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유한하지만 신성한 약속은 죽음을 뛰어넘는다. 산악인 엄홍길의 인생에서 히말라야 16좌 등정이라는 위대한 업적 이상으로 중요했던 것은 먼저 간 동료들을 두고 다짐했던 약속을 지키는 일이었다. 교육으로 네팔에 희망을 심다대자연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거꾸로 그 생명을 거둬가기도 한다. 히말라야에 도전해본 산악인들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5,000m의 베이스캠프까지만 가도 혈중 산소포화도는 90%로 떨어진다. 8,000m를 넘으면 60%로 뚝 떨어지는데, 피가 찐득해지고 눈은 튀어나올 것 같다. 서 있기만 해도 목숨이 위태롭다.산악인 엄홍길은 그 위험한 히말라야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완등한 후, 다른 8,000m급 위성봉 두 개까지 등정하여 16좌 등정에 성공한 우리나라 산악계의 살아있는 전설이다. 수많은 시련과 좌절을 거쳐 도전과 극복의 기록을 써내려간 그의 이야기는 영화나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되어 많은 이들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준다. 그런 그가 이제 남은 인생에서 17좌 등반에 도전한다고 밝혔다. 그것은 바로 ‘네팔 교육사업’이다. 네팔을 ‘제2의 조국’이라 부를 정도로 특별하게 생각하는 그는 지금까지 총 16개의 학교를 네팔에 세웠다.“단지 학교를 세우는 것뿐만 아니라 교사들의 월급을 주고 건물을 유지·보수하며 장학사업까지 벌이고 있습니다. 너무나도 열악하고 척박한 환경 속에서 제대로 된교육이나 의료 혜택도 못 받고 꿈도 희망도 없이 살아가던 아이들에게는 교육만이 배고픔을 해결하고 현재의 환경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라 믿었습니다.” 먼저 떠난 동료들을 위한 다짐그가 이 사업에 뛰어든 계기는 죽음의 문턱에서 히말라 야의 신들과 한 약속 때문이었다. 1985년부터 22년 동안 38번 히말라야에 도전했다. 그 과정에서 산악인 6명, 셰르파 4명 등 모두 10명의 소중한 친구들을 잃었다. 그 자신도 치명적인 부상을 당하거나 살인적인 추위 속에서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던 적이 부지기수였다.“16좌 성공을 앞두고 목숨이 위태로웠던 순간, 히말라야의 신에게 간절하게 ‘살려달라’고 빌었습니다. 내 목표를 달성하게 해주시고, 여기서 무사히 내려가게 해주시면 남은 인생은 먼저 간 동료들을 위해서라도 제가 받은 것을 주위에 나누면서 봉사며 살겠다고.” 또한 1986년 그가 두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에 나섰을때 식량 보급을 하던 셰르파, 술딤 도르지가 추락 사고를 당한 일도 그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만든 한(恨)이자 원동력이었다. 당시 열아홉 살의 어린 셰르파였던 술딤 도르지는 열여덟 살의 신부와 홀어머니를 세상에 남겨두고 숨을 거뒀다. 그는 아직도 바위 위에 남겨진 그의 선명한 핏자국과 찢어진 옷자락을 잊지 못한다. 엄홍길 대장은 산악인 은퇴 후 2008년 엄홍길휴먼재단을 설립해 사랑과 봉사의 정신을 설파하며 종횡무진 활동한 끝에 드디어 2010년 술딤 도르지의 고향 팡보체에 1호 학교를 세울 수 있었다. 현재 16개 휴먼스쿨에 재학 중인 학생은 6,000명이 넘는다. 졸업 후엔 대부분 생활 전선에 뛰어들지만 대학에 진학하면 장학금을 주고 필요한 경우 기숙사비나 하숙비도 지원한다.“네팔 현지 마을에서 학교발전협의회를 만들긴 했지만 그곳도 경제적 여력이 없어서 재단 예산으로 꾸려가야 합니다. 그런데 최근 코로나19 여파로 기존에 후원하시던 회원 분들이 많이 빠져나가서 어려운 상황이죠. 요즘은 자나 깨나 어디서 후원받을 데 없을까 그 생각뿐이에 요.(웃음)” 산에서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라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도전에 성공한 덕분일까. 