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철환 작가, 前 MBC PD “정년이란 글자에 점 하나만 찍으면 청년이 된다.” 주철환 작가가 <월간 에세이>에 기고한 칼럼에 나오는 문구다. 아주대학교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영원한 청년의 마음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서 긍정 에너지를 무한대로 받고 돌아왔다. 한국 예능계의 레전드를 만나다 이 글을 쓰기 전 이 분의 ‘직함’을 어떻게 붙여드려야 하나 살짝 고민을 했다. 유 명 포털 사이트나 지식 사이트의 인물 소개 페이지에는 ‘아주대학교 교수’ 또는 ‘아주대학교 교수 휴직 중’으로 나와 있지만 실제로 만나서 얘기를 나누던 중 현 재는 ‘정년퇴직’한 상태란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왜 사이트에 연락해서 잘못된 정보를 수정하지 않으셨냐고 여쭤보았더니 “제가 인터넷을 안 봐요. 그거 하나 잘못됐다고 세상이 크게 어지럽게 되진 않잖아요.” 라는 쿨한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요즘 칼럼 등 집필 활동을 많이 하시니 ‘작 가’로 붙이기로 했다. 그런데 교수나 작가 이전에 ‘주철환’이라는 인물을 가장 잘 나타내는 직함은 ‘前 MBC PD’다. 중장년층에게 친근한 <일요일 일요일 밤에>라는 인기 프로그램, 특히 그 안에서도 ‘이경규의 몰래카메라’ 코너를 비롯해 ‘퀴즈 아카데미’. ‘우정 의 무대’. ‘테마게임’ 등 숱한 히트작이 그의 손을 거쳐 갔다. 말하자면 대한민국 예능계의 레전드인 셈이다. 좋아하는 음악으로 인생을 얘기하다 그는 현재 각종 잡지나 신문에 칼럼을 기고하면서 정년 이후 ‘제2의 청년’ 시절 을 활기차게 살아가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예전 지인들을 만나는 일이 빈번하 다고 한다. “제가 직장을 무려 일곱 군데를 다녔거든요. 그러니 오죽 많은 인연이 있었겠 습니까. 그 인연들 중에서 나를 특별히 그리워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나도 흐 뭇하고 좋죠. 옛날엔 만나고 싶어도 시간이 없어서 못 만났지만 지금은 시간 이 있고 건강이 있잖아요. 그동안 못 봤던 영화, 연극, 뮤지컬도 보러 가고 가 족들과 여행도 다니면서 살고 있어요.” 그는 현재 ‘주철환의 음악동네’라는 제목으로 문화일보에 매주 한 편씩 음악 에 세이를 기고하고 있다. 햇수로 벌써 6년째이고 나중에는 이 글들을 모아서 책으 로 엮을 계획도 갖고 있다. 예능 PD로 오랫동안 종횡무진 활약을 했으니 방송계 관련 이야기나 회고담을 쓸 수도 있었을 텐데 왜 하필 음악 이야기였을까. “저는 대여섯 살 때부터 하루도 노래를 안 들은 날이 없고 하루도 노래를 안불러본 날이 없어요. 얘기할 때도 좋은 노랫말을 인용하는 건 오래 전부터 저의 대화 습관이 됐죠. 저를 길러주신 고모님이 라디오를 즐겨 듣고 음악을 좋아하셨는데 그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매주 월요일 음악 에세이가 게재되면 그의 SNS에는 수백 개가 넘는 반응들로 넘쳐난다. 대개는 친구, 제자 등 아는 사람들이 보내온 찬사들이다. 정년퇴직하고 시작한 칼럼을 지금까지 쓰고 있고, 많은 독자들로부터 힘과 영감을 얻고 있으니 자신은 참 복이 많은 사람이라고 그는 말한다. 정년 이후 행복하게 사는 비결 일흔을 앞둔 나이에도 여전히 동안이고 항상 밝은 미소가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그의 모습을 보고 젊고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첫째로 건강이 중요해요. 아무리 하고 싶은 게 많아도 건강이 좋지 않으면 의욕이 생기지 않거든요. 지금 제가 건강하기 때문에 연재하고 있는 신문 칼럼도 죽을 때까지 쓰려고 하는 거예요. 둘째로 자유로워야 해요. 자유롭다는 것은 내일 꼭 해야 할 일이나 가야 할 곳이 없다는 걸 뜻해요.”그가 한창 인기 예능PD로 이름을 날릴 때는 자유롭지 않았다고 한다. 시청률을 올려야 하고, 타 방송국과 경쟁을 해야 하고, 모시기 힘든 유명한 사람을 섭외해야 하니까 자유로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런 구속에서 모두 풀려난 지금이 소위 ‘잘 나가던 시절’보다 더 행복하다고 말한다. 또한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성격은 유전적인 요인도 있지만 환경적인 요인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그는 덧붙였다. 