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계숙 교수는 ‘나중’이라는 단어를 말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주어진 상황,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것에 최선을 다할 뿐이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며, 중식당 ‘계향각’에서 요리를 하고, 방송 촬영까지 해내고 있는 신 교수의 음식과 인생 이야기를 들어본다. ‘소통’ 잘하는 교수가 되기 위해 대학에서 23년간 학생들을 지도해온 신계숙 교수는 중국 문화 및 요리, 언어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중국 전문가다. 학생들과 소통을 잘하는 교수로 통하는 그는 학생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려고 집착하지 않는 것이 소통의 비결이라고 했다. “수업을 가르친다는 느낌보다는 학생들의 생각을 읽자는 마음가짐을 항상 가지고 있어요. 어떻게 보면 약간 방임적인 스타일이라고도 할 수 있죠.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고, 필요로 하는것을 읽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래서 저는 조리 실습 메뉴를 정할 때도 학생들이 수업이 끝난 후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꼭 고기가 들어간 음식으로 선정해요. 예를 들면 탕수육, 깐풍기 같은 것들이죠.” 조리 실습 수업이 끝나면 뒷정리에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신계숙 교수는 설거지하는 학생들에게 본인이 만든 음식을 선물한다. 고생하는 학생들에게 뭔가 해주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고, 학생들도 고마워하면서 신나게 먹어서 서로가 행복해지는 것 같다고 했다. 감사함 그리고 책임감 신계숙 교수를 말할 때 EBS ‘맛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빼 놓을 수 없다. 2020년 시작해 오토바이를 타고 떠난 미식기행을 소개하는 이 프로그램은 올해 시즌3 방송을 앞두고 있다. 그는 촬영을 진행하며 ‘세상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많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스스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부하는 편인데, 전국을 다니다보니 더 대단한 사람들이 많아 놀랐다고. “2020년 설악산 촬영 때 있었던 일이에요. 홍게딱지장과 날치알, 참기름의 조화가 찰떡궁합인 게딱지 볶음밥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한 남자분이 “계숙이 동생~!” 하면서 오시더라구요. 저도 붙임성 좋다는 얘기를 듣는 편인데 계속 알던 사이처럼 너무 살갑게 다가오셔서 놀랍기도 하면서 재미있었어요. 알고 보니 제가 동생도 아닌데 계속 본인을 오빠라고 칭하셨지요.(웃음) 서로의 성격이 통하는 면이 있어 금세 친해졌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어요.” 작년 구례에서 만났던 할머니도 잊을 수 없다. 노점에서 채소를 파는 분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남편을 떠나보낸 지 보름밖에 안 된 시점이었다. 남편이 생전에 트로트 경연 프로그램의 팬이었는데, 돌아가시기 전 경연에 나왔던 노래들을 녹음해 할머니에게 선물로 남겨 두었다고. 그 노래를 들으며 힘든 시간을 견디고 계신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신 교수의 마음도 먹먹해졌다. 할머니와 같이 노래하며 서로 마음을 나누었던 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에 남았다. 맛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촬영하며 신 교수 자신이 크게 변한 건 없다고 했다. 다만, 본인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이 너무 달라졌다고. 