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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흘린 땀,
내일의 영광으로!

양학선 체조선수사진출처: 넷플릭스, 대한체육회 대한민국 최초 올림픽 체조 금메달리스트이자, 최근 화제인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에 출연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 양학선 선수.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며 체조선수로서 새로운 목표를 이뤄나가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완벽한 피지컬을 찾아서최근 양학선의 근황을 논한다면 <피지컬: 100>을 빼놓을 수 없다. 국내는 물론 전 세계적으로 인기 있는 프로그램인 만큼, 양학선을 응원하는 해외팬들도 많이 생겨났다고 한다. 그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된 것은 아내 덕분이라고.“항저우아시안게임 선발전이 겹쳤던 터라 처음 섭외 요청에는 거절했죠. 아쉽게도 실수를 하는 바람에 선발되지 못한 상황에서 다시 <피지컬:100> 측에서 연락이 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넷플릭스에서 하는 콘텐츠인데 나오면 좋지 않겠어?’라고 말해 출연을 결심했죠. (웃음)”100명의 출연자 가운데 양학선은 자신의 존재감을 여지없이 뽐냈다. 사전 퀘스트에선 약 15분 동안 구조물에 매달리는 활약을 했고, 두 번째 퀘스트 ‘모래 나르기’에선 최약체 팀에 속했지만, 체격 조건이 좋은 상대를 이기는 통쾌한 명장면을 선사하기도 했다. 방영 내내 해프닝도 있었는데,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피지컬: 100> 주연 배우를 ‘양학선’으로 표기하는 바람에 우승자가 아니냐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주변에서 우승했느냐고 많이 질문을 하셨는데, 결과를 발설할 수 없어 애를 먹었죠. (웃음)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을 만날 수 있어 재밌었고, 세트장 스케일이 어마어마했던 게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완벽한 피지컬에 대한 물음과 이에 대한 답을 찾는다는 취지로 제작된 <피지컬: 100>. 양학선 선수가 생각하는 ‘완벽한 피지컬’이란 무엇일까.“완벽한 피지컬을 위해 순발력, 파워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체급’이라고 생각해요. 체급에 따라 순발력이나 파워를 낼 수 있는 범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양학선으로 세계를 제패하다2012년 런던올림픽에서 ‘대한민국 최초 체조 금메달리스트’라는 타이틀을 보유하며, 현재도 현역 선수로 활동 중인 양학선. 그의 체조 인생은 10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부모님께서 맞벌이를 하셨어요. 방과 후 집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다 보니 외로웠죠. 그렇게 친형을 따라 체조를 하게 되었는데, 체조장에 나가는 자체로 재미를 느꼈습니다.”당시 체조를 시작할 때만 하더라도 양학선은 지도자로부터 유연성이 부족해 체조선수를 하기 힘들 것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학선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소년체전에서 평행봉 동메달을, 이듬해 링 금메달을 획득하며 유망 체조선수로서의 가능성을 열어갔다. 이후 양학선이 ‘도마’로 전향하게 된 배경에는 광주체중 진학 후 오상봉 감독의 권유 덕분이었다.“어쩌면 당연한 이치였어요. 유연성은 부족하지만, 그만큼 몸이 딱딱하다 보니 탄력이 많이 나오거든요. 그 점을 눈여겨보신 은사님께서 도마를 추천해주셨습니다.”오상봉 감독은 양학선이 국제대회에 출전 기회를 잡을 수 있도록 도와주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생 선수는 전국체전을 목표로 했는데, 오 감독의 권유로 양학선은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양학선은 첫 세계선수권대회에서 4등을 했는데, 그 경험 덕분에 자신의 이름을 건 ‘양학선’ 기술1)을 만들게 되었단다.“세계선수권대회 심판 선생님들이 모두 유럽분이셨어요. 