그에게는 많은 이들이 더 이상 진전할 곳이 안 보이는 막다른 길에 이르렀을 때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물어보곤 한다. 그는 산이 자신에게 그러한 물음에 대한 답을 주었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살면서 편하고 좋은 길만 갈 순 없잖아요. 결국 우리 인생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불확실성에 대한 도전의 연속입니다. 그런 상황에 처했을 때는 ‘나만 힘든 것이 아니다’라고 먼저 떠올려야 합니다. 그 자리에서 영원히 정지되어 있을 순 없습니다. 긍정적인 생각과 자신감을 가지고 어떻게 그 어려움을 빨리 벗어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여기서 끝이라고 생각하면 질 수밖에 없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더 크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시련을 극복해내야만 하는 것, 그것이 산이 그에게 가르쳐준 인생의 지혜였다. 그리고 만약 어떤 문제에 부딪혀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울 때는 ‘산에 올라가보라’고 조언한다. 혹자는 산악인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뻔한 말이 아니겠느냐고 생각하겠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얼굴은 형언할 수 없는 자신감과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산을 오르다 보면 당연히 숨이 차고 헉헉거리게 되지만 그 고통을 참고 어떻게든 정상에 도달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거기서 자신의 새로운 내면세계를 들여다보고 자신과 많은 대화를 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굉장히 큰 자산이 됩니다.” 끝없는 도전, 영원한 청춘 지난해 12월 1일, 엄홍길 대장은 대한적십자사로부터 ‘적십자박애장 금장’을 수상했다. ‘적십자박애장 금장’은 공평무사하게 인류애를 발휘하여 위난에 처한 인명 구제 및 안전 도모, 불우한 자의 복지증진에 탁월한 공로가 있는 자에게 수여되는 포상이다. 대한적십자사는 엄홍길 대장의 네팔 교육사업뿐만 아니라 2015년 네팔 지진 피해 구호 활동, 그리고 최근에는 코로나19로 피해를 입은 소상공인과 취약계층 가정에 도시락을 선물해주었던 ‘1004가 전해주는 황금도시락’ 캠페인에 참여한 일도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황금도시락 캠페인은 어느 방송국에서 의뢰가 들어와 처음 시작하게된 것이었습니다. 방송이 나가고 나서 이렇게 호응이 뜨거울 줄은 예상 못했어요. 처음에는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만 하다가 나중에는 전국적으로 확대가 되어 저도 굉장히 큰 보람을 느꼈던 사업입니다.” 그는 요즘에도 산을 자주 오른다. 가장 자주 가는 산은 집에서 가까운 북한산이다. 산에 가면 답답했던 가슴도 뻥 뚫리고 스트레스도 해소된 다. 실제 산도 좋지만 그에게 남은 마지막 산은 ‘엄홍길휴먼재단’이라고 한다. 이 재단을 통해 세운 교육사업의 목표를 이뤄가면서, 어떻게든 그 옛날의 약속을 지켜나가는 것이 남은 인생의 소망이다.“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면 지난 3년간 중단됐던 ‘DMZ 평화통일 대장 정’도 다시 시작할 계획입니다. 전국에서 100여 명의 남녀 대학생들을 선발해 휴전선 155마일을 행군하는 프로젝트인데, 이를 통해 이 땅의 청년들에게 분단 조국의 역사적 교훈과 통일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고 싶습니다.”그의 나이도 어느덧 63세. 하지만 그의 도전은 여전히 청춘의 푸른색을 띠고 있다.
