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보유자인 한복려 원장은 평생 궁중음식을 공부하며 많은 제자들을 양성해왔다.세계적으로 한식이 큰 인기를 얻기 시작한 요즘, 한복려 원장에게서 우리가 보존하고 널리 알려야 할 전통 한식의 정체성은 무엇인지 배워보자. ‘대장금’ 자문으로 한식을 세계에 알려 지금 전 세계에서는 이른바 ‘K-푸드’ 열풍이 불고 있다. 그중 김치, 치킨, 떡볶이, 치즈닭갈비, 비빔밥 등이 선두에서 인기몰이 중이다. 하지만 한식에는 이렇게 맵고 짜고 달달한 음식만 있는 것으로 세계인들이 오해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든다. 좀 더 깊이 있는 맛과 정갈한 상차림에 풍부한 영양까지 골고루 갖춘 우리 전통음식의 원형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궁중음식을 찾아보아야 한다. 궁중음식은 궁궐에서 왕족들만 먹던 것이 아니라 사대부가를 거쳐 일반 민중에게까지도 전해졌으며, 모든 한식의 ‘모범’이 되었던 음식이기 때문이다.궁중음식연구원의 한복려 원장은 궁중음식의 연구·교육·재현 등을 통해 우리나라의 뛰어난 식문화 전통을 세계에 알리고 계승·발전시키는 데 평생을 바쳐온 인물이다. 특히 국내 시청률이 50%가 넘고 전세계적으로도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대장금’에서 음식 자문을 맡아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드라마 ‘대장금’을 통해 우리 국민들과 전 세계인에게 우리나라에 이렇게 훌륭한 궁중음식 문화가 있다는 걸 알렸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낍니다. 또 2000년 남북정상회담 만찬의 메뉴개발과 지원에 참여했던 일도 자랑스러운 기억 중 하나이지요.” 예의와 기품, 조화로운 맛의 궁중음식 그렇다면 한복려 원장이 오늘날 되살리고 싶은 우리 궁중음식의 훌륭한 점은 무엇일까. 첫 번째로는 궁중음식은 예의를 갖춰서 먹는 제대로 된 한 끼 식사라는 점이다. 우리는 특별한 날을 기념하거나, 중요한 분에게 정성껏 식사를 대접하고 싶을 때는 한식보다는 양식 레스토랑을 선택하게 된다. 그쪽이 더 고급스럽고 격식을 갖추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궁중음식을 중심으로 제대로 된 한식 메뉴를 내놓기만 한다면 양식 레스토랑을 충분히 대체할 수 있다. 하지만 아직은 대중적으로 그런 인식이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궁중음식은 자극적이지 않은 맛으로 조리하여 예의를 갖춰서 먹도록 한 음식입니다. 요즘처럼 불판 위에서 가위 같은 위협적인 도구로 고기를 자른다든지, 요란한 연출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죠. 매스컴에서 볼거리를 위해 자꾸 그런음식들만 한식의 대표로 보여주는 것이 좀 안타깝습니다.”두 번째로는 궁중음식이 가진 복합적이고 깊은 맛이다. 궁중음식에서는 단 한 그릇의 음식에도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간단한 요리 같아 보이는 무장아찌만 해도 궁중음식에선 그리 간단하지 않다. 무를 간장에 절였다가 쇠고기 장국에 고기를 넣고 함께 펄펄 끓여서 바짝 졸이는 식으로 만든다. 한 가지 재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하고 조화로운 맛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궁중 일상음식으로 배우는 한식의 모범마지막으로 궁중음식에서 화룡점정이 되는 것은 깊이 있는 ‘장 맛’이다.“우리 한식의 정체성은 잘 발효된 장에서 나오는 ‘감칠맛’에 있다고 생각해요. 감칠맛을 얼마나 잘 살려냈는지가 중요한데 요즘 한식에서 너무 달달하거나 매운 맛을 강조하는 것은 좀 아니라고 봐요. 한식의 이미지가 그렇게 굳어지는 것은 안 좋죠.”그렇다고 해서 이미 널리 알려진 달고 매운 맛의 한식을 더 이상 알리지 말자는 얘긴 아니다. 그런 음식도 소개하면서 동시에 오리지널 한식이 가진 깊이 있고 풍부한 맛도 함께 세계에 알리자는 이야기다.그러한 차원에서 한복려 원장은 궁중음식의 다양한 측면을 좀 더 널리 알리고 대중들이 쉽게 접하도록 하기 위해 매년 궁중음식 정기발표회를 열고 있다. 올해는 10월 6~8일에 ‘조선 고종 임금의 추석 명절 수라상’이라는 주제로 공개행사를 개최했다.