사람이 사람을 채점하는 종목이다 보니 ‘내가 여기서 작은 실수를 하면 무조건 지겠구나’ 싶었죠. 그래서 기존 여2(여홍철2) 기술에 한 바퀴 더 회전하는 ‘양학선’ 기술을 구사하게 되었습니다.”양학선은 ‘양학선’ 기술로 광저우아시안게임(2010)을 시작으로 도쿄세계선수권대회(2011), 런던올림픽(2012)까지 금메달을 석권하며 그랜드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난도 7.4라는 어려운 이 기술은 현재까지도 양학선만이 구사할 수 있는 기술로 알려져 있다.1) 핸드스프링(손 짚고 앞구르기) 이후 공중에서 1,080도(3바퀴)를 회전하여 정면을 바라보며 착지하는 기술 시련에도 꺾이지 않은 마음런던올림픽 이후 ‘양학선’ 기술을 뛰어넘는 난도 높은 기술을 준비하며 새로운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던 양학선에게 크고 작은 부상이 발생했다. 양학선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죠’라며 당시를 담담하게 회상했다. 양학선은 2014년 처음 햄스트링이 파열되었다. 당시 뛰는 데는 무리가 없어 큰 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후 1년에 한 번씩 크게 부상이 찾아왔다고.2016년에는 아킬레스건을 다치면서 리우올림픽 선발전을 기권하기도 했다. 당시 몸 상태는 최고조였는데, 몸을 풀 때 기본기를 하다가 다쳤다고. 또한 9년 만의 올림픽 출전을 앞둔 2021년에는 햄스트링이 심하게 파열되었는데, 부상뿐만 아니라 도마를 향해 달려가다 도약 직전 갑자기 뛰지 못하는 트라우마까지 찾아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도쿄올림픽에 ‘조건부’로 발탁되었는데, 한 달 내에 ‘양학선’ 기술을 완벽히 수행해야 국가대표로 출전할 수 있었다.“체조 인생에서 가장 힘들게 준비했던 시절이에요. 다시 그 부담감과 트라우마를 이겨내라고 하면 은퇴했을 것 같아요. 그만큼 어렵게 도전했었는데, 주변의 많은 분이 도와주셨죠. 한 연구원 박사님께서는 쉬는 날까지 반납하시면서 옆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습니다.”인생의 목표를 주는 체조큰 시련에도 좌절하지 않고 완벽하게 기술을 수행하며 양학선은 9년 만에 올림픽에 출전하였지만, 후보 1번으로 결선진출이 좌절되는 고배를 마셨다. 부상 이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마음의 상처와 부상과 트라우마를 이겨내야 한다는 부담감에 수없이 은퇴를 고려했다. 그때 ‘주변 시선에, 성적에 눈치 보지 말고 체조를 하고 싶다면, 할 수 있을 때 즐겨라’는 아내의 말은 양학선에게 큰 힘이 되었다.양학선은 큰 꿈이 없다. 하지만 자신에게 계속해서 목표를 가져다주는 것이 ‘체조’라고 말하면서 새로운 목표를 향한 도전을 시작하고 있다. 올해 1월부터 부산시체육회 실업팀으로 소속을 옮겼는데, 양학선은 자신과 팀 색깔이 잘 맞는다고 말했다.“작년부터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니 운동이 잘 된다는 걸 깨달았어요. 현재 팀은 전국체전을 우선시하는 만큼, 국제대회 타이틀을 잠시 내려놓고 부산에서 마음을 편히 먹고 운동을 하면 다시 도전할 수 있겠다 싶었죠.”올림픽을 주기로 체조 규정이 변경되는데, 양학선 선수가 주로 구사하는 기술이 한 그룹으로 묶이면서 다른 그룹의 기술을 반드시 수행해야 하는 큰 변화를 맞이했다.“올해 제 목표는 전국체전을 포함해 국내 체조대회에 출전해 1등을 놓치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다른 그룹의 기술을 계속 선보여 완벽히 구사할 수 있게끔 할 것입니다.”체조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야 하는 종목인 만큼, 양학선은 힘들 때마다 생각하는 말이 있다. ‘오늘 흘린 땀은 내일의 영광.’ 오늘 힘들게 흘린 땀들이 쌓여 찬란한 영광을 가져다줄 것이기에 오늘도 양학선은 긍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다. 끝으로 양학선은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재능은 타고나야 한다잖아요. 따지고 보면 저는 유연성이 부족해 체조선수로 적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평행봉과 링을 거쳐 ‘도마’에서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남들과 비교하여 뒤처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자신의 분야에서 잘 맞는 부분을 찾아내면 좋겠습니다!”