환경적인 요인을 얘기할 때는 어렸을 그를 길러주신 고모님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여섯 살 때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 고모님이 저를 마산에서 서울로 데려와 키우셨어요. 고모님은 비록 교육은 많이 받지 못하셨지만 비상한 기억력과 친화력을 가지신 분이셨어요. 또 항상 음악을 좋아하셨고, 저에게 남한테 부담을 주지 말라고 가르치셨어요. 고모님의 ‘초긍정’ 마인드의 영향을 받아서 제가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게 된 것 같아요.”또 덧붙여 말하길, “남들은 내가 정상적인 가정이 아닌 결핍된 가정에서 자랐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 결핍이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채울 부분이 많았고, 무엇이든 긍정적으로 보기로 결심했다”고 밝혔다. 자신의 행복은 자신이 정의해야 한다 주철환 작가는 현재 우리나라가 OECD 38개 국가 중 행복지수 36위로 최하위권에 들어가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안타깝게 여긴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한창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들은 시간 여유도 없이 바쁘게 일해야 하고 행복할 겨를이 없다고 해요. 그런데 행복에 대한 정의를 자기 스스로 내리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제가 쓴 ‘행복’이라는 시엔 이런 구절이 있어요. “밥 먹을 때마다 행복하다면 하루에 세 번은 행복한 거다. 숨 쉴 때마다 행복하다면 매 순간 행복한 거다.”라고요.” 이처럼 남의 평가에 자신의 행복을 맡길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행복의 기준을 세워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또 어떤 사람은 성공을 행복과 동일시하고, 누군가와 경쟁해서 이기는 데 마음이 얽매이곤 한다. 하지만 주철환 작가는 ‘성공하고 이기는 데’ 인생을 ‘올인’하지 말라고 권한다. “1등주의는 무조건 불행하게 될 수밖에 없어요. 똑똑한 사람은 약간 바보 연기도 할 줄 알아야 해요. 너무 똑똑한 척을 많이 하면 주위에 적이 많아지게 마련이죠.”그런 그도 과거에 항상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라고 했다. 때론 자신을 깎아내리거나 흔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걸 ‘이겨냈다’기보단 그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온’게 전부라고 한다. 이처럼 ‘정년’ 이후 행복한 ‘청년’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 버킷 리스트가 있다면 자신에게 항상 고마운 사람인 아내와 함께 스위스 여행을 가보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바람대로 앞으로도 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며 언젠가 그 버킷 리스트도 꼭 이루길 기원한다. 2020년 출간한 <재미있게 살다가 의미 있게 죽자>에서 그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인생의 어느 모퉁이에 서 있는 모든 이들에게 인생의 대차대조표를 만들어보라고, 그리고 그 안에서 사랑, 희망, 낙관의 비중이 더 크다는 사실을 발견해보라고 다정한 어투로 조언을 건넨다.
글, 사진.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산티아고 순례길은 끝났지만 여행자 순례는 계속된다. 피니스테레에서의 시간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들이었다면, 리스본까지의 일주일은 낯선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만나는 여행이었다. 새 출발을 하는 땅끝, 피니스테레 피니스테레(Finisterre)는 이베리아반도의 서북단 곶(串, cape) 이름이다. 고대 로마인들은 동서남북으로 세상을 정복해가던 중 이곳에 도착해서는 대륙의 서쪽 땅끝이라 생각하여 ‘최후(Finis)의 땅(terre)’이란 지명을 붙였다. 29일 동안의 산티아고 순례 여정을 마친 다음 날 오후, 두 시간 버스를 타고 피니스테레로 왔다. 