“지난해와 올해는 ‘상식 발기’와 ‘주다례’ 문헌을 참조하여 궁중의 일상 음식을 주제로 발표를 했어요. ‘상식’이란 왕실의 상례 기간 중 아침, 저녁으로 돌아가신 분께 평소에 드셨던 일상음식을 올리는 걸 말해요.”따라서 상식을 통해서 당대 평소 왕이 먹었던 일상음식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올해 행사에서는 추석 때 고종 임금이 먹었던 수라상을 전시하고 그중 일부 음식을 직접 찬합(도시락)으로 만들어보는 실습체험 행사도 열렸다. 적두수라(팥물을 들인 붉은 밥), 섭산적, 나복·란장과(무장아찌), 혜수침채(젓갈을 사용한 젓국지), 과일 등이 주요 메뉴다.“궁중의 일상음식이나 전통 음식에는 영양학적인 균형이 잘 갖춰져 있어 오늘날 우리가 모범으로 삼을 만합니다. 또 그런 명절 음식을 가족과 함께 만들어 먹을 때 집안에 음식 냄새가 가득 퍼지면서 가족 간 화목도 다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궁중음식의 현대적 계승을 위하여한복려 원장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 황혜성 교수의 영향력과 가르침을 빼놓을 순 없다. 그는 아직도 어머니의 뒤를 잇는 궁중음식 전수자로서 부담감을 늘 안고 살고 있다고 말한다.“어머니가 사라져 가던 궁중음식 문화를 발견해서 그것을 연구하고 정리를 하셨다면, 저는 그것을 오늘날 어떻게 재현해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계속 연구하고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앞으로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오면 궁중음식도 그런 기술들을 활용해서 더욱 발전시키고 보급해야 할 텐데 제가 어디까지 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어요.”그는 평소 한식을 주로 먹긴 하지만 아침에는 간편하게 커피와 함께 토스트나 샐러드도 먹곤 한다. 매끼니 한식으로만 챙겨먹는 건 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도 편의점 도시락이나 배달음식으로 끼니를 때우는 요즘 사람들을 보면 건강을 해칠까봐 마음이 아프다.한복려 원장도 얼마 전 병을 앓아서 1년간 매우 힘든 시기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앞으로는 조심스럽게 건강관리하면서 큰 욕심 없이 그저 평생 연구해왔던 것을 후세 사람들이 잘 활용할 수 있도록 체계적으로 정리하는 일에만 집중할 것이라고 전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건강하게 잘 먹고 사는 법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언을 우리에게 들려주었다.“음식에 대해 너무 욕심을 내지 마세요. 병이 있으면 음식을 가려서 먹고, 정말 나에게 맞는 음식이 무엇인지 공부해가면서 스스로 식단을 만들어 먹는 지혜가 필요해요. 옛날 우리 선조들에게는 냉장고나 빠른 배송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장기간 음식이 부패하지 않도록 짜게 양념해서 숙성시키는 조리법을 발전시켰어요. 하지만 오늘날엔 그럴 필요가 없으니 건강을 생각해서 되도록 덜 짜게, 적은 양념으로 간단하게 요리하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골고루 여러 가지 재료를 넣으면 양념을 적게 쓰고도 음식을 맛있게 만들 수 있습니다.”
사진 제공_ 조명박물관 한복의 우아함을 보여주는 노리개부터 국악기와 실내 장식까지. 예부터 매듭은 우리 삶 속에서 늘 함께해왔다. 60여 년 동안 매듭에 인생 전부를 바쳐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매듭의 새로운 세계를 연 국가무형문화재 故 김희진 매듭장의 장신 정신을 되새겨본다. 균형과 질서, 절제를 더한 생동감매듭장이란 여러 가닥의 실을 짜서 만든 전통 끈인 끈목을 이용하여 여러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우리 전통공예의 한 분야인 매듭은 조선 시대에 용도가 점차 다양해지며 생활 곳곳에 장식용으로 쓰였고, 조선 후기에는 궁중과 상류 사회뿐만 아니라 평민에까지 대중화되었다.김희진 매듭장의 매듭 정신은 균형과 질서의 미학, 절제미가 보태져 완벽을 추구한다. 