스페인 땅끝마을에서 포르투갈 리스본까지

글, 사진.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과거 1,000여 년 동안 기독교인들만 걷던 순례길이었던 산티아고 순례길은 최근 종교 목적보다 일반인들의 자기 성찰을 위한 도보여행길로 더 많이 유명해졌다. 황량한 초원과 끝없는 밀밭, 아름답고 소박한 마을 등을 걸으며 많은 것을 느꼈던 29일간의 대장정을 되돌아본다. 생장 피드포르에서 산티아고까지_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대성당피레네산맥을 넘어 난생처음 스페인 땅을 밟는다. 아침 9시에 프랑스 국경마을 생장 피드포르를 출발한 지 6시간 만이다. 해발 150m에서 1,450m 정상까지 계속 오르막이다가 인제야 내리막 시작이다. 한라산 백록담에 오르는 것보다 조금 더 힘이 들었다.도중에 만난 20대 한국인 여성 둘 중 한 명이 심한 어지럼증이 있어서 함께 챙기며 오느라 한두 시간 늦어졌다. 나는 파리에서 사흘 동안 머물며 시차 적응을 하고 왔지만, 그녀는 어제 파리에 도착하고 부랴부랴 이곳으로 왔다고 하니 너무 무리한 게다. 장시간 비행에 따른 피로감과 시차는 남녀와 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을 너무 쉽게 본 거 아니냐며 나도 모르게 훈계 몇 마디 뱉어냈다. 꼰대 티를 안 내려 하면서도 전혀 그리 못하는 게 꼰대들 특성인가 보다. 스페인 첫 마을 론세스바예스에 머문 이튿날 아침 다시 혼자 길을 나섰다. 어제 피레네에서 고생한 두 여성은 하루 더 쉬었다 간다며 숙소에 남았다.산티아고는 예수 열두제자 중 첫 번째 순교자인 ‘성인 야고보’의 스페인식 이름이다. 성인(saint)을 뜻하는 라틴어 ‘산(san)’에, 남자 이름 ‘티아고(Tiago)’가 합성되었다. 산티아고 순례길은 야고보 성인의 유해가 있는 산티아고 대성당까지 가는 길을 말한다. 만남과 헤어짐 사이의 쉼표_대성당에서 90km 떨어진 땅끝마을 피니스테레과거 1,000년여 동안은 기독교인들만 걷던 순례길이었지만, 1986년 파울로 코엘료가 이 길을 걸어 자전적 에세이집 ‘순례자’를 출간한 이후부터는 종교 목적보다 일반인들의 자기 성찰을 위한 도보여행길로 더 많이 유명해졌다. 기독교 신자도 아니고 무종교인 나 또한 종교 목적과는 무관하게 이 길을 걷고 있다.순례길 3일째부터 6명이 함께 움직이는 그룹에 끼어들었다. 전날 길을 잘못 들어 두 시간 동안 고생한 뒤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함께 걸으니 훨씬 안심이 되고 마음이 편해졌다. 6명 모두 영국, 이태리 등 세계 각지에서 온 개인들이 자연스럽게 뭉친 경우다. 이곳에선 여느 그룹이나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게 일반적 분위기다. 소몰이 축제로 유명한 중세도시 팜플로냐를 뒤로하고, 페르돈고개(Alto del Perdon)에 올랐다. 누구나 마음이 관대해지는 일명 ‘용서의 언덕’이지만, 10개월 전 나를 내쫓은 직장과 나 대신 승진한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의 마음은 조금도 누그러트리지 못한 채 언덕을 내려왔다.10일째 되는 날, 일주일 동안 정들었던 일행과 헤어졌다. 오른쪽 발목에 통증이 심해져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어졌기 때문이다. 일단 나 혼자 멈춰서 쉬어야 했다. 일행 여섯은 이런저런 선물과 격려의 말들을 남겨주곤 다시 길을 떠났다. 9일동안 쉬지 않고 250km를 걸어온 나로선 그들보다 연식이 훨씬 많은 만큼 쉼표가 필요했다. 나중에 터득한 사실이지만 목 긴 등산화가 아닌 트레킹화를 신고, 스틱도 없이 장거리 도보에 나선 건 치명적인 내 불찰이었다. Santiago will be there!