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살다가 넘어지거나 쓰러질 때가 있는데, 저는 그들을 붙잡아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인생의 전환점은 종종 뜻하지 않은 데서 오기도 한다. 17년간의 오랜 무명 기간을 거쳐 배우로서 승승장구하던 이광기에게 찾아온 개인적인 아픔은 오히려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고, 이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세상에 눈뜨게 했다.배우에서 아트 디렉터로 발 넓혀 <태종 이방원>, <정도전>, <야인시대> 등의 선 굵은 시대극에서 강렬한 연기를 보여주다가도, <해피투게더>, <보이스 킹> 등의 예능 프로그램에선 재치 있는 입담과 뛰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던 다재다능한 배우 이광기. 그가 최근에는 미술 전시 기획자로서도 각광받고 있다. 경기도 파주와 용인에서 ‘갤러리 끼’를 오픈하여 세계적인 작가들과 명망 있는 국내 작가들의 작품들을 연달아 공개하고 있는데, 미술애호가들의 반응 또한 뜨겁다고 한다. 특히 7월 1일부터 7월 29일까지 ‘갤러리 끼 파주’에서는 프랑스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알랭 클레망(Alain Clément)의 개인전이 열린다. ‘관능적 인체 추상’으로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는 클레망의 작품은 조르주 퐁피두 센터,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 소장될 만큼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이미 한국에서도 많은 팬을 거느리고 있다.“독일의 한 갤러리에서 알랭 클레망 작가님의 작품을 보고 한눈에 반해서 꼭 저희 갤러리에 모시고 싶었어요. 그래서 작가님이 계시는 프랑스 남부의 님(Nîmes)까지 직접 찾아가서 이틀 동안 그곳에 머무르며 작품들을 골랐지요. 화려한 색채와 간결한 선을 통해 인체를 해부하고 본인의 느낌으로 재해석한 이번 작품들에서 많은 것을 느끼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아픔을 치유해준 아이들을 돕기 위해 배우로만 알고 있었던 그가 언제부터 이렇게 갤러리를 운영할 정도로 미술계에 깊이 발을 담그게 된 것일까. 사실 그는 오래 전부터 그림을 좋아해서 꾸준히 좋은 작품들을 수집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대부터 컬렉션을 시작했으니 벌써 23년이 됐네요. 그동안 수많은 작가들과 갤러리스트들을 만나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면서 교류했기 때문에 작품을 보는 눈이 좀 높아지지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컬렉션을 하면서 겪었던 성공과 실패의 경험을 바탕 삼아 후배들에게 길잡이 역할을 하고 싶어서 갤러리를 만들게 됐습니다.”그런데 갤러리를 오픈하기 전부터 이미 그는 온라인으로 자선 경매 쇼를 진행해왔었다. 2010년 아이티에서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아이티 봉사 활동을 하고 돌아온 후 시작하게 된 이벤트였다. 당시 모든 방송 활동을 중단하고 봉사 활동에 매진하던 중이었다. 갑작스러운 병으로 먼저 세상을 뜬 아들 때문에 너무나도 괴로워 자살을 생각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그를 다시 일으켜 세워준 것이 봉사 활동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에게 닥친 아픈 사건으로 많이 힘들었는데 봉사 활동에서 만난 아이들이 오히려 저를 치유해줬어요. 그래서 그들에게 뭔가 보답을 해주고 싶었는데, 어떤 선물을 줄까 궁리하다가 지진으로 다 무너진 학교들을 보고 학교를 세워줘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죠.”그래서 자신이 잘 아는 미술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해 무작정 자선 경매 쇼를 열었던 것이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을 번갈아가며 공간을 대여받아 12년 넘게 꾸준히 경매 쇼를 진행한 결과, 아이티에 3개의 학교를 세우는 보람찬 결실을 맺게 됐다.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들도록 이러한 봉사 활동과 갤러리 운영을 통해 그는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삶을 살고 있다고 고백했다. “항상 앞만 보고 다니며, 제 잘난 줄만 알고 살았는데 그 일이 있은 후부터 이전에 보지 못했던 세상을 발견하게 되었죠. 그런 부분에서 항상 감사함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어요. 그리고 사람은 누구나 살다가 넘어지거나 쓰러질 때가 있는데, 저는 그들을 붙잡아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삶을 살고 싶어요. 이를테면, 연기자 선배로서 실의에 빠진 후배들을 일으켜 세워주거나, 제 갤러리를 통해 재능은 있으되 아직 빛을 보지 못한 아티스트들에게 스포트라이트를 비춰주고 싶은 거죠.”