전국 방방곡곡 다니면서 즐겁게 보고 먹고 즐긴 것 밖에 없는데 시청자들이 희망과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환영해주니 감사할 따름이지만, 타인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생각에 어깨가 무거워진다고 했다. “제가 운영하고 있는 중식당 ‘계향각’에 한 여자 손님이 오셨는데 유방암 완치 판정을 받으셨다고 저에게 축하를 해달라고 하시더라구요. 처음 뵙는 인연이었지만 방송을 통해 저를 보시고 ‘신계숙이라면 내게 축하의 말을 꼭 해줄 것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오셨다고 하셨죠. 또 기억에 남는 손님은 항암 치료를 앞두고 있는 부부였어요. 많이 두려운 상황이지만 저를 만나면 용기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씀하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제가 더 좋은 모습을 보여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1호 창업 교수가 된 이유 신 교수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시간을 쪼개어 중식당 ‘계향각’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사립학교 교원은 겸직이 금지되어 있어요. 그런데 학생들에게는 창업을 적극적으로 권장해요. 그런데 교수는 이런 학생들을 가르쳐야 되잖아요. 교수는 창업을 못하고 학생들은 창업하고 어떻게 보면 앞뒤가 안 맞는 상황이죠.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으면 학생들에게 생생한 현장 지식을 전달할 수가 없어요. 교수가 창업 관련해 많은 현장 지식이 있으면 당연히 학생들에게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하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지요.” 그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학교 관계자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학교나 연구실에만 있으면 발전이 없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이어 더해, 창업을 준비하는 연구소를 열어 5년 동안 관계자들과 메뉴를 정비하고 검증했다. 이러한 노력은 결실을 맺어 학교 규정을 바꾸었고, 배화여대 제1호 창업 교수가 되기에 이르렀다. 하고 싶은 것 그 날 하기 밝고 유쾌한 신계숙 교수에게 살아오면서 가장 어려운 시기를 물으니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특별한 시기가 있는 게 아니라 사실 매 순간 어렵습니다. 하지만 내가 힘들다고, 기분이 안 좋다고 인상 쓰고 있으면 누가 날 가까이 하겠어요? 제가 항상 웃고 다니고 있으니 저 사람은 정말 즐거워서 저러는 것이라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그건 아닙니다. 저도 속으로는 힘들고 어렵지만 의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즐겁다고 생각하며 노력하는 거예요. 누구에게나 인생은 고해입니다. 이것은 누구도 예외가 없어요. 하지만 고해라고 생각하면 더 인생이 고해가 되는 것이고, 천국이라고 생각하면 천국이 되는 거죠.”신 교수의 인생 신조는 ‘하고 싶은 것 그 날 하기’다. ‘나중’이라는 생각이나 말을 절대로 하지 않는다. 오늘, 매 순간에 충실하고 인생을 알차게 사는 것은 그의 오래된 습관이다.신계숙 교수는 항상 시간을 효율적으로 분배하려고 노력한다. 매일 밤 다음 날 할 일을 분 단위로 미리 생각해둔다. 그는 학교에서 오전 강의 후 점심시간에 오토바이를 타고 5km 거리에 있는 계향각으로 이동해 요리를 하고 손님들을 만난다. 그리고 오후에 다시 오토바이를 타고 학교에 돌아와 강의하고 저녁에 다시 계향각에서 음식을 만들고 있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동파육처럼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는 끓이면서 다른 일을 짬짬이 하기도 한다고. 어린 시절부터 오토바이는 타고 싶었지만 꿈을 향해 달려오느라 바빠서 57세 때 시작했다. 남들과 다른 나이에 오토바이를 시작한 신 교수는 처음에는 무서웠지만 꾸준히 하다 보니 실력이 늘었다며, 오토바이를 타고는 싶지만 겁이 나서 못 타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시도해 보라고 말했다. “남은 인생의 목표요? 저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이미 목표를 다 이루어서 더 이상 바라는 건 없네요.”