촘촘하게 짜인 구성에 균형미까지 갖춘 그의 작품은 빈틈없으면서도 매듭의 문양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 숨 쉬는 것처럼 넘쳐흐르는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손끝에서 시작되어 맺기까지_매듭장 김희진, 사진출처 _ 공공누리 김희진 매듭장이 매듭을 할수록 더 큰 매력을 느꼈던 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걸 스스로 창조하기 때문이었다. 매듭 공정은 정련-염색-다회-매듭의 과정이 있는데 조선시대에는 각 단계별 장인이 있었으나, 현대는 매듭장이 정련부터 매듭까지 모든 과정을 총망라한다.공정의 첫 단계는 고운 색깔의 실을 얻는 것부터 시작된다. 염색은 장인의 색채감각을 드러내는 매우 중요한 공정 과정이기 때문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염색을 위해 명주실을 다듬고, 색이 잘 스며들도록 비눗물에 명주실을 적셔야 한다. 적당한 온도의 물에 염료를 넣고 염료의 양을 조금씩 늘려가며 여러 번 염색해야 색이 뭉치지 않는다. 염색한 명주실은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 늘어놓기 전, 중간중간 실을 탁탁 털어줘야 실에 윤이 흐르고 빛깔이 좋다. 골고루 털어 말리고, 다시 털어 말리는 과정에서 명주실의 윤기가 살아나고 말갛고 투명한 빛깔이 깨어난다. 이런 수고로운 과정을 거쳐야 순백의 실은 비로소 고운 빛깔을 품는다.명주실을 합사한 후 오른쪽 왼쪽으로 방향을 바꿔가며 수차례 꼬는 과정을 거치면 비로소 매듭을 맺기 위한 실이 완성된다. 굵게 하려면 이러한 과정을 반복해야 한다. 매듭장이 어떤 매듭을 할 것인지에 따라 끈목의 굵기와 모양을 다르게 하는데, 다양한 질감으로 표현하기 위해서는 다회틀이라는 독특한 기구를 이용한다. 한 땀 한 땀 짜져 있는 걸 눈이라 하는데, 한 치의 빈틈없이 끈을 짜 또렷이 살아있는 눈이야말로 매듭의 문양을 또렷하게 해 매듭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기도 한다. 38가지 전통 매듭 문양의 복원 _김희진, <기원> 김희진 매듭장은 1934년 황해도 해주 태생으로, 한 신문사에 연재된 문화재 관련 기사를 보고 어떤 도구 없이 오직 손으로만 완성 짓는 매듭에 매료되었다. 1963년 그는 초대 국가무형문화재 매듭장 보유자인 정연수 선생에 매듭 공예 기술을 사사 받은 이래 끊기다시피한 전통 매듭의 맥을 평생에 걸쳐 이었다. 그 당시 정연수 선생의 작업은 상여에 다는 대봉유소(상여의 네 귀에 늘어뜨리는 큰 매듭술)와 소봉유소(상여의 네 귀 맨 위 둘레의 늘어뜨리는 매듭술)의 강렬한 색실들이 매혹적이었다고 한다.어느 날 인사동에서 산 안경집에 달린 매듭을 맺는 방법을 스승에게 물었으나 답을 얻지 못해, 심칠암 선생을 찾아갔다. 매듭 하나도 지역마다, 스승마다 방법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안 그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장인을 찾아 나섰다. 당시 20대 미혼 여성이 매듭을 배우러 지방에 다니니 사람들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매듭을 향한 열정 하나로 힘든 줄 모르고 새로운 스승을 만나러 전국을 누볐다. 그가 각지의 장인들에게 매듭을 배우고 2년이 지나자 장인들이 한두 분씩 돌아가셨다. 더 늦었더라면, 그 매듭의 기법들은 지금까지 전해질 수 없었다. 그가 복원해 낸 매듭 문양은 총 38가지로, 우리나라 전통 기본형 매듭이다. “풀어본다고 알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맺는 방법이 그림이나 글로 표현된 것도 없고, 그야말로 이 매듭의 기법은 손끝에서 손끝으로 이어지고 매듭의 명칭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옵니다.” _ 故 김희진 매듭장 독창적인 기법으로 재해석한 전통_<가리개>, 사진출처 _ 공공누리 김희진 매듭장은 생전 총 43회 이상의 전시회를 열었고, 1974년 제1회 개인전, 1994년 카이로 공예박물관 초대전, 2007년 각 분야 최고의 명인이 모인 제4대 국새 제작에서도 매듭 장식을 담당했다. 