사진제공 : 충북보은전통공예체험학교, 스타벅스코리아 멀리서 보면 평범한 수묵화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뭔가 다른 느낌이다. 도구는 달랑 인두 세 개. 색깔도 하나뿐이지만 산, 바위, 초목, 호랑이 등 삼라만상을 자유자재로 표현해낸다. 은은하기도 하고 강렬하기도 하고 개성이 넘치는 낙화의 세계. 그 중심에 낙화장 김영조가 있다. 낙화 작업에 열중하고 있는 김영조 장인의 모습 5백년 역사를 가진 전통예술, 낙화 벌겋게 달궈진 인두가 종이 위를 지나간다. 때로는 천천히, 때로는 빠르게. 마치 춤추듯 막힘이 없는 낙화장의 솜씨에 따라 인두 끝에 하얀 연기가 피어나면서 종이 위에는 어느새 산, 바위, 국화, 대나무 등이 새겨진다. 이렇듯 낙화(烙畵)는 불에 달구어진 인두로 종이나 섬유, 나무, 가죽 등의 표면을 지져서 산수화, 화조화 등의 그림이나 문양 등을 표현하는 우리나라의 전통 예술이다.낙화의 역사에 대한 정확한 문헌 기록은 없다. 오래 전 중국에서 처음 건너와 서민들과 부녀자 사이에서 널리 전파되다 1820년 박창규라는 유명한 낙화장의 등장으로 크게 유행하게 된다. 하지만 박창규 명인의 작고 후밀양 박씨 가문에서만 가업으로 이어져오다가 대중과는 멀어지게 됐다.5백여 년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전통예술로 인정받지 못했던 낙화를 우리나라 대표 문화재 반열에 올린 이가 있다. 지난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136호로 지정된 국내 유일의 낙화장, 김영조 장인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김영조 장인은 20대 때 일찍 아버지를 여읜후 일자리를 찾던 중 우연히 신문에서 ‘낙화 수강생 모집, 취업도 가능’이라는 광고를 보고 낙화의 세계에 입문했다고 한다.“어렸을 때부터 상상하고 보고 그리는 걸 즐겨했어요. 저희 스승이신 전창진 선생이 인두로 종이를 지져 동양화, 산수화 등을 그리는 모습을 보고 신세계를 발견한 느낌이었죠. 낙화가 그려지는 과정을 보자마자 난 이것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산도(夏山圖), 186cm×70cm, 전통한지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기까지 낙화를 익히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최소 20년 동안 수련해야 튼튼한 밑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고 한다.“30평 남짓한 공간에서 10개가 넘는 숯불을 피우고 그림을 그렸어요. 한여름엔 온도가 50도 넘게 올라갔죠. 인내심 없인 할 수 없는 작업인지라 40명이 넘었던 수강생은 10명으로 줄었고 결국 낙화연구소도 문을 닫았어요.”하지만 그는 낙화를 그리는 인두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생계를 위해 각종 관광지에서 기념품을 제작·판매하며 전통 낙화 기법을 이어왔다. 낙화를 그린 지 십수 년 뒤, 그는 잘 운영되던 기념품 가게를 정리하고 자신만의 낙화연구소를 만들어 본격적으로 낙화 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낙화 작품은 운보 김기창 화백에게도 극찬을 받았 으나 한편으론 각종 국전, 전시회에서는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을 받지 못해서였다.그는 오랫동안의 자료 수집, 학자들과의 교류 및 연구 등을 통해 낙화를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게 하고자 노력했다. 그 결과 2007년 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데 이어 중국 상하이, 이탈리아 아솔로 비엔날레, 태국 동아시아문화도시특별전 등 해외에서 많은 시연을 진행하며 낙화를 널리 알렸다. 마침내 2018년, 대한민국은 그를 무형문화재 136호에 지정하게 된다. 맹호도(猛虎圖), 91cm×148cm, 전통한지 담백하면서도 미묘한 낙화의 매력 낙화는 오직 한 가지 색으로만 표현된다. 인두와 불을 다루는 숙련된 손놀림과 미묘한 농담을 표현하는 기술이 낙화의 예술성을 결정짓는다. 열과 인두의 강약에 따라 색이 검어지기도 하고 갈색을 띄기도 한다.