그런 것들이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를 넘긴 사회적 선배로서 해야 할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말했다. 본인 또한 벼랑 끝에 내몰린 적이 있는데, 그때 자기를 붙잡아 준 고마운 분들이 있었다며, 그런 분들 때문에 오늘날 자신이 이 자리에 있는 것처럼 자신도 쓰러진 사람들을 일으켜 세워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덧붙였다.“또 환경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캠페인을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제가 나서서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또는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고 싶어요.” 한류 아트로 세계에 진출하고파 배우로서 이광기는 데뷔 후 17년간 오랜 무명 시절을 보내야 했다. 연기 초창기에 KBS <전설의 고향>에서 “내 다리 내놔”를 외치던 귀신 단역으로 출연하여 시청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기긴 했지만 이후 이렇다 할 대표작이 없었다. 그러다가, <태조 왕건>에서 견훤의 맏아들인 견신검 역을 맡아 열연을 펼친 것이 호평을 받아 2001년 KBS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긴 무명 시절에 종지부를 찍었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이정재의 수행비서 이억일 역을 맡아 확실히 전 국민에게 얼굴을 알렸다. 각종 예능 방송에서도 종횡무진 활약했었다. 그러다가 앞서 언급한 불행한 사건 이후 한참 동안 방송 활동을 중단했던 그는 2014년 <정도전>에서 하륜 역할로 다시 우리 곁에 돌아왔다. 한층 더 성숙해진 연기력으로 화제를 모았으며, “소생, 하륜이옵니다”와 같은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지금은 아트 디렉터로 왕성히 활동하고 있지만 동시에 가을에 선보일 주말 연속극도 지금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효심이네 각자도생>이라는 작품인데 데뷔 후 첫 주말 연속극에 출연하게 되어 너무 기분이 좋습니다. 극 중 태산그룹의 전무 ‘염진수’ 역을 맡았는데요, 유이, 하준, 고주원 등 젊은 후배 연기자들을 잘 서포트해주고 드라마의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할 수 있는 선배가 되고 싶습니다.”배우로서의 활동뿐만 아니라 향후 월드비전 홍보대사로 하게 될 봉사 활동들도 기다리고 있다. 또 ‘획의 발견’이라는 새로운 미술 전시 기획으로 ‘한류 아트’ 바람을 세계에 일으키고 싶다는 소망도 갖고 있다. 개인적인 버킷 리스트를 꼽자면, 가족들과 함께 세계의 유명 미술관들을 찾아다니는 문화예술 기행을 하고 싶다고. 개인적인 불행을 딛고 일어나 새로운 제2의 삶을 행복하게, 의욕적으로 살아가고 있는 그에게 항상 좋은 일과 건강이 함께하길 기원한다.
눈 덮인 마운트 쿡과 푸카키 호수 글·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아벨 타스만’이 서양인 최초로 ‘뉴질랜드’를 발견하였지만 그 후 100년이 지난 뒤 ‘제임스 쿡’이 이곳을 탐험하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뉴질랜드에 서양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제임스 쿡’에서 이름을 딴 ‘마운트 쿡’ 트레킹 코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로 꼽힌다. 남쪽 망망대해에도 알프스가 있다 뉴질랜드는 남태평양 한가운데 두 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북섬엔 국내 제1의 도시 오클랜드와 수도 웰링턴이 있고, 남섬은 천혜의 자연으로 유명하다. 여행자들에겐 아무래도 북섬보다는 남섬이 더 끌린다. 이런 남섬의 서해안을 남북으로 길게 이어가는 험준한 산줄기가 서던알프스산맥이다. 아름다운 알프스가 유럽의 지붕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름 그대로 적도 남쪽 망망대해의 섬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서던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은 해발 3,754m의 마운트 쿡이다. 원래 이름은 ‘아오라키 마운트 쿡’이다. ‘구름 뚫고 솟아오른 봉우리’라는 뜻의 마오리어 ‘아오라키’와 이 섬을 발견하여 서방세계에 알린 제임스 쿡 선장의 이름이 합쳐져 산 이름이 되었다. ‘아오라키’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주술적이고 원시의 기운이, ‘쿡’이란 이름에는 서양 문명과 현대 세계의 분위기가 묘하게 섞인 듯하다. 마운트 쿡 주변에는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짧은 트레킹 코스들이 여덟 개 포진해 있다. 만년설로 뒤덮인 마운트 쿡 정상은 전문 산악인들에게 맡기고, 나 같은 일반 트레커들은 마운트 쿡 주변의 이 코스들을 느긋이 트레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쁨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노을 무렵, 마운트 쿡의 그림자가 비친 푸카키 호수원시와 문명,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 남섬의 아름다운 도시 퀸스타운에서 6번과 8번 고속도로를 갈아타며 북으로 다섯 시간 가까이 달리던 버스가 드넓은 호숫가에 잠시 멈췄다. 