 여행 등, 다채로운 책의 향연을 즐기고 싶다면 이터널저니로 향하자.
작가 소개
염태진_ 맥주 칼럼니트스로서 <맥주 이야기만 합니다>, <방구석 맥주 여행>, <우리 동네 크래프트 맥주(공저)>, <맥주 한 잔 할까요(공저> 등의 저자이이다. Beer Docent Advanced(1급)과 Cicerone Certified Beer Server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으며 주류 전문 잡지에 칼럼을 기고하거나 맥주 관련 강연 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