수양과 정조의 상징으로 옷자락에 고이 숨겼던 장도(粧刀). 이 지나간 유산에 낙죽으로 숨을 불어넣는 이가 있다. 한 명의 선비이자 장인, 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낙죽장도장 한상봉. _국가무형문화재 제60호 낙죽장도장 한상봉선비가 만드는 유일한 공예품낙죽장도(烙竹莊刀)는 대나무로 만든 칼집이나 칼자루에 불에 달군 인두로 글을 새겨 장식한 칼이다. 삼국시대 비수(匕首)에서 유래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역사 깊은 우리 문화재 중 하나다. 칼이라 하면 응당 쇠를 다루는 대장장이를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낙죽장도만큼은 선비에 의해 전승된 문화다. 구름이나 매화 등의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시나 글귀를 옮겨 담았기에 한자를 아는 솜씨 좋은 문인들에 의해 제작되었다. 이를 계승한 한상봉 선생은 낙죽장도가 호신용 장신구이기도 하지만 서책으로서의 의미가 강한 애장품이라고 말한다. “불에 달군 인두로 문장을 지져서 휴대하였기에 칼이지만 하나의 책이라도 볼 수 있습니다. 많게는 수천 자의 활자를 수놓으며 문장이 가진 뜻을 마음에 새겼을 거라 생각합니다. 친한 벗에게도 선물하였다고 하니 분명 학문적 교류의 수단이 되기도 했다고 봅니다.”이후 일제강점기 열사들에 의해 항일투쟁의 의지가 새겨진 증표로 사용되던 낙죽장도는 한 집안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_낙죽장도/30~33cm/2018 대대로 이어진 문화유산낙죽장도의 계보는 한상봉 선생의 아버지이자 국가무형문화재 고(故) 한병문 선생의 이야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부친인 한병문 선생은 당시 서당을 운영하던 재종조부 고(故) 한기동 문하에서 글과 함께 낙죽장도의 기술을 전수받았다. 그러다 낙죽장도를 찾는 사람이 뜸해지자 부친은 농사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고 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스승의 작품이 일본 박물관에서 발견됐다는 것을 알게 됐고, 수소문 끝에 결국 자신이 마지막 전수자임을 깨닫고 다시 작품 활동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뒤를 한상봉 선생이 이어가고 있다. “전승 공예는 근대산업의 발달로 뒷전으로 밀렸습니다. 그렇기에 전통 공예가는 생활이 매우 어렵습니다. 때문에 가장이 한다면 가족 모두가 반대합니다. 헌데 가업이면 생각이 다릅니다. 어렸을 때부터 함께 하고 눈여겨봤기에 전대 보유자였던 아버지가 작업을 못하게 되자 무작정 전수관에 내려와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_고(故) 한병문 선생이 제작한 사인검/1998 인고의 시간을 버텨낸 대나무처럼대나무는 하나의 장도가 되기까지 자그마치 10여 년의 세월이 걸린다. 대나무를 12월 초부터 입춘까지 한정된 시기에만 채취, 건조로만 7~10년 정도를 보낸다. 이후에 흠결 없는 7마디 이상의 대나무를 절단하고 속을 훑어낸 후 칼집에 낙죽하기까지 또 2~3개월의 시간을 들인다. 낙죽(烙竹)이란 말 그대로 대나무에 글을 놓는다는 뜻이다. 인두의 열기를 이용, 온몸을 사용해 글과 그림을 새겨 나간다. 이 과정을 수백 수천 번 되풀이한 후 소다리뼈, 소뿔, 자개 등으로 장식하여 낙죽장도를 완성해나간다. 전 공정이 다 수작업이고 곡성에서 나는 대나무만 사용하기에 시일이 많이 걸린다. 이렇듯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것은 참으로 지리하고 어려운 일이다. 지극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가지고 혼신의 힘을 다해야 가능하다.