마운트 쿡에서 녹아내린 빙하가 남으로 흐르고 흘러 모아진 푸카키 호수다. 극도로 미세한 얼음 입자들이 만들어낸 호수의 아름다움은 우윳빛 하늘색이나 에메랄드빛 같은 색감만으로는 표현이 아쉽다. 주변 여러 곳에 버스가 정차해 있고, 잠시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모두 호수와 그 건너 설산들을 응시하며 감탄하는 모습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좁아진 도로를 따라 30여 분을 달리던 버스가 마침내 섰다. 마운트 쿡의 관문인 마운트 쿡 빌리지, 거대한 설산들에 막혀 더 이상 길이 없어진 종점 마을이다. 원시와 문명, 현실과 비현실이 적당히 혼재된 듯한 분위기다. 넓은 평원이 거대한 병풍으로 둘러쳐진 모양새, 사방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설산들의 위용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푸카키 호수와 이전 밀포드에서 느꼈던 천연색의 아름다움은 없었다. 짙은 회색의 기운이 빌리지 주변을 잔뜩 에워쌌다. ‘황량한 아름다움’이란 표현에 어울리는 분위기다. 허미티지 호텔 인근 저렴한 유스호스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운트 쿡 트레킹 2박 3일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트레킹은 대개 허미티지 호텔 앞이 출발점인데 호텔을 중심으로 8개 트레킹 코스가 적절하게 포진되어 있다. 글렌코 스트림, 거버너스 부시, 후커밸리, 키아 포인트, 타스만 빙하호, 레드 탄스, 실리 탄스, 뮬러 헛, 이들 8개 코스 모두 마운트 쿡 일대의 산과 계곡 그리고 빙하 호수 주변을 오르내리는 트레킹 루트들이다. 이들 8개 중 뮬러 헛 코스와 후커밸리 코스가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다.트레킹 코스의 관문, 마운트 쿡 빌리지푸카키 호수의 절경에 취한 사람들🚩뮬러 헛 코스(왕복 12km, 9시간 소요)해발 1,805m의 뮬러 헛 정상에 있는 ‘뮬러(Mueller)’라는 이름의 산장(hut)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시작부터 코스는 매우 가파르다. 1,800개에 이르는 나무계단을 모두 밟고 나서야 산 중턱 넓은 평원의 작은 호수 ‘실리 탄스’와 마주한다. 호수 옆 의자에 앉아 잠시 숨 고르기 후 다시 정상을 향한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등 뒤의 시야도 시시각각 넓어진다. 뒤돌아보면 정면의 웨이크필드 산과 그 아래 짙은 회색의 뮬러 빙하 호수가 바짝 따라붙는 형국이다. 마운트 쿡 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설산들의 위용이, 산 아래 빌리지 주변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정상의 뮬러 헛은 30여 명 수용이 가능한 산장이다. 해발 2,000m도 안 되는 산악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설산 또는 알프스 산맥 깊숙이 올라온 듯한 분위기를 맛보게 해주는 곳이다. 뮬러 헛 코스 주변의 설산들경사가 가파른 뮬러 헛 코스를 오르는 트레커들🚩후커 밸리 코스(왕복 15km, 4시간 소요) 후커 호는 마운트 쿡의 빙하가 녹아내린 빙하 호수다. 고였다가 넘쳐흐르는 호수 물은 후커 강을 따라 남쪽 멀리 푸카키 호수로 향한다. 후커밸리 코스는 후커 강을 거슬러 후커 계곡을 따라 빙하 호수까지 다녀오는 루트다.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지 트레킹이다. 코스 초입에 홀연히 서 있는 알파인 추모탑이 거대 설산을 배경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코스 후반엔 주변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는 후커 전망대가 압권이다.‘100년 전 이 계곡은 빙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전망대 자리가 빙하의 바닥이었다. 지금 그 빙하는 계곡 위에 조금씩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빙하가 녹다 남은 얼음들이 정처 없이 호수를 떠다니고 있다.’ 이 일대의 지질 변천을 알려주는 전망대의 안내 글도 인상적이다. 각각 2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이 있는 구름다리 3개를 지나면 비로소 후커 호수에 이른다. 둥둥 떠 있는 수많은 유빙들이 신비로운 연둣빛을 띠며 호수의 회색 톤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호수 너머 끝자락에 후커 빙하로 덮인 마운트 쿡의 자태가 신비를 더한다.