여느 바닷가와 다름없는 해안 언덕이었지만 지명이 풍기는 분위기와 순례길 시작점을 알리는 0.00km 거리 표지석, 그리고 드넓고 잔잔한 북대서양의 일몰 장관이 사람의 기분을 묘한 비장감에 빠져들게 했다. _땅끝마을 피니스테레에 설치된 실물 크기의 불탄 등산화 조형물실물 크기의 불탄 등산화 조형물이 있고, 그 주변으로 꺼멓게 그을린 흔적들이 바위 위 여기저기에 보인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종주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이곳에 와서는 그간 신었던 해진 등산화나 입었던 옷가지 등을 불태운 흔적들이다. 한 달 동안 걸으며 생각했던 것들을 정리하고, 이전의 자신과 결별하여 새롭게 태어난다는, 이곳만의 전통의식이다. 피니스테레 마을 숙소에 배낭을 두고 올라온 나는 뭔가를 태우는 대신, 부질없는 생각들을 대서양 너머 노을 진 하늘로 날려 보냈다. 퇴직하고 지난 1년여 내가 속으로 미워하고 원망했던 사람들에게 내색을 안 하는게 힘들었는데 인제 돌아가면 그들을 비로소 밝고 환한 얼굴로 대할 수 있을 듯싶었다. 좁은 세계에 갇힌 자신을 해방시키다 2010년 영화 는 죽은 아들을 대신해 산티아고 순례길에 나선 아버지의 이야기다. 순례 첫날 피레네 산맥에서 사고를 당한 아들의 유해를 껴안고 먼 길을 대신 걸은 것이다. 스페인 서북부의 해안마을 묵시아는 이 영화로 많이 유명해졌다. 주인공 톰이 한 달 동안 함께했던 아들의 유해를 이곳 해안으로 와서 뿌려주는 마지막 장면 때문이다. _야고보와 성모 마리아의 인연을 기리는 비르셰 교회 영화 속 현장을 확인해 보고 싶어 묵시아로 왔다. 피니스테레에서는 북쪽으로 40km 떨어진 곳이다. 묵시아 바닷가 모습은 영화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주인공이 서 있던 자리 옆으로 야고보와 성모 마리아의 인연을 기리는 비르셰 교회 건물이 서 있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하얀 등대 그리고 언덕 위에는 2002년 유조선 기름 유출 사고와 관련한 거대한 조형물이 우뚝 솟아 있다. 영화 의 주인공 톰은 안과의사였다. 다른 사람들이 세상을 보다 넓게 잘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삶이었지만 정작 자신은 좁은 세계에 갇혀 살았음을, 아들의 죽음을 통해, 아들이 인도해준 순례길 여행을 통해 비로소 깨달았다. 영화는 산티아고에서 돌아온 그가 다시 여행길에 나선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 모로코 어딘가를 걷는 그의 표정은 이전과는 다르게 밝고 여유로워 보인다. 나 또한 이 여행에서 돌아가면 그처럼 이전보다 좀 더 여유로운 모습일 것이다. 옛 시절의 영화를 과시하는 도시묵시아 마을에서 하룻밤 쉬고 다음 날 오후 스페인을 떠나 포르투갈로 내려왔다. 국경을 넘는 버스 속에서 내내 영화 속 주인공 톰의 마지막 표정이 떠올랐다. 그가 시작할 새로운 인생과 나의 인생 2막이 서로 교차하며 상상의 나래를 펴갔다. 포르투갈 제2의 도시 포르투는 2박 3일 머물며 구도심 위주로 여유롭게 둘러봤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포르투 역사지구가 나의 주 관심 대상이었다. 포르투 시청 앞 광장을 출발하여 아줄레주 타일로 유명한 알마스 성당,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이 애용했다는 카페 마제스틱과 렐루서점을 거쳐 클레리구스 성당 종탑에 올랐다. 구시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현대의 화려함과는 동떨어진 채 퇴락한 도시의 모습이지만 옛 시절의 영화를 은근히 과시하는 자태였다. _도우루강변에 위치한 리베이라 거리 이어서 남쪽으로 리베르다드 광장과 메트로 상 벤투역 그리고 구시가의 중심인 포르투 대성당을 거쳐 도우루강변 리베이라 거리를 천천히 아주 천천히 거닐었다. 강변 여행자들의 눈길을 한 몸에 받는 동 루이스 1세 다리가 이 도시의 랜드마크임을 실감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이른 오전 시청 앞에서 시작한 역사지구 하루 여정은 도우루강 남쪽의 모루언덕에서 일몰을 바라보며 끝을 맺었다. 이동 거리는 10km도 안 됐지만 구도심 명소와 역사 유적들 20여 군데를 만나보는 넉넉한 하루였다. 퇴락한 항구가 오히려 매력 포인트 _피니스테레 항구 전경 포르투갈이란 국명이 바로 이곳 포르투(Porto)에서 비롯됐고, 영어의 ‘항구 (port)’ 역시 고대 로마인들이 이곳에 붙인 지명 ‘포르투스(portus)’에서 파생됐 을 정도로 이베리아반도의 해상 무역 거점이었다. 