“저도 가끔씩 회의감이 들 때도 있지만,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소명의식과 작품을 만들 때마다 느껴지는 성취감으로 버티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길을 가는 것에 대해 후회하지 않습니다.” 13세 때부터 어깨 너머로 배운 전통 공예의 길이 벌써 수십 년, 그 중 가장 아끼는 작품은 단연 ‘경인사인검’이다. 호랑이해, 호랑이달, 호랑이날, 호랑이시에 만드는 칼을 ‘사인검’이라 한다. 그 중 백호의 해인 경인년에 제작하는 경인사인검은 60년에 딱 하루만 만들 수 있다. “제가 2010년 이 검을 완성한 이후로 많은 사람이 갖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이 아닌 국민 모두를 지켜주는 행운의 상징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되도록 여러분이 경인사인검을 볼 수 있도록 전수관에 전시하고 있습니다.” _경인사인검/1m10cm/2010 한국인만 모르는 한국의 보물 선대에 이어 기술과 함께 전수관을 운영 중인 한상봉 선생, 그는 자신의 아들을 수제자로 두며 다음 세대를 도모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고등학교 방과 후 과정으로 이순신장군 가검(假劍) 만들기를 지도, 전통 예술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현실에 맞게 현대화, 산업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전통기술을 접목한 식도를 제작하려고 연구했고 현재 시제품까지 개발했습니다.” 일반인들도 부담 없이 구입할 수 있도록 현대적 의미의 낙죽장도를 구상중인 그는 그러면서도 선조들의 정신은 온전히 계승되길 바란다.“전 세계적으로 칼에 글귀를 새겨 넣는 일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아랍인들이 칼에 코란 구절을 넣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낙죽장도처럼 수천 자의 문학작품을 새겨 넣는 일은 전무합니다. 낙죽장도는 우리나라 고유의 독창적인 문화유산입니다. 비록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죽장도의 존재조차 모르지만 인격 완성을 위해 학문에 정진하던 선비정신이 담긴 이 검을 널리 알릴 필요가 있습니다. 제가 가진 역량을 발휘해서 후대까지 알리는 것이 주어진 과제라 생각합니다.” 낙죽장도를 세계 유일의 문(文)과 무(武)가 결합된 예술이라 말하는 그에게서 마치 조선에서 타임슬립한 선비의 자존심과 지조까지 엿볼 수 있었다. 장인과 선비의 면모를 두루 갖춘 그를 통해 우리의 소중한 전통은 계속될 것이다. _낙죽장도의 종류 사진 제공_한상봉 낙죽장도장
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식량 문제는 사람의 생존과 직결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많이 간과되었다. 다른 나라의 기후 변화는 우리 식탁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5월 국제 퍼머컬쳐의 날을 맞아 식량과 토양 문제를 생각해본다. 밥은 숨 쉬는 대지에서 출발한다 “밥은 숨 쉬는 대지와 강물의 핏줄, 태양의 자비와 바람의 숨결로 빚은 모든 생명의 선물입니다. 이 밥으로 땅과 물이 나의 옛 몸이요불과 바람이 내 본체임을 알겠습니다. 이 밥으로 우주와 한 몸이 됩니다. 그리하여 공양입니다. 온몸 온 마음으로 온 생명을 섬기겠습니다.” 수경 스님이 지은 공양송입니다. 사찰에서 밥을 먹는 것을 ‘공양’이라 하고 숟가락을 들기 전에 감사한 마음을 읊는 걸 ‘공양송’이라 합니다. 내 앞에 놓인 밥 한 그릇은 숨 쉬는 대지에서 시작합니다. 흙에 뿌려진 씨앗 한 알이 적절한 물과 햇볕과 바람의 손길을 만나 빚어낸 생명의 선물이 밥이고, 바로 그 밥을 먹는 것은 곧 우주와 한 몸이 되는 일이라 공양송은 일러줍니다. 공양송은 음식이 내 식탁에 오르기까지 여정을 되새겨주니 삼라만상의 조력을 새삼스레 깨닫게 됩니다. 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이 고마움을 얼마나 절절히 느끼며 먹고 있는지 생각하니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화끈거립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 흙을 밟을 일이라고는 손가락에 꼽을 정도이다 보니 흙의 존재를 거의 잊고 지냅니다. 도시화율이 90%가 넘는 대한민국에 사는 대다수 사람의 처지가 이와 크게 다를 것 같지 않아요. 