만성적인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필리핀 민다나오 마을 글_ 윤제용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지금은 기후 위기의 시대이다. 너무 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온 선진국의 책임이 크다. 이러한 시대에 지구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국제협력에서 새로운 적정기술 분야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환경의 차이에 따라 적합한 기술도 달라져 적정기술이란 사회경제적 환경에 맞는 적합한 기술을 뜻한다. 그렇지만 적정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다양하고 일부 오해도 있다. 자연 환경은 물론 사회 환경이 다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필요도 다르다면 적합한 기술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노동력이 풍부한 사회에서는 지나친 자동화 기술 보다는 노동집약적 기술이 더 적합하다. 도시형 중앙식 수도시설이 없는 농촌 환경에서는 주변 지하수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기술이 더 적합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수준도 고려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같이 잘 살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부자 나라도 있고 가난한 나라도 있다. 부자 나라는 과잉 영양으로 비만 때문에 건강을 잃기도 하지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생필품의 부족이나 식량으로 고통을 당한다. 인공지능이니 생명 연장이니 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눈부신데 일부 나라의 지역 주민들은 당장의 의식주 해결이 어렵고, 화장실이 없기도 하며, 안전한 물도 없어 생활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필리핀 학교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 단체를 만든 이후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한 학교를 운영하는 성당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용할 먹는 물과 생활용수가 부족한데 혹시 도움을 줄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현지답사, 지하수 이용 수처리 시설 설계와 공사, 시음회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리 꼬마 학생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그림을 그려주고 노래와 춤 등의 공연을 해준 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당시 음수대의 수도꼭지를 적정기술 성격에 맞는 저렴한 것으로 할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조금 가격이 높더라도 기왕이면 멋진 것으로 해서 우리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한편 지금은 모 대학 의 교수가 되어 있는, 당시 우리 연구실 대학원생은 한 여름에 콘크리트 치는 일에 자원 봉사를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적정기술을 활용한 미얀마 산촌마을 식수정수기 보급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진 않아 일반적으로 적정기술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통해 좋은 일들을 하기를 원한다. 적정기술이 적용되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를 원한다. 자신들이 참여하는 과학기술 활동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적정기술 과학기술자들이 ‘특정 지역사회 또는 개발도상국에 더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거나 제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소외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소외계층에 대한 생각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일이다. 그래서 적정기술을 착한 기술이라고도 하고 따뜻한 기술이라고도 한다. 선진국들은 지구촌 공동체라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국제협력 지원을 한다. 개발도상국을 지원하여 개발도상국이 보다 잘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의도는 좋았지만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국제협력 활동이 이러한 가치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원으로 도움을 주니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반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의 필요에 따른 지원이라기보다는 선진국의 필요에 따른 국제협력이 될 수도 있다. 기후위기 해결에서 적정기술 가능성 찾아야 또한 경우에 따라서 적정기술이라는 말이 거부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선진국 기술들은 무엇인가 화려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개발도상국에게 제공해 준다는 기술은 왠지 구식이고 낡아 보인다. 