낙화는 종이 외에도 나무, 비단, 가죽 등 불에 타는 것이 라면 어느 것이든 캔버스로 활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낙화는 회화인 동시에 공예의 면모도 갖추고 있다. 특히 한지를 그을리면 나오는 특유의 갈색은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깊이가 있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낙화의 작업 과정은 일반 회화보다 훨씬 더 어렵다. 작품을 구상한 후 스케치하는 데까지는 여느 회화와 같다. 하지만 이후의 작업 방식은 전혀 다르다. 먼저 화로에 고품질의 참숯을 올린 후 풍로를 돌려 불을 피운다. 인두를 달구기 위해서다. 인두는 점과 선을 그릴 때 사용하는 앵무부리인두 한 개, 그리고 넓은 면을 표현할 때 쓰는 평인두 두 개가 한조이다.“낙화는 한 작품을 그리는 데도 상당히 긴 시간이 걸립니다.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에서 특선을 차지한 작품 <강산무진도>는 완성까지 꼬박 1년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힘든 과정을 거쳐 작품을 완성했을 때의 뿌듯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신악경림도(神岳瓊林圖), 60cm×130cm, 전통한지 끝까지 가보자는 정신으로 여기까지 낙화는 우리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감각에 얼마든지 맞출 수 있다. 예를 들어 그가 2015년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에서 시연한 작품 <視(See)>는 사진인지 낙화인지 구분할 수 없을 정도의 정교함을 자랑한다. 또지난 2018년에는 스타벅스코리아와 함께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헌정 텀블러에 낙화 작품을 넣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김영조 장인은 “어려웠던 시기에 우리 민족의 애환을 간직한 건물인 만큼 주미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을 소박하면서도 깊이 있게 표현하고자 했고, 그 어떤 회화보다 낙화와 잘 어울리는 작품이 된 것 같다”고 소감을 밝혔다.그는 국가무형문화재가 된 것은 끝이 아니라또 다른 시작이라고 말한다. 죽을 때까지 우리 전통 낙화의 계승과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자신의 짐이자 의무라는 것이다.“장인은 미련해야 합니다. 미련하지 않으면 절대 장인이 될 수 없습니다. 약은 사람은 이익과 편리성을 찾아 떠나지요. 저도 20년 정도 됐을 때 굉장히 갈등을 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명예나 돈도 없는데 내 일생을 걸어야 하나 고민했지요. 그런데 그동안 걸어온 시간이 너무 아까워서 끝까지 가보자 한 것이 여기까지 왔습니다.”한때 명맥이 끊어질 뻔했던 낙화를 세상에 다시 널리 알리고, 젊은 사람들이 즐겨 마시는 커피 프랜차이즈의 텀블러에까지 낙화를 새겨 넣은 김영조 장인. 그의 손에 쥐어진 시뻘건 인두 끝에서 또 어떤 멋진 예술세계가 펼쳐질지 자못 기대된다. 스타벅스 텀블러에 새겨진 ‘주미대한제국공사관’ 낙화
주위에서 참새를 본 적이 언제던가 떠올려보면 언뜻 잘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도시 공간의 팽창과 소음으로 인해 참새도 점점 그 개체 수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이다. 3월 20일 세계 참새의 날을 맞아 참새의 소중함에 대해 알아보자. 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봄의 풍경에서 찾는 자연의 이치 노랑 생강나무꽃, 진홍 진달래꽃이 숲과 들을 물들이기 시작하는 봄입니다. 나무들이 잎눈으로 꽃눈으로 한껏 기지개 켜는 소리가 들리는 봄 숲은 아름답습니다. 봄에 놓칠 수 없는 소리 풍경은 새들의 합창입니다. 해뜨기 전부터 깨어나는 새들이 목청껏 노래를 시작하며 새벽을 엽니다. 이 땅에 살고 있는 텃새들은 이즈음 짝을 찾느라 열심히 목청을 가다듬고 곡조를 뽑는 소리가 우리에게 또 하나의 풍경을 선물합니다. 