지금은 그 옛날 찬란했던 시 절의 영화를 찾아볼 수 없지만 퇴락한 항구 도시의 이미지가 오히려 여행자들 에겐 매력 포인트가 되고 있다. 포르투 3일째 되는 날 오전에 기차 3시간 거리인 리스본으로 왔다. 이베리아반 도가 이슬람 지배하에서 벗어난 13세기 이후 지금까지 줄곧 포르투갈의 수도이 면서, 1755년 대지진으로 완전 폐허가 된 자리에서 재건설된 도시다. _대지진으로 폐허가 된 리스본의 재건을 주도했던 폼발 후작을 기리는 광장콜럼버스가 신대륙에 닿기 70년 전부터 일찌감치 바다로 눈을 돌려 북대서양 과 아프리카로 진출했던 포르투갈, 그러나 해양 선점자의 지위는 누리지 못했다. 발 빠른 의사결정과 과감한 추진력으로 콜럼버스와 마젤란 등을 후원한 스 페인으로 더 많은 경제적 부가 집중됐 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시절, 세계 여러 대륙의 식민지 땅들을 스페인과 함께 양분했던 해양 강국이었다. 이런 포르투갈 영광의 시절을 주도해 온 도시 리스본은 스페인 내륙에서 발 원한 테주강이 1,000km를 달려온 후 북대서양과 만나는 하류에 자리 잡고 있다. 도시의 중심인 바이샤지구를 사 이에 두고, 동쪽의 알파마지구, 서쪽의 바이루알투와 치아도지구, 그리고 북 서쪽으로 곧게 뻗은 리베르다 거리 일 대와 좀 멀리 떨어진 서남단의 벨렘지 구로 이뤄져 있지만 2박 3일 여행자인 나는 이들 6개 지구 중 리베르다드, 바 이샤, 알파마지구 순으로 둘러보았다. _포르투갈 영광의 시절을 주도해온 도시 리스본 로시우 광장과 코메르시우 광장을 잇는 바이샤 거리, 바다처럼 드넓은 테주강, 그 강을 가로지르는 멋진 현수교 4월 25일 다리, 울퉁불퉁 비탈진 옛 도심 알파마지구의 언덕길, 굴곡진 도로를 따라 한가로이 오가는 노란 전차 28번 트램,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도시와 강변의 야경 등이 잠시 머물렀던 리스 본을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 산티아고에서 스페인 땅끝마을까지의 여행이 나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들이 었다면, 포르투갈 리스본까지의 일주 일은 낯선 도시의 어제와 오늘을 만나는 여행이었다.
글. 유영제 가천대 석좌교수, 서울대 명예교수 과학기술의 혜택이 부유한 자들에게만 돌아간다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혁신적인 전자제품이나 효과 좋은 신약은 대개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타파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다. 과학기술 혜택을 일부만 누리는 현실 새로운 약이 개발되고 혁신적인 전자제품이 소개되면 주로 부자들이 구입한다. 과학기술의 혜택이 먼저 부유한 나라와 부유한 이들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사실을 두고 과학 은 부자들을 위한 것인가 비판을 하는 이들이 있다.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돈의 힘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새로운 과학적 사실을 발견하고 신기술을 연구하는 과학자 에게는 오직 자연 현상에 대한 호기심과 인류를 위한 기술 의 개발이라는 목표가 있을 뿐이지만, 그 과정에서 돈이 개 입되기 마련이다. 연구개발은 공짜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연구개발비가 소요된다. 기초연구는 국가에서 지원하기 에 기초연구 결과의 혜택은 모든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그러나 기초연구 결과를 실용화하는 것은 대부분 기업의 몫이다. 그리고 실용화 초기 단계에서는 수요가 많지 않기에 값 싸게 시장에 내놓을 수가 없다. 기업은 실용화에 투자한 비용을 회수해야 하므로 그렇게 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실제로 어떤 항암치료제들은 매우 고가라서 보통 환자들은 엄두도 못낸다.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는가? 약자를 위한 기술 제품 제공에 관심 가져야 많은 경우 실용화 초기에는 값이 비싸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수요가 늘어나고 원가를 절감하는 방법이 생기면서 값이 내려간다. 그러면 돈이 별로 없는 이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간다. 그래서 잠시 기다리라고 하면 되는가? 이럴 때 국가의 역할을 생각해야 한다. 