더구나 상품 사슬로 세계가 엮이면서 먹을거리의 많은 부분을 배로, 비행기로 실어 나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식탁 위에 차려진 온갖 먹을거리를 대주는 곳은 흙이 아니라 마트라는 착각 속에 살게 됩니다. 어떤 먹을거리든 흙과 물과 태양과 바람의 손길 없이 생겨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브랜드가 붙은 공산품으로 인식할 따름입니다. 사슬처럼 엮인 전 세계 _‘하부브’라 불리는 브라질의 모래폭풍 작년 10월 브라질 상파울루 일대에 ‘하부브’라 불리는 모래폭풍이 닥쳤습니다. 길게는 7시간 가까이 계속된 모래폭풍으로 인터넷이 끊기고 정전사태도 불러왔어요. 세계 최대 열대우림인 아마존이 국토의 59%를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이 백여 년만의 가뭄을 겪었거든요. 가뭄의 원인이 한 가지일 수 없지만 아마존 숲을 개발했던 게 큰 원인이라는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고 있어요. 아마존은 하늘을 흐르는 강이라 불릴 정도로 아메리카 전 대륙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주요한 곳이거든요. 지평선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최대 2킬로미터에 이르는 모래폭풍이 도시를 덮치며 낮을 밤으로 바꾸었습니다. 전체 전력의 70%가량을 수력발전에 의존하고 있는 브라질이 가뭄으로 발전까지 거의 멈추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브라질 가뭄은 브라질에 한정된 재난이 아닙니다. 기후로 인해 가장 큰 피해는 예측할 수 없는 이런 기후 시스템이 결국 농사를 망친다는 데 있습니다. 작년 대 가뭄으로 브라질 농업생산량이 20%가량 줄자 세계 식량 가격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브라질은 세계 대두 생산량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작년 가뭄으로 대두 가격이 크게 올랐어요. 이런 상황에다 전 세계 해바라기씨유 최대 수출 국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으로 수출에 차질을 빚으면서 해바라기씨유 부족분을 채우느라 팜유 수출이 늘어나자 세계 최대 팜유 수출 국가인 인도네시아에서 팜유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생존에 식량은 필수인데 기후로 인해 식량 생산량은 해마다 널뛰기를 합니다. 식량이 단순한 식량이 아닌 식량 안보, 식량 주권이라는 말로 불리게 된 것도 이런 맥락 때문입니다. 식량자급률 45%대인 우리나라는 어떻게 먹을거리는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한 나라의 위기가 그 나라의 위기로 끝나던 시대가 더 이상 아닙니다. 오늘날 세계 모든 나라가 온갖 상품 사슬로 엮이면서 브라질에서 나비 날갯짓이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몰고 온다는 말을 실감하는 시대입니다. 브라질의 가뭄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전 세계 식량 가격, 에너지 가격을 불안하게 만들고 있으니까요. 토양침식도 생산량에 큰 영향 _(좌)한 나라의 가뭄은 전 세계 식탁에 영향을 미친다,(우)경작용 땅이 늘어날수록 가속화되는 토양 침식 브라질의 모래폭풍이 충격적이었던 건 당장 농업생산량이 줄어든 것뿐만 아니라 토양침식으로 향후 식량 생산에도 큰 타격이 될 거라는 사실 때문입니다. 앞서 공양송에도 나와 있듯이 흙은 밥의 출발입니다. 영국 랭커스터 대학교 연구진이 중국 장안 대학교, 벨기에 루뱅 가톨릭 대학교 연구진과 공동으로 6개 대륙 38개국의 255개 지역의 토양침식 데이터를 수집해서 국제 학술지에 발표했는데요. 관습적인 방식으로 경작되는 토양의 90% 이상이 두께가 얇아지고 있고 16%는 수명이 100년 미만이라는 사실이 밝혀졌어요. 농사짓는 땅이 늘어날수록 토양침식은 가속화됩니다. 만약 한해살이, 여러해살이 작물을 고루 심는다면 제각기 다른 뿌리로 흙을 잡고 있느라 토양침식을 막을 수 있습니다. 작물의 뿌리가 내리는 비를 빨아들이면서 땅을 기름지게 합니다. 흙을 기름지게 하는 중요한 또 하나의 요인은 땅속 미생물인데요. 