이러한 오해 등으로 인해 적정기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도 있었다. 나름대로 생각해볼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기후 위기의 시대이다. 너무 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선진국의 책임이 크다. 선진국은 화석연료를 줄이는 저탄소 사회로 힘차게 전환 중이다. 개발도상국은 어떻게 하나? 화석연료의 남용은 해보지도 못한 가난한 개발도상국에 피해가 더 많이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많다. 얼마 전 홍수로 전 국토의 3분의 1이 잠긴 파키스탄을 생각하면 그러한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나는 지구를 살리는, 아니 지구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국제협력에서 새로운 적정기술 분야의 가능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리핀 민다나오의 초등학교에 지하수 이용 수처리 시설을 보급
산수문전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제공_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백제의 무늬벽돌은 간결하고 균형 잡힌 구도에서 오는 편안함과 특유의 완만하고 부드러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식 벽돌로 평가받는 ‘산수문전(山水文塼)’을 비롯해 ‘연화문전(蓮花文塼)’, ‘귀형문전(鬼形文塼)’ 등을 통해 백제인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그 안에 담긴 소망을 들여다 보자. 백제 회화예술의 정수, 무늬벽돌 193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있는 한 절터에서 무늬가 새겨진 벽돌 8매가 출토됐다. 각각 산수문전, 산수봉황문전, 산수귀문전, 연대귀문전, 반용문전, 봉황문전, 와운문전, 연화문전으로 명명된 이 벽돌들은 모두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한 변이 29㎝ 내외, 두께는 4㎝로, 네 모서리에는 홈이 파여 있다. 이를 통해 벽돌을 레고 블록 조각처럼 연결하여 건물의 바닥이나 벽면에 부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백제의 무늬벽돌은 고구려 고분 벽화 외에 삼국시대의 그림 유물이 극히 드문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발견이었다. 특히 동적이고 날카로운 표현이 특징인 고구려 회화에 비해 박진감은 좀 떨어질지라도, 안정감과 유연한 필치가 느껴진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그 말 그대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미의식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들이다. 이상세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다 먼저 가장 유명한 산수문전(山水文塼)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아래쪽으로는 우뚝 솟은 완만한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고, 하늘 위로는 뭉게구름이 바람을 타고 흘러간다.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봉우리들은 아기자기하게 묘사된 나무를 이고 서 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그리던 이상향, 봉래산일 것이다. 한 가운데는 암자 같은 집 한 채가 있고, 우측 바위 앞으로 스님인 듯한 인물 한 명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과연 저 인물은 수도를 하러 신성한 곳으로 찾아가는 구도자일까? 아니면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인이 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자신만의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고독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처럼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던 디테일들이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하나씩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산수문전을 비롯한 백제 무늬벽돌의 매력이다. 