가격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는 경우에는 국가나 보험에서 부담하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이렇게 하여 약자를 보호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이것도 제품(또는 서비스)이 시장에 소개된 후 어느 정도 시간이 경과한 후에 가능하다. 가끔은 기업이 원가를 따지지 않고 약자에게 제품을 제공한다. 기업 홍보의 성격도 있겠지만 그런 결단을 하는 기업은 그래도 존경받을 만하다. 이왕이면 제품화 초기부터 약자를 고려하는 마케팅이 이루어지든가, 국가에서 보험 혜택이 있으면 좋겠다. 정부의 관련 부처 또는 기관에서 이렇게 약자를 위한 과학기술 제품을 제공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 좋겠다. 그러나 많은 경우 기술의 개발 또는 제품의 개발은 부유한 이들을 겨냥하는 경우가 많다. 약자에게 필요한 기술과 제품의 개발은 수익성이 낮아 기업에서는 우선순위에서 밀린 다고 생각된다. 이것도 자본주의 사회의 한 단면이라고 받 아들이기에는 안타까운 생각이 든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약자의 형편을 잘 이해하는 우리가 앞장서자 가난한 나라,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기술과 제품을 생각하고 개발하여 실용화하여야 한다. 기업이 하기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린다고 하면 국가나 뜻있는 이들이 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기술을 적정기술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그들의 여건에 맞는 기술을 의미한다. *빌 게이츠 재단 등은 그런 일에 지원을 잘하고 있다. 또 UN관련 기관 등은 그런 일을 잘 수행하고 있다. 우리나라에 있는 유엔 산하의 *국제백신연구소도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그런 일을 기획하고 연구하여 실용화하는 기관이 많이 있으면 좋겠다. 적정기술연구소(가칭)와 같은 연구 기관, 사회적 기업, 단체 등이 많이 생기면 좋겠다. (사)국경없는 과학기술 자회도 그렇게 탄생하였다. 과학기술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와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행이 최선은 아니다. 현재 상황을 비판적 시각으로 바라보고 개선책을 제시하고 실현에 앞장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럴 때 우리 지구촌이 더 살기 좋은 지구촌이 될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오래전에는 빈곤으로 고생하는 후진국이었다. 이제는 세계 톱 10 경제대국이 되었다. 우리는 가난을 경험했으므로 우리가 약자의 형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그들을 이해하고 돕는 일에 앞장서면 좋겠다. *국제백신연구소는 개발도상국의 전염병 취약지역 주민들이 백신을 활용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안전하고 효과적이며 저렴한 백신의 발굴, 개발 및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빌 게이츠 재단(Bill & Melinda Gates Foundation)은 2020년 2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 구호를 위해 1억 달러를 기부했다.
사진출처_ 공공누리 일제 강점기, 경주 노서리에서 식당 확장 공사를 하다 유물 일부가 발견된다. 신라 시대의 무덤에서 금관 및 금제관식이 출토된 것. 신라 시대 무덤 최초로 이름을 찾은 경주 금관총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본다. 일본의 허술한 발굴 _국보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921년, 경주 노서리 마을의 한 음식점 확장 공사 중 뒤뜰에서 우연히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즉시 공사를 중지시키고 현장을 발굴하기 시작하는데 이윽고 화려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가 눈부신 황금의 나라임을 알리는 최초의 고분, 금관총의 발견이었다. 