또 하나의 우주라 표현할 정도로 땅속 미생물의 수를 인류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고 해요. 농약과 살충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땅속 미생물을 사멸시킵니다. 농업생산량 감소 원인을 비단 기후 시스템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이유입니다. 퍼머컬쳐, 지속 가능한 삶의 문화 _생태철학을 바탕으로 한 퍼머컬쳐 우리의 생명을 유지시켜 주는 먹을거리를 지속 가능하게 얻으려면 자연과 인간이 본연의 생명력을 복원해가면서 함께 살아갈 때 가능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이렇게 흙과 물과 내가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생태 철학을 바탕으로 생겨난 것이 퍼머컬쳐입니다. 영원하다는 의미의 ‘Permanent’와 농업을 뜻하는 ‘Agriculture’, 두 낱말을 합해 만든 신조어인데요, 이 말에는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지속 가능한 농사를 짓고 나아가 자립하는 삶을 사는 문화가 담겨있어요. 그저 씨를 뿌리고 더 많이 수확하려는데 초점이 맞춰진 농사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함께 농사지을 공간을 디자인하고 식물, 동물 그리고 무생물까지 모든 생태계와 더불어 지속 가능한 삶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농사를 의미합니다. 5월 첫째 주 일요일은 ‘국제 퍼머컬처의 날’입니다. 가뜩이나 기후로 농업생산량은 줄어들고 있는데 2050년까지 세계 인구는 10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측합니다. 당장 우리의 식량자급률을 어떻게 끌어올릴 수 있을까요? 도시 텃밭을 하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건 반가운 일입니다. 텃밭에서 푸성귀를 수확하는 것도 유의미한 일이지만 한 뙈기 텃밭이라도 흙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아요. 이윤을 가져다주는 교환가치로 땅을 보던 우리의 인식에 전환이 필요할 듯합니다. 땅은 수많은 목숨을 낳고 기르는 생명의 어머니라는 인식 말입니다. ‘국제 퍼머컬처의 날’이 있는 5월에 흙의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떨까요?
광고나 브랜드 이미지에 휘둘리지 않고 본인의 가치 판단을 토대로 제품을 구매하는 ‘가치소비’. 최근 가치소비를 하는 이들이 주목하는 제품 중 하나가 비건상품이다. 비건상품이 무엇이고 어떻게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그 비밀을 파헤쳐본다. 엄격한 검증을 통해 생산되는 비건인증상품 _비건인증마크 우리가 먹고 바르는 식품·의약품·화장품을 개발하기 위해선 많은 동물들의 희생이 뒤따른다는 것을 아는가. 실제로 최근 5년간 식품·의약품·화장품 개발 및 안전관리 등을 위한 실험에는 햄스터, 개, 토끼 등 약 1,200만 마리의 동물이 사용됐으며, 그 수는 계속 증가하는 추세라고 한다. 이에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비건상품이다. 비건상품은 동물 실험을 진행하지 않고 식물성 원료를 사용하는 제품을 말하는 것으로, 가치소비가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 잡으면서 현재 유행을 선도하고 있다. 보통 비건상품으로 등록한 제품들은 비건인증을 받는다. 인증을 받기 위해선 우선 제조가공 또는 조리과정에서 동물성 원재료를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 직간접적인 모든 경우를 포함해서 말이다. 또 제품에 대한 실험이나 연구에 동물을 직간접적으로 이용하지 않아야 한다. 동물실험을 위한 원재료 사용이나 타사에 의뢰한 형태 등의 위탁실험도 금지한다. 그 밖에도 제품생상 과정에 교차오염이 없어야 한다. 즉, 비건, 베지테리언, 논베지테리언 제품의 생산시설 간 교차오염일 발생하지 않아야 한다. 이러한 철저한 검증을 거쳐 비건인증을 받은 제품이 소비자들에게 선택을 받게 된다. 화장품·패션 분야까지 확산된 채식주의 _(좌)멜릭서 립 버터, (우)프록시엘 토드백 그렇다면 비건상품을 내놓는 대표적인 기업으로는 어떤 곳이 있을까. 