공로를 인정받아 2010년에는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하기도 하는 등 명실공히 우리나라 최고의 매듭장인으로 매듭 전통의 복원과 아름다움을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작품을 만들 때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것은 색채감이다. 전문가들이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그의 색채감은 색깔이 화려하면서도 그 농도가 진하지 않아 우아하며 품위가 느껴진다. 각기 다른 다양한 색을 활용한 것은 어울림이 최고 덕목이었던 옛 선조들의 정신을 다양한 색채를 통해 표현한 것이다.김희진 매듭장이 매듭 공부를 위해 즐겨보는 것이 바로 옛 문헌이었다. 문헌에 남아 있는 매듭에 대한 기록을 찾기 위해 본 <악학궤범>은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던 악기에 대한 설명과 그림이 그러져 있는 음악 서적이다. 그 책에서 조선시대 궁중에서 연주하던 국악기에 매듭장식(유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소(簫), 박(拍), 해금(奚琴), 운라(雲鑼)를 포함한 총 다섯 개의 악기에 사라진 유소를 복원하여 찾아주었다. 이 밖에도 신윤복의 미인도 속 삼천주 노리개, 조선시대 문인 이재의 초상화 속 오방색 광다회를 자신만의 감각으로 재해석해 재현하였다.“현대의 기술과 감각으로 매듭을 재현한 것이 진짜 전승입니다. 정형화된 그러나 전해져 내려오지 않던 선비의 끈과 흉대에 해 놓은 매듭 끈을 완전히 독창적인 상상력과 기법으로 재현시킨 것은 이미 창작품입니다.” _ 故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 시간의 흐름에 예술성을 더하다_김희진 매듭장이 매듭을 맺고 있다, 사진출처 _ 공공누리 “매듭에는 역행하는 예가 없습니다. 반드시 길을 따라서 가야 합니다.” 이런 유훈을 남긴 김희진 매듭장은 매듭 전수회를 설립하여 기법을 전수하고 대중과 공유하는 발전적인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애썼다. 올해로 43주년을 맞이한 전수회는 생전 그의 기술과 정신을 여전히 전승하고 있다.2010년에는 <빛과 매듭 하나되다> 작품 전시회를 통해 ‘유니버스(UNIVERSE)1,2’, ‘매화도 피었네’, ‘기원’ 등 매듭과 빛을 재료로 전통미와 현대미를 융합한 작품을 선보였다. 새로운 소재와의 접목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김희진 매듭장은 작품을 통해 매듭의 현대적인 예술성의 면모를 가감없이 발휘했다.영원히 사라질 뻔한 전통의 매듭 기법을 재현하고 60여 년 동안 그 맥을 이은 김희진 매듭장. 매듭에 대한 열정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매듭의 격조를 높인 그의 작품은 오늘도 여전히 현대와 전통의 아름다운 소통을 이루고 있다.
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꿀벌과 함께 지구환경을 지키는 영웅이 있다. 지구의 청소부로 묵묵히 땅을 일구는 동물, 바로 ‘지렁이’다.10월 21일 ‘지렁이의 날’을 맞아 몰랐던 지렁이의 가치에 대해 알아보자. 찰스 다윈이 연구한 지렁이_지렁이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던 과학자 찰스 다윈 선입견 때문에 비호감이던 어떤 이가 겪어보니 더없이 좋은 사람이었던 경험이 있을 거예요. 생김새로 비호감을 넘어 혐오감마저 느낄 때도 있지만 알고 보니 생태계에 너무 귀한 동물이 있습니다. 바로 지렁이지요. 가늘고 긴 생김새는 뱀을 떠올리게 하고 뱀은 대체로 위험하기에 인류는 이를 피하도록 진화해왔습니다. 그러니 두려워하고 싫은 감정이 드는 건 어쩌면 당연합니다. 어릴 적 비 오는 날이면 땅 위로 올라온 지렁이가 많이 보였어요. 짓궂은 아이들이 지렁이가 눈에 띄는 데로 발로 밟아 짓이겨 버리기도 했고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지렁이가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징그러운 동물이 사라지는 것에 안도하는 마음도 솔직히 없었던 건 아니었어요. 지렁이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입니다. 과학자들 가운데 지렁이의 가치를 가장 높게 평가했던 이는 ‘종의 기원’으로 잘 알려진 과학자 찰스 다윈이었어요. 