당시 금관총 수습 발굴에 나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 모로가 히데오. 그와 같이 발굴에 나선 일본 사람들은 고고학 전공자나 발굴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경주 보통학교 교장 등 문화재 애호가들이었다. 당시 경성에서 연락을 받은 일본 고고학자들은 금관총 수습 발굴을 멈추고 대기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고, 나흘 만에 경주에 도착한다. 하지만 도착한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이미 금관총 발굴이 종료되었기 때문인데, 급박하게 발굴 작업을 한 이유가 고작 ‘사람들이 몰려와서’라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금·은 제 그릇, 귀금속, 무기 등 총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유물의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다. 발굴 작업을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 출토되었는지 하나하나의 지점을 기록해야 하는데, 도굴에 가까운 진행으로 현재까지 유물 출토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일부 유물은 현재 일본에 있다. 이후 일본은 ‘경주 금관총 발굴 조사 보고서’를 편찬했는데, 당시 최고의 인쇄 품질로 보고서를 작성해 외국 외교부와 도서관에 기증하여 선전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일본제국)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됐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또한 전 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 발굴 유물의 한 예다.” 고대 일본에서 신라는 동경하는 금의 나라이자 금을 뺏기 위한 침략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8세기 무렵에야 금을 생산할 수 있었는데, 그런 배경 때문에 신라 무덤에서 나온 금관에 흥분한 일본인이 충격을 받아 저지른 일이라 볼 수 있다. 왕릉은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곳이며, 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일본은 아직 자국의 왕릉을 발굴한 적은 없다. 능(陵)과 총(塚), 이름이 다른 이유천년 왕국 신라가 남긴 무덤을 지칭할 때, 능(陵)과 총(塚) 두 가지로 지칭한다. 능(陵)은 주인이 알려진 무덤으로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일컬으며 총(塚)은 무덤의 규모가 왕이나 왕족에 준하는 규모이지만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을 뜻한다. 그렇기에 무덤을 발굴하다 천마도가 출토되면 천마총, 금관이 출토되면 금관총, 이런 식으로 출토된 유물의 이름을 붙였다. 물론 이 또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잔존하는 형식이라 하니 바로잡을 필요가 있으나,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어 무덤의 이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백제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인 무령왕릉처럼 주인이 밝혀진 무덤이 있다. 기록을 통해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신라의 무덤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기 어려웠다. 천년 왕국, 신라 무덤 금관총의 주인을 찾아서_경주 금관총 환두대도, '이사지왕' 글씨가 새겨져 있다.2013년 학계를 발칵 뒤집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경주 금관총에서 발견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중요한 글자, ‘이사지왕’이 발견된 것. 일제 감정기 때 금관총에서 출토된 후에 90년 동안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가 녹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드러난 것인데, 신라 초기 고분의 주인이 최초로 밝혀질 수도 있는 사건이라 엄청난 주목을 끌었다.