산수문전에 표현된 문양은 1993년에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 형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부드러운 곡선의 산봉우리가 중첩된 모습, 그리고 부수적으로 들어가 있는 인물 등이 두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또 다른 무늬벽돌인 ‘산수봉황문전’에 묘사된 봉황도 백제금동대향로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봉황과 흡사하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무늬벽돌 세트를 만든 장인과 금동대향로를 제작한 이가 혹시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산수문전에서는 좌우대칭의 안정적인 구도와 원근법까지 적용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고대 산수인물화의 발상지인 중국 육조시대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을 잘 보여준다. 조원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산수문전에는 상상 속의 해중신산(삼신산)을 이상세계로 여기는 믿음이 녹아있다”면서 “이러한 삼신산 그림의 원류는 백제금동 대향로와 무령왕릉 출토 은제 탁잔은 물론 조선시대 도자기에까지 구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산수귀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봉우리를 살짝 공그르면서 윤곽선을 슬쩍 집어넣은 기교와, 구름과 소나무를 문양으로 처리하면서도 생동감을 부여한 것은 거의 백제인의 마술에 가깝다. 사실상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의 미학을 단 하나의 유물로 표현해보라고 할 때 여기에 표를 던지는 분이 많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중에서 산수봉황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실용성에 장식성까지 겸비한 걸작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벽돌 세트 중에는 오늘날 캐릭터 상품 디자인에 활용해도 좋을 만한 도깨비 무늬 벽돌 2매도 있다. 하나는 ‘산수도깨비무늬벽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꽃도깨비무늬벽돌’이다. 머리와 상체가 하체보다 더 크고 몸체가 통통한 것은 오늘날 사랑받는 캐릭터나 마스코트에도 자주 적용되는 형태이다. 그래서인지 크게 벌린 입, 튀어나온 이빨, 치켜 뜬 눈꼬리와 커다란 눈에도 불구하고 이 도깨비들은 귀엽게만 보인다. 원래 이런 도깨비는 악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려넣는 것이지만 백제의 장인들은 벽사(귀신 퇴치, 辟邪)의 실용성뿐만 아니라 장식성과 해학미까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연화문전(蓮花文塼, 연꽃무늬벽돌)은 정확한 대칭과 균형을 이루고 있어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연꽃잎에 넝쿨무늬를 돋을새김하여 그러한 단점을 상쇄시켰다. 꽃잎의 끝은 살짝 올라간 모습으로 이는 사비를 수도로 했던 시기 특유의 연꽃 형태라고 한다. 벽돌의 네 모서리는 꽃잎으로 장식했는데 다른 벽돌들과 맞추어 보면 하나의 꽃으로 보이도록 정교하게 분할하여 새긴 것이다. 연대귀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의 부흥을 염원했던 노력의 결정체 이처럼 백제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늬벽돌 세트는 어디서 제작되어 규암면 외리에 묻히게 되었을까. 학자들은 벽돌들이 낙화암과 백마강 맞은편에 있는 왕흥사를 장식했던 것들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에는 “634년 2월 왕흥사가 완성됐는데, 채식이 화려하고 장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 문화의 절정기였던 무왕 시절에 지어진 사찰이었다면 당연히 당시 기와 예술의 최고봉인 무늬벽돌로 치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벽돌들은 바닥재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사찰 건물의 벽을 장식한 인테리어 소품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백제가 망하면서 왕흥사에 있던 유물들은 대거 반출되었고, 이때 무늬벽돌들도 뿔뿔이 흩어져 일부가 근처 외리에 묻혔던 것이다. 백제 말기,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염원으로 지어졌던 왕흥사.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무늬벽돌을 제작해 사찰을 최대한 장엄하게 꾸미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백제인들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후대에 길이 자랑할 수 있는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유산들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점이다. 연화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타 문양전 크기: 너비 15cm×길이 36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공주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