멜릭서는 2018년 국내 최초의 비건 스킨케어 브랜드로 비건 립 버터, 비건 핸드워시, 비건 크림 등 폭넓은 카테고리에서 비건 화장품을 선보이고 있다. 이중 립밤 제품은 식물성 재료인 아가베와 시어버터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이런 멜릭서는 최근 립 버터 부문에선 세계 최대의 이커머스 플랫폼 아마존에서 1위를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화장품에 이어 패션기업도 있다. 비건패션기업은 가죽, 모피, 울과 같은 동물성 소재를 사용하지 않는다. 비건패션 브랜드인 낫아워스와 프록시엘, 제이더블유페이는 선인장 가죽, 닥나무 껍질, 재활용 플라스틱 등 동물성 소재를 배제하고 친환경 식물성 원료를 사용한다. 특히 ‘동물의 희생 없이 좋은 가방을 만든다’는 구호를 내건 브랜드 ‘프록시엘’의 닥나무 껍질과 폴리우레탄으로 만든 비건 토트백은 인기를 얻고 있다. 기업은 물론 MZ세대의 사랑을 받는 비건상품 화장품과 패션에도 채식주의가 확산하면서 기업들은 비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장보기 앱 마켓컬리는 지난해 11월 동물을 보호하는 비건 상품 등 윤리적인 소비를 돕는 상품 40여 개를 모아 ‘착한 소비’ 월간 테마관을 운영했다. 마켓컬리는 입점한 다양한 비건 뷰티 제품들을 소개해 식품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비건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비건상품은 기업에 이어 소비자들에게, 특히 MZ세대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이는 지속 가능한 발전과 MZ세대의 가치 소비와 맞물려 나타난 현상이다. 최근에는 선물하기 기능을 통해 비건상품을 구매하는 MZ세대가 늘고 있는데 네이버쇼핑에 따르면 올해 1분기 ‘선물하기’ 기능을 통해 거래된 비건 상품 거래액은 지난해 동기와 비교해 약 10배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MZ세대 소비자들이 친구들에게 비건상품을 체험할 계기를 제공함으로써 체험에 만족한 사람들이 재구매를 하거나 지인들에게도 선물하는 등 연쇄작용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처럼 화장품과 패션의 비건주의는 한동안 계속될 예정이다. 동물을 보호하는 비건상품이 어떻게 소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을지 앞으로도 두고 볼 일이다.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흔하게 사용되는 말이지만 그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단어의 원래 뜻을 잘 알고 사용해야 정확한 소통이 되는 건 당연한 일. 이번 호에서는 자주 사용하지만 결코 쉽게 사용할 수 없는 말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학문의 전당이 된 아카데메이아 우리는 ‘아카데미’라는 말을 참 많이 써요. 동네 작은 미술학원도 아카데미라고 하고, 상가 음악학원도 아카데미라고 하니 말이지요. 하지만 최초의 아카데미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 이 문을 들어서지 마라”고 할 정도 높은 수준의 학문의 전당이었어요.아카데미라는 말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카데무스(Akademus)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유래한 말이에요. 그리스 사람들은 아카데무스가 살던 동산을 아카데메이아(akademeia)라고 불렀고, 이 단어가 라틴어로 들어가 아카데미아(akademia)가 되었고, 15세기에 영어로 들어가 오늘날처럼 아카데미(academy)가 된 것이지요.그렇다면 아카데무스가 살던 동산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을까요? <플루타르크 영웅전>에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것을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아요. 테세우스와 페리토오스는 스파르타 신전에서 춤을 추는 헬레네를 보고 반해 그녀를 납치해요. 사람들이 헬레네를 구하러 추격해 오자 이 두 사람은 그녀를 데리고 테세우스의 고향이 있는 펠로폰네소스로 도망쳐요. 