생전에 마지막으로 출간한 저작도 지렁이에 관한 책이었을 만큼 그는 30년 가까이 지렁이에 관심을 기울였다고 합니다. 대부분 하찮게 여기고 심지어 혐오감마저 느끼는 지렁이에 다윈은 왜 이토록 오랜 시간 관심을 가졌던 걸까요? 비글호를 타고 약 5년간의 항해에서 돌아온 다윈은 채집한 온갖 수집품을 정리하고 연구하느라 어느덧 몸이 쇠약해집니다. 모든 일을 중단하라는 의사들의 조언에 따라 슈르츠베리에 있는 삼촌 조스 웨지우드 집에 머무는 동안 삼촌으로부터 지렁이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듣습니다. 땅 위에 있던 낙엽이며 식물의 잔해 등이 사라지는데 아무래도 지렁이 소행인 것 같다는 말에 지렁이에 흥미를 느낍니다. 지렁이를 꾸준히 관찰하며 탐구를 통해 지렁이들이 수십 년 혹은 수 백 년에 걸쳐 서서히 지질학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걸 발견했지요. 그리고 이런 관찰을 통해 얻은 생각이 진화와 종의 기원에 관련된 자신의 연구와도 잘 맞아 떨어진다는 걸 알게 됩니다._생김새와 달리 지렁이는 생태계에서 귀한 동물이다 저평가된 지렁이_지렁이는 토양 건강의 지표로 알려져 있다. 10월 21일은 세계 지렁이의 날입니다. 2016년 영국 지렁이학회(The Earthworm Society of Britain, ESB)는 다윈의 책 《지렁이의 활동과 분변토의 형성》이 출판된 날을 세계 지렁이의 날로 정했어요. 생태계에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낮게 평가되어온 지렁이에 대한 인식을 높이기 위해 만든 날입니다. 하루 중 흙 밟을 일이 거의 없는 도시인들이 어쩌다 옷이나 몸에 묻은 흙을 ‘더러움’과 같은 의미로 취급한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어요. 그렇지만 흙이 없는 지구는상상할 수 없습니다. 흙은 생명을 품고 길러내고 생명이 다한 것은 다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흙으로 생명이 살 수 있도록 돕는 대표적인 생물이 지렁이입니다. 지렁이는 ‘소리 없이 땅을 일구는 농부’라 불리기도 합니다. 지렁이가 토양 건강의 지표라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고요. 생태학자들은 토양의 물리적, 화학적, 생물학적 특성에 많은 영향을 끼치는 지렁이를 토양의 ‘핵심종’으로 여깁니다. 지렁이는 낙엽을 비롯한 유기물을 지속적으로 먹고 하루에 체중의 1.5배나 되는 분변토를 배설합니다. 이렇게 배설한 분변토는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요. 일반 토양보다 분변토는 5배나 영양분이 많아서 비료 대신 분변토로 작물을 재배했더니 수확량이 30% 증가했다는 연구도 있어요. 지렁이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 기사_지렁이는 딱딱한 씨앗을 제외한 음식물 쓰레기를 소화할 수 있다. 도시에서 지렁이를 만날 수 있는 쉬운 방법은 음식물 쓰레기 처리 기사로 고용하는 거예요. 우리 집에는 지렁이 사육상자가 두 개 있습니다. 2020년에 지인으로부터 지렁이를 조금 분양받아 기르기 시작해서 작년에 사육상자가 두 개로 늘었어요. 주로 과일 부산물을 사육상자에 넣어주는데 특히 단맛이 나는 과일을 무척 좋아합니다. 한번은 사육상자의 흙에 비닐이 묻혀 있는 걸 발견한 적이 있는데 알고 보니 사과 껍질의 반질거리는 왁스 층이었어요. 왁스 층마저도 시간이 지나니 사라졌습니다. 얼마나 완벽하게 분해하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지렁이에 대한 경외감마저 들었어요.음식물을 쓰레기로 버리면 악취가 발생하고 처리하느라 비용이 들며 그 과정에서 온실가스도 발생하지만, 사육상자에 들어간 음식물은 지구에 어떤 부담도 주지 않고 고스란히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지렁이 사육상자를 열면 숲에서 맡는 향긋한 냄새가 납니다. 방선균이 활발하게 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지요. 사육상자의 흙은 점점 초코케이크처럼 검고 폭신하게 바뀝니다. 기름진 옥토로 불리는 우크라이나의 체르노젬이 이렇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과일 껍질 등 부산물에 함께 딸려 들어간 호박씨가 그 안에서 싹을 틔우고 고구마와 감자 조각들 역시 싹을 틔우고 잎을 내는 장면을 자주 목격합니다. 