짝을 찾고 둥지를 짓는 새들은 봄 나무에 어린잎이 돋아나 자라길 기다릴 거예요. 따스한 봄볕에 온화한 바람과 촉촉한 봄비를 맞으며 마른 나뭇가지에 물이 오르면 움츠렸던 잎눈이 활짝 펴지면서 쑥쑥 자랍니다. 때를 맞추어 애벌레들도 무수히 깨어납니다. 알을 품고 새끼를 부화시킨 새들은 애벌레를 열심히 물어다 나르며 새끼를 기릅니다. 자연의 이치는 톱니바퀴 맞물리듯 정확히 맞추어져 있어요. 공진화의 흔적입니다. 자동차 경적이나 엔진 소리는 참새의 수명을 줄이기도 한다. 생태계에서 새가 사라진다면 만약 새가 없다면 이 세상엔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애벌레를 잡아먹는 새가 사라지니 나무마다 돋아나는 잎들은 금세 애벌레에게 뜯어먹혀 버릴 겁니다. 광합성 공장인 잎이 사라진 나무는 생존이 가능할 까요? 머지않아 숲은 나무들의 무덤이 될 겁니다. 병충해로부터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아무리 살충제를 뿌린다 한들 새가 사라진 숲을 복원하는 일은 불가 능할 겁니다. 황폐해진 숲은 녹색 댐의 역할을 할 수없으니 내리는 비는 많은 것들을 쓸어갈 테고 우리는 물 부족에 시달리며 삶의 질은 급격히 떨어질지도 모릅니다. 단지 생태계에서 새가 사라졌을 뿐인데 정말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생태계에서 조류의 역할이 과소 평가되었다고 생각하는 과학자들이 조류의 생태계 서비스에 관해 조사하고 연구했습니다. 2018년 스위스 바젤대 생물학자들이 과학저널 ‘사이언스 오브 네이처’에 실은 논문에 따르면 조류가 먹어 치우는 곤충의 양이 지구 전체에 걸쳐 연간 대략 4억~5억 톤에 이른다는 겁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추정하는 인류의 연간 육류와 생선 소비량인 4억 톤과 비슷한 수치입니다. 자연에 있는 모든 것들이 공존해야 할 이유는 분명한 것 같습니다. 환경운동가가 참새 집을 만들어 나무에 설치하고 있다. 참새 소탕 작전에 나섰던 중국의 비극 일 년 내내 우리와 함께 사는 새가 있어요. 도시든 시골이든 가리지 않고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든 있는 새, 참새입니다. 참새는 너무 흔해서 오히려 알려진 정보가 많지 않은 새입니다. 그래서 참새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참새를 제대로 아는 사람도 드물어요. 참새가 어떻게 생겼냐고 물으면 대개 갈색이고 조그맣고 귀엽다고들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묘사할 수 있는 새는 무수히 많습니다. 그렇다면 참새는 어떻게 생겼을까요? 참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매력 넘치는 새입니다. 양쪽 뺨에 검은 반점이, 멱에는 검은 털이 특징입니다. 특히 볼수록 까맣고 반짝이는 눈이 사랑스러운 새가 참새입니다. 대부분 새가 사람과 멀리 떨어져 지내는 것과 달리 참새는 사람 가까이 삽니다. 길에서 차에 치여 죽은 참새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일본 나가노현의 산간 지역에는 참새가 많이 살았다고 해요. 그런데 사람이 살지 않게 되자 참새도 자취를 감췄다고 합니다. 농경지에 참새가 더 많이 살 것같지만 100헥타르당 주택가에는 452.7마리, 농경지 에는 14.2마리가 산다는 통계를 봐도 참새가 얼마나 사람 가까이에 살고 있는지 알 수 있지요. 사람 곁에 살면 천적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으니 참새가 이런 선택을 한다고 알려져 있어요. 어쩌면 사람이 가장 무서운 천적일 수도 있는데, 사람을 방패 삼는 것을 보면 참새가 사람을 이용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실제 사람이 참새의 최대 천적이었던 적이 있어요. 1958년 중국에서 농공업 증산을 목표로 마오쩌둥이 대약진운동을 추진합니다. 철강을 생산하려 숲은 말할 것도 없고 과수원 나무까지 벌목해서 용광로의 연료로 썼어요. 산이 헐벗으니 큰비가 내리면 홍수와 산사태가 발생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그로 인해 농경지가 망가졌어요. 