이렇게 추격자를 따돌린 두 사람은 누가 헬레네와 결혼할지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뽑기를 하지요. 여기에서 이긴 테세우스는 헬레네를 차지하지만 50살인 테세우스에게 고작 12살인 헬레네는 너무 어리다고 보고 하인들이 헬레네를 잘 보살피게 해요. 그리고 그 어느 누구도 헬레네가 있는 곳을 말하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지요. 얼마 후 쌍둥이 형제인 카스토르와 폴리데우케스가 누이인 헬레네를 찾으러 아테네로 와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를 물었어요. 함구령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헬레네가 어디 있는지 모른다고 대답하지요. 이에 격분한 두 사람은 군대를 이끌고 아테네를 공격하겠다고 협박을 해요. 이때 아카데무스가 나타나 그녀가 있는 곳을 말해줘요. 아카데무스 덕분에 쌍둥이 형제는 누이를 찾을 수 있었고 평생 그 은혜를 결코 있지 않았다고 해요. 스파르타가 아테네를 침공할 때도 아카데무스가 사는 동산인 아카데메이아는 건드리지 않을 정도로 말이지요. 시간이 흘러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이 아카데메이아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철학, 천문학, 수학, 생물학, 정치학, 윤리학 등 다양한 주제를 가르쳤어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이 학문의 전당은 529년 동로마제국 유스티니아누스 대제가 폐교시킬 때까지 이어졌지요. 하지만 이것은 중세 이후 유럽에서 부활해 오늘날 아카데미가 되었어요. _아카데미상 트로피 진정한 의미의 아카데미 아카데미의 역사에서 뺄 수 없는 것은 1635년에 프랑스 리슐리으(Richelieu) 추기경이 설립한 아카데미 프랑세즈(Académie française)에요. 1635년 1월 29일 루이 13세가 내린 칙허장은 이 기관의 목적을 “우리 언어에 확실한 규정을 부여하고 그것을 순수하게, 우아하게, 예술과 학문을 다룰 수 있게 만드는 것”이라고 밝히지요. 이 기관의 노력 덕분에 프랑스어는 오늘날처럼 정교하고 우아한 언어로 발전할 수 있었어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이 아카데미 프랑세즈는 총 40명의 회원으로 구성되어 있어요. 이들은 시인, 소설가, 극작가, 철학자, 역사가, 과학자 등 매우 다양하지요. 한 자리가 비면 회원들이 상의하여 새로운 신입회원을 선출하는데, 그때는 국적이나 자격 등은 따지지 않고 프랑스어를 빛낸 공적이 있느냐 없느냐만 본다고 해요.이런 기원과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아카데미는 결코 함부로 쓸 수 있는 말이 아니에요. 조선시대 집현전이나 요즈음의 대한민국학술원 정도는 되어야 진정한 아카데미라고 할 수 있지요. 앞서 말했듯이 우리나라에서는 이 말을 너무 쉽게 사용해요.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상업적인 말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저는 이것을 ‘언어적 허영’이라고 불러요. 이런 언어적 허영은 가능한 삼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Tip 아카데미상은 학술상? 오스카(Oscar)상으로도 불리는 아카데미상은 매년 세계인의 주목을 받고 있어요. 영화상의 이름이 왜 아카데미상이 된 걸까요? 이는 주최 기관인 미국 영화단체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Academy of Motion Picture Arts and Sciences)’의 이름과 관련이 있어요. 1927년 영화사 사장인 골드윈 메이어는 파티를 개최해 영화협회의 필요성과 영화상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고, 참석자들은 그해 여름 아카데미를 설립했지요. 2년 뒤인 1929년 5월 16일 제1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이 열렸어요. 그 시작은 미약했지만 지금은 각국에서 생중계를 진행할 정도로 권위 있는 별들의 잔치가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