흙이 얼마나 비옥한지 느낄 수 있는 장면이지요. 생태계 유지를 돕는 일등 공신_생태계의 핵심 ‘흙’을 부지런히 일궈주는 지렁이. 몽골에서 시작된 황사가 한반도를 덮쳐 대기가 최악일 때가 있었지요. 가뭄과 홍수 등 기상이변으로 토양 침식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지렁이가 살 수 있는 건강한 토양이라면 벌어지지 않을 일입니다. 지렁이는 땅속을 돌아다니면서 공기를 공급하고 물이 잘 빠지도록 토양 구조를 느슨하게 만들어요. 그래서 홍수와 토양 침식을 방지하는 데 도움을 주지요. 한 마디로 숨 쉬는 대지를 만드는 일등 공신이 바로 지렁이입니다. 지렁이는 농약, 중금속 등 토양을 오염시키는 물질에 민감하기에 토양 건강과 독성 정도를 알리는 지표생물입니다. 지렁이는 오염된 땅을 정화하고 손상된 토양을 복구하는 데도 도움을 준다고 해요. 지렁이는 두더지나 오소리같이 땅속에서 사는 동물, 호랑지빠귀처럼 바닥에서 먹이 활동을 하는 새에게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기도 하지요. 생태계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도록 돕는 중요한 역할을 지렁이가 하고 있습니다. 이런 지렁이가 사라진다면 생명체는 흙에서 빠르게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흙은 우리 인류가 발 딛고 사는 곳일 뿐만 아니라 생명을 유지하는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터전입니다. 봄이면 아파트나 공원에 있는 나무를 소독하는 것이 지렁이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염려스럽습니다. 다른 대안은 없을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요?흙은 무생물이 아니라 수많은 생명을 품고 있고 그 바탕 위에서 팔십억 가까운 인구를 먹여 살리는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로 그 흙이 숨 쉬도록,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물을 품도록 지렁이가 부지런히 일구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지렁이와 내가 연결되어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면 그 터전이 오염되지 않도록 뭐라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을까요?
요즘 시골 특유의 여유와 편안함을 즐기는 러스틱 라이프가 뜨고 있다. 이와 더불어 건강하고 맛 좋은 지역특산품의 다양한 변화에 따라 시골과 도시의 새로운 상생 소비도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지역특산품 사 주기 열풍2020년 밀양시는 코로나19로 어려운 농어민을 돕기 위한 취지로 밀양시 농특산물 쇼핑몰에서 밀양 농산물 기획전을 기획했다. 2만 원의 가격에 온라인 장보기로 구입할 수 있는 밀양 농산물 꾸러미 세트가 준비되어 감자, 토마토, 부추, 청양고추, 콩나물, 애호박 등 알찬 구성의 농산물과 그 외 다양한 특산품을 구매할 수 있었다.지역특산품의 소비를 장려하기 위한 캠페인 또한 활발하다. 2023년 1월 시행 앞둔 고향사랑기부제는 개인이 주민등록상 거주지를 제외한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하면, 지자체가 그 기금을 지역경제에 사용하는 제도이다. 기부액 10만 원까지는 전액 세액 공제되고, 10만 원 초과분은 16.5%가 공제된다. 이는 지방소멸을 막기 위한 대안 가운데 하나로 추진되는 제도인 만큼 취약계층 지원과 공동체 활성화 등 취지를 살리기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마련해야 한다. 또한 지자체간 과열 경쟁 방지와 투명성 확보를 위한 노력도 뒤따라야 한다.“주변 지역과 연계 협력해서 생산해낸 물품은 제공할 수 있게끔 열어주는 거죠. 