그렇다면 이사지왕, 과연 그는 누구인가?신라의 마립간(왕) 시기의 계보를 보면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으로 이어진다. 계보에서 이사지왕을 찾아볼 수 없는데, 마립간 시기의 왕족들을 ‘~왕’이라 칭했기에 왕족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 1989년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발견되는데, 재판 판결문 성격의 비석으로 그 내용에 칠왕(七王)이라는 명문을 통해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을 ‘왕’이라 칭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은 5세기 신라 왕족·귀족 호칭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증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사지왕의 무덤이 확실치 않은 이유는 부장품의 위치가 허리춤에서 나왔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있는 반면, 머리 쪽에서 나왔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있기도 해서이다. 부장품 위치에 따라 생전 무덤 주인의 것인지 혹은 그를 애도하기 위해 함께 묻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 실제 전문가들도 기록이 없으면 쉽게 헷갈리는 발굴 현장에서, 아마추어들이 감자 캐듯 유물을 수습한 탓에 여전히 그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밝히기는 쉽지 않았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엉터리로 발굴한 것들을 바로잡는 재발굴 작업을 하는데, 2015년에 금관총도 대대적인 재 발굴에 들어간다. 이때 이사지왕 이름이 새겨진 칼집 끝 부분이 발견되어,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라는 것 이 일반적 견해가 되었다. 경주 금관총 보존전시관 개관 _현대적 전시공간으로 거듭난 경주 금관총 ’22년 8월, 금관총 보존전시관이 경주 금관총이 재발굴 된 지 7년 만에 복원 정비를 마치고 일반에 임시 공개되었다. 공개된 전시 공간은 지상 1층, 70억여 원을 들여 신라 고분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국내 고분 정비 사상 처음으로 돌무지 덧널 무덤에 주요 축조 구조 물인 목조 가구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였다. 바닥에 나열 된 나무 기둥 자국 등을 보정해 만든 높이 5m 바둑판 모 양인 목조 가구는 각 구획 안에 정연하게 강도를 쌓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공사용 비계1) 구조 같은 목조 구조로 안 쌓으면 돌 무지의 돌이 무너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당시 1,600년 전 신라 시대 장인들도 이렇게 치밀하게 짠 목조 가구를 통해 안전하게 돌무지를 쌓을 수 있었던 공사 구조물입 니다.” (박세웅/금관총 전시부분 감리원) 또 무덤 중앙에 목곽은 일제 강점기 때 진행한 첫 조사 와 달리 더 크고 높은 데다 이번 정비를 통해 새로 밝혀 진 사실도 무덤 바닥에 재현되었다. 이와 함께 출토된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을 통해 신라 고분 중 처음으로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목을 끌고 있다. 경주시는 그동안 고고학 자와 문화재위원들의 자문 보증을 여러 차례 받아 충실 하게 콘텐츠를 마련했다. 또한 전시실에는 스크린 터치 설명을 비롯해 삽화 묘사, 첨단 증강현실 AR 기법도 도 입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금관총 보존전시관 바로 옆에는 올해 상반기 개관 목표 로 신축 중인 금관총 고분정보센터 조성공사가 마무리 되고 있다. 전시관의 정식 개관은 금관총 고분정보센터 조성공사가 마무리되는 ’23년도 상반기 예정이며, 이전 까지는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1) 건축공사 때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