농사를 망치니 곡물 증산이 시급한 문제였는데 마침 참새가 곡식 낟알을 먹는 광경을 본 마오쩌둥은 참새 박멸을 지시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중국 대륙 전역에서 대대적인 참새 소탕 작전이 벌어졌고 1년 동안 참새를 무려 2억 1,000만 마리나 잡아들입니다.곡식 낟알을 먹는 참새를 없앴으니 소출이 늘었을까요?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이 창궐하면서 전례 없는 흉작을 맞았습니다. 이 때문에 굶어 죽은 사람이 1,000만 명쯤 된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 사망자는 4,00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인간의 인위적인 개입으로 생태계의 균형이 어떻게 허물어지는지, 그리고 그 대가가 어떻게 우리에게 되돌아오는지 중국의 참새 소탕에서 교훈을 얻으면 좋을 것 같아요. 양쪽 뺨에 검은 반점이, 멱에는 검은 털이 있는 것이 다른 텃새와 구별되는 참새의 특징이다. 새가 살아야 숲도 산다 3월 20일은 세계 참새의 날입니다. 특히 도시에서 참새를 보전하려는 취지에서 프랑스와 인도의 시민 단체들이 뜻을 모아 만든 날입니다.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참새 개체 수도 전 세계적으로 줄어들고 있어요. 서식지가 줄어드는 게 가장 큰 이유입니다.도시가 인공물로 계속 채워지니 생명들은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습니다. 도시를 채운 자동차 등의 소음도 참새의 생존을 위태롭게 합니다.새들은 짝을 찾기 위해 지저귀는데 소음은 짝을 찾는 데 방해가 되기도 하고요. 자동차 경적이나 엔진 소리 등 교통 소음이 참새의 수명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도 있어요. 기온 상승도 조류에 미치는 영향이 분명 있습니다. 아마존에 사는 조류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로 조류의 몸무게는 줄고 날개는 길어졌다고 해요. 기온 상승으로 체온을 떨어뜨리기 위해 몸 크기를 줄이는 걸로 과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참새의 날은 소중합니다. 도심 한복판에도 참새는 둥지를 틉니다. 가로등이나 신호등의 좁은 틈새, 건물에 뚫린 실외기 구멍까지 어디든 참새가 들어갈 공간이 되면 비집고 들어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릅니다. 이렇게 참새가 주변에 살면서 적절하게 애벌레를 조절해줍니다. 가로수는 말할 것도 없고 공원의 나무며 동네 가까운 숲도 적절히 관리하니 참새는 살아있는 살충제인 셈이지요.떠들썩해지는 봄 숲에는 애벌레들도 꼼지락 등장할 겁니다. 벌레만 보면 몸이 먼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는 사람도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만 그럼에도 숲에 벌레가 있기에 새들도 살아가는 거니 마음만은 미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참새를 만날 때마다 새들이 우리에게 베푸는 역할을 떠올려보면 어떨까요? 도시공원이나 가까운 숲에 좀 지저분한 덤불이 있다면 치워달라 민원을 넣기 전에 그곳이 새들의 쉼터이자 잠잘 공간이라는 걸 기억해주면 좋겠습니다. 새가 살아야 숲도 살고 숲은 기후 위기 시대에 중요한 탄소 저장고이기도 하니까요. 참새는 도심 속에서 사람과 가까이 살고 있다.