그래서 주변 지역과 협력도 가능한 형태로 사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신두섭/한국지방행정연구원 지반재정실장) (KBS 뉴스, 9.22) 식품업계, 지역 특산물 활용한 ‘로컬 바람’지역 특산물을 이용한 고품질의 식품들이 식품업계를 강타했다. 22년 9월, 글로벌 햄버거 프렌차이즈 맥도날드는 지난해 첫 출시 한 달 만에 160만 개 가까이 팔렸던 창녕 갈릭버거를 재출시했다. 전국 재배면적의 20%를 차지하는 창녕에서 자라고 수확한 대서마늘이 재료로, 통이 크고 단맛이 매운맛보다 강한 게 특징이다. 보통 버거 하나에 깐 마늘 6쪽이 속 재료로 들어가는데, 공급한 마늘 양만 85톤에 달할 정도로 전국적인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지난해부터 식품 유통업체 5곳과 협약을 맺는 등 창녕 마늘의 인지도도 점차 늘고 있다.“대형유통업체에 발주량이 계속 늘고 있는 상황입니다. 하루에 1.5배 정도 발주 물량이 늘었다고 보시면 됩니다.” (이성식/농협 창녕군연합사업단장) (KNN 뉴스, 9.4)최근 또 다른 햄버거 프렌차이즈는 하동 녹차를 이용한 음료를 내놓기도 했고, 남해 유자를 활용한 수제 에일 맥주도 등장했다. 지역 특산물을 활용한 식품업계의 로컬 바람에 지역의 우수특산물들을 알릴 기회도 덩달아 늘어나 식품의 품질과 맛 또한 다양해지고 있다. 로컬 특산품, 진화하다책 <오늘도 매진되었습니다> 저자 이미소는 서울에서 IT회사에 다니다 26살에 춘천으로 내려가 아버지의 감자 농사를 도와 감자를 팔기 시작했다. 감자와 울고 웃는 3년간의 동고동락 끝에 감자와 똑 닮은 춘천 감자빵을 개발해 연 매출 100억 원을 돌파했고, 대한민국 관광공모전 대통령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는 단순히 농산물을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청년 농부 출신 남편과 ‘농업회사법인 밭 주식회사’를 설립해 100여 명의 크루와 함께 ‘좋은 농산물을 올바른 방법으로 제공한다(Good Crops in a Good Way)’라는 슬로건 아래 종자의 다양성을 알리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위해 고민하고, 함께 성장하는 공간으로 밭을 만들고 있다. 현재도 춘천 감자밭 카페는 현지에서 체험할 수 있는 특산물을 이용한 각종 빵과 꽃밭 체험 등을 하며, 인스타그램으로 제품 소식과 팝업스토어 공지 등 활발한 소통으로 소비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이렇듯 새로운 형태의 유통 채널은 맛과 품질이 검증된 우리 특산품을 즐기며 농촌과 도시의 상생발전과 지속가능 소비가 가능하게 만들었다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고귀한 신분일수록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다는 의미로 자주 사용된 말이다.로마의 귀족들이 먼저 모범을 보여주었고 우리 선조들도 중시한 가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고 있을까? 로마 귀족들이 보여준 모범노블레스 오블리주는 프랑스어 문장입니다. 프랑스어로 쓰면 ‘Noblesse oblige’가 되지요. 여기서 노블레스는 ‘고귀한 신분’을 뜻하는 명사이고, 오블리주는 ‘강제하다’라는 동사의 3인칭 단수형이에요.이 둘을 합하면 ‘고귀한 신분은 강제한다’라는 의미가 되지요. 그렇다면 고귀한 신분은 무엇을 강제하는 것일까요?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여러 가지 특권을 누렸어요.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그러한 특권에 상응하는 의무도 잊지 말라는 것이었지요. 실제로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일어나면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고 스스로 최일선에 뛰어들어 용감하게 싸웠다고 해요. 예를 들어, 카르타고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와 벌인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로마의 집정관 13명이 목숨을 잃었어요.또한 로마의 귀족들은 사회적 지위와 부보다는 과소비를 지양하고 정신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겼어요. 