환경에 미치는 영향까지 고려해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늘어나면서 기업도 점차 변하고 있다. 포장부터 세심하게 친환경 소재를 사용하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국내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는 착한 포장 기업들을 알아 봤다. 비대면 소비에 늘어나는 플라스틱 쓰레기 코로나19로 비대면 소비가 늘어나면서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플라스틱은 자연 상태에서는 거의 분해되지 않아 영원히 썩어 없어지지 않는 물질로 불린다. 이미 지구의 바다에는 1억 6,500만 톤의 플라스틱 쓰레기가 부유하면서 해양 생태계를 크게 위협하고 있는 상황. 이러한 가운데 긍정적인 소식은 친환경 소재의 포장재를 사용하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식품업 계와 홈쇼핑업계를 중심으로 한 변화가 두드러지고 있다. 환경친화 포장제품 확대하는 식품업계 식품업계의 대기업인 CJ제일제당은 ‘친환경 패키징 정책’으로 착한 포장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이를 위해 20명 이상의 석·박사 연구원과 외부 학계 및 전문기관, 포장재 공급 업체 등이 힘을 합쳤다. 우선 포장재 사용량을 줄이기 위해설계단계부터 포장재를 최소화하고 있다. 햇반 용기를 예로 들면 음압 구조의 형태로 불필요한 내부 빈 공간을 줄이고 두께도 처음 사용했던 용기의 30%까지 줄였다. 또한 소비자들이 제품을 폐기할 때 재활용을할 수 있도록 포장재 소재를 하나로 통일하거나 포장재를 에코백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제품을 폐기하여 매립한 후에는 땅속의 미생물에 의해 자연적으로 분해될 수 있도록 친환경 원료를 사용하고 있다. 제과업체 오리온은 2014년부터 과대포장을 개선하면서 친환경 포장 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2015년에는 20여 개 브랜드에 디자인을 단순화하고 인쇄도수를 낮춰 포장재 잉크 사용량을 대폭 줄였다. 또 포장재 인쇄와 접착에 사용되는 유해화학물질을 친환경 물질로 대체하는 그린포장 프로젝트를 실시했다. 2017년에는 인체에 유해한 휘발성유기화합용제를 사용하지 않는 환경친화적인 포장재를 개발해 식품용 포장재로는 최초로 환경부 ‘녹색기술 인증’을 획득했다. 2019 년부터 총 120억 원을 투자해 잉크 사용량을 기존 대비 50%가량 절감할 수 있는 ‘플렉소 인쇄설비’를 도입하는 등 환경 친화적 포장 적용 제품을 확대하고 있다. 홈쇼핑업계 배송포장 줄이기 나서다 홈쇼핑업체들과 백화점도 배송포장 줄이기에 속속 나서고 있다. CJ ENM오쇼핑은 식품 배송에 종이 보냉박스, 친환경 아이스팩, 친환경 보냉패키지를 사용하고 있다. 종이 보냉박스는 종이상자 안에 알루미늄 라미네이트 필름을 붙인 종이판을 사용해 냉동을 유지한다. 박스는 내외부가 종이로 만들어져 쉽게 재활용할 수 있다. 아이스팩은 기존의 젤리형태의 보냉제가 아니라 물로 만들어졌 다. 종이 보냉패키지는 일반 스티로폼 포장과 비교해 가격이 68% 이상 비싸지만 CJ측은 다양한 제품군에 패키지를 사용하고 있다. 현대백화점은 지난해부터 100% 사탕수수 섬유로 만든 종이박스를 도입했다. 이 박스는 토양 속에서 미생물에 의해 분해되는 데 3개월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같은 식품업계와 유통업계의 친환경 활동은 앞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기업들의 착한 포장 열풍이 환경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지 지켜볼 일이다.
오늘날 우리가 무심코 쓰고 있는 외래어 중에는 도무지 그 어원을 유추하기 힘든 것들이 많다. 그중에는 일본인들의 잘못된 발음 때문에 이상하게 변해버린 경우도 적지 않다. 일제강점기 순국열사들의 충정을 기리는 3월을 맞이해, 이런 문제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와이’는 ‘화이트’였다 직장인이라면 ‘와이셔츠’라는 단어는 다 압니다. 남성 정장 에서는 뺄 수 없는 옷이니까요. 그런데 이렇게 다 아는 ‘와이 셔츠’에서 ‘와이’가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면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은 거의 없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 대문자 ‘와이(Y)’를 떠올리지요. 