많은 학자들은 로마가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고 그 맹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로마의 귀족들의 이러한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 덕분이라고 평가해요. 지성을 뽐내던 그리스인, 기술을 자랑하던 에트루리아인, 해상 무역을 장악한 카르타고인 등을 제치고 패권을 차지하고 1천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정신 덕분이라고 본 것이지요. 조국을 위해 싸운 영국 귀족들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표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19세기 프랑스 정치인이면서 작가인 가스통 피에르 마르크(Gaston Pierre Marc)라고 하네요. 그는 이 표현을 자신의 <격언집>에서 51번째 격언으로 사용했어요. 그는 이 표현을 통해,귀족들에게는 권리보다는 의무가 더 많았음을 강조했지요.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말할 때 빠지지 않는 사례는 영국 이튼 칼리지 졸업생들입니다. 1440년 헨리 6세가 설립한 이 학교는 영국 내에서도 명문 중 명문으로 알려진 학교예요. 이 학교 졸업생 중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목숨을 잃은학생이 1,157명이라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어요.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상당히 많은 학생이 조국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었어요.대부분 귀족 출신이었던 이 학교 졸업생들은 누구보다도 먼저 전쟁에 뛰어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실천했지요. 이튼 칼리지 내에 있는 교회의 벽에는 이렇게 전사한 모든 학생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요.1982년 영국과 아르헨티나 사이에 포클랜드 전쟁이 일어났을 때 영국 여왕의 차남인 앤드류 왕자가 헬리콥터를 몰고 참전한 것도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 사례로 남아있어요. 왕위 계승 4위인 왕자가 전쟁 일선에 나선 것은 오늘날까지도 큰 미담으로 남아있어요. 화랑정신과 선비정신을 되살리자 우리에게도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있었어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데 기여한 화랑정신이나 조선 시대 대의를 위해 목숨까지 버린 선비 정신은 그것과 견주어 볼 수 있어요. 문제는 이런 고귀한 전통이 점점 흐릿해지고 있다는 거예요. 돈 많은 기업의 회장이나 힘 있는 정치인은 자신이나 그 자식들을 군에서 빼기 위한 온갖 수단을 동원하지요. 21대 국회의원 5명 중 1명은 군 복무를 하지 않은 사람이고, S사 일가의 병역 면제율은 70%가 넘는다고 해요. 이런 사람들이 입만 열면 나라 사랑을 외치지만 그것이 공허하게 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에요. 한국은 ‘노블레스’만 있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없는 나라라 할 수 있어요.오늘은 이 글을 쓰는 저,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하루였으면 합니다. Tip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게 하는 명언들• “사방백리 안에 굶어 죽은 사람이 없게 하라.” - 경주 최부잣집 가훈• “사람은 죽으면서 돈을 남기고 또 명성을 남기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값진 것은 사회를 위해서 남기는 그 무엇이다.” - 유한양행 창업주 故 유일한 박사• “부자로 생을 마감하는 것이 가장 수치스런 일이다.” - 강철왕 앤드류 카네기(전 재산 기부)• “많은 것을 받는 사람은 많은 책무가 요구된다.” -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