그리고는 목부터 가슴으로 내려오는 선이 영어 Y자와 비슷해서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고 대답하지요. 이 추정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틀린 거예요. ‘와이’의 어원은 영어 ‘화이트(white)’니까요. 언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지 만, 오래전부터 서양인들은 양복 안에 화이트셔츠를 입고 거기에 넥타이를 맸어요. 이들이 동양에 들어올 때도 그랬지요. 우리보다 서양인을 먼저 경험한 일본 사람들은 이 셔츠를 ‘와이셔츠’라고 불렀어요. 그들이 이렇게 부른 이유는 ‘화이트’ 라는 발음이 그들에게는 너무 어려웠기 때문이지요.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일본어에는 모음이 다섯 개밖에 되지 않아서 영어 단어를 정확히 발음하기 어려워요. 그래서 ‘화이트’ 를 ‘와이’라고 발음한 것이지요. 그리고 이것이 한국에 그대로 들어왔고, 우리는 영문도 모른 채 ‘와이셔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지요. ‘머신’에서 ‘미싱’으로, ‘러닝’에서 ‘난닝구’로 ‘와이셔츠’ 하니 ‘러닝셔츠’도 생각나네요. ‘러닝셔츠(running shirts)’는 ‘운동 경기를 할 때 선수들이 입는 소매 없는 셔츠 또는 속옷’을 말하지요. 그런데 이중에서 운동선수의 소매 없는 셔츠는 이해가 되지만 속옷은 잘 이해되지 않아요. 왜냐하면 속옷은 러닝, 즉 달리기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니까요. 또 한 가지 이해가 되지 않는 건 ‘러닝’을 ‘난닝구’라고 하는 거예요.이 또한 일본 사람들의 잘못된 발음 때문이에요. 이처럼 일본 사람들의 잘못된 발음을 그대로 따라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아요. ‘미싱’도 그중 하나지요. 50, 60대 이상이면 ‘미싱’, ‘부라더 미싱’이라는 단어를 다 아실 거예요. 요즈음은 거의 사용하지 않지만, 수십 년 전만 해도 웬만큼 사는 집이면 이 ‘미싱’을 한 대씩은 꼭 가지고 있었지요. 우리의 어머니들은 이 기계로 바지 길이도 줄이고 해진 곳을 수선하기도 했지요. 이 단어의 정확한 영어표현은 ‘소잉 머신(sewing machine)’이에요.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바느질 기계’지요. 일본 사람들은 여기서 ‘소잉’을 빼고 ‘머신’을 ‘미싱’이라고 발음했어요. ‘브라시에르’가 ‘브라자’가 되기까지 우리가 흔히 ‘브라자’라고 하는 여성 속옷도 일본식 발음이에요. 이 단어의 어원은 프랑스어 ‘브라시에르(brassière)’인데, 13세기에 생긴 이 단어는 본래 ‘몸에 착 달라붙는 여성용 내의’를 가리키다가, 19세기 중반에 ‘고운 천으로 만든 긴 소매가 달린 짧은 유아용 옷’을 가리켰어요. 이 단어가 오늘날과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910년대 초반이지요. 당시 미국 사교계 한 여성은 새로 구입한 옷을 입고 연회장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이 옷을 입으면 가슴이 너무 훤히 비친다는 것이었 어요. 여러 가지로 고민하던 그녀는 궁여지책으로 손수건 두 장을 묶어서 가슴을 가렸어요. 그녀의 걱정과는 달리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이 그녀의 기발한 착상에 큰 관심을 보였어요. 이런 관심에 영감을 얻은 이 여성은 1914년 미국 특허 청에 특허를 냈지만 장사 수완이 별로 없어서인지 큰돈을 벌지 못했고, 얼마 후 그 특허를 한 코르셋 회사에 헐값으로 팔아버렸어요. 한편, 한국 여성들은 1930년대에 양장을 입으면서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시작했어요. 이 브래지어가 대중화된 것은 1950년대 ‘비너스’, ‘비비안’ 등 속옷 상표가 등장하면서부터였지요. 그때부터 ‘브래지어’는 일본어식 ‘브라자’로 불리기 시작한 것이에요. 일본어라고 해서 다 배척할 필요는 없지만 그 단어가 잘못된 것이라면 고쳐서 부르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