_세계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과 함께 걷는 산티아고 길아름답고 소박한 마을 아헤스(Ages)에서의 하루는 꿀 같은 휴식의 시간이었다. 창가 침대에 누워 지나가는 순례자들을 한없이 바라보았다. 나 혼자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과 조바심도 일었다. 영국 친구가 전날 헤어지며 남겨준 말을 떠올리자 위안이 되었다. “Mr. Lee, Santiago will be there!” 산티아고는 늘 그곳에 있으니 마음 조급하게 먹지 말고 푹 쉬었다 오라는 격려의 말이었다.숙소 할머니의 따뜻한 배려와 오후 두 시간 동안의 발목 집중 마사지 덕분에 다음 날 아침의 발목 상태는 가뿐해졌다. 다 나은 걸로 속단하지 말고 오늘 하루는 걷지 말라며 숙소 할머니가 아들 차를 내어줬다. 덕분에 22km 떨어진 부르고 스까지는 봉고차를 타고 편안하게 이동했다.망토 휘날리며 적진을 향해 말 달리는 엘 시드 장군의 멋진 기마상 앞에서 봉고차를 내렸다. 엘 시드는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 같은 존재, 11세기 이슬람 무어인들로부터 나라를 구한 스페인의 민족 영웅이다. 그의 부부 유해가 안치된 부르고스 대성당을 둘러보고, 영웅의 고향에서 구비한 7유로짜리 지팡이를 들고 다음 날 새벽 동트는 시간에 다시 먼 길을 떠났다. 오래전 보았던 고전 영화 ‘엘 시드’에서 찰톤 헤스톤이 소피아 로렌의 눈물을 뒤로한 채 전장으로 뛰쳐나가던 장면과 동일시되며 사뭇 비장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적정기술의 세계

지구는 70%가 물로 덮여있지만, 바닷물을 제외하면 사람이 쓸 수 있는 담수는 3% 미만이다.조사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 10억 명 가량이 식수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이에 바닷물을 식수로 만드는 친환경 적정기술을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늘고 있다. 항아리 속 바닷물을 가열한 고대기술_고대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의 조수기대양을 항해하는 많은 현대의 배에는 바닷물을 식수로 바꿔주는 조수기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엔진의 폐열을 활용하거나, 전기를 이용해서 바닷물의 염분을 제거해 민물로 만드는 것이지요. 그러면 현대적인 조수기가 없던, 엣날 사람들은 바다를 항해하면서 어떻게 마실 물을 구했을까요?지금도 작은 배에서 많이 쓰는 방법이지만, 가장 쉬운 방법은 그냥 마실 물을 구할 수 있는 육지에 도착할 때마다, 물통에 물을 채워두는 것이었겠지요. 또, 마침 중간에 비라도 온다면 빗물을 받아서 저장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가끔 예정했던 일정에 물을 구할 수 없다면, 비상수단을 찾아야 했을 것입니다.서기 200년경, 고대 그리스 아프로디시아스의 알렉산더(Alexander of Aphrodisias, 우리가 잘 아는 알렉산더 대왕하고는 다른 사람입니다.)는 그림을 통해 선원들이 비상시에 식수를 구하는 방법을 설명하였습니다. 항아리 안에 바닷물을 채우고, 그 입구를 스펀지로 막은 채 가열하면, 항아리 안의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증발된 수증기가 스펀지 안에 맺히게 됩니다. 이렇게 젖은 스펀지를 짜내서 물을 마시는 것이지요. 첨단 기술이 없던 시절에 고안해낸 간단한 방법이지만, 목마른 선원이 한 모금 마시는 데는 유용한 기술이겠네요.태양열 증류식 담수기의 위력_라스 살리나스의 태양열 증류식 담수기그러면 이런 기술은 현대에는 어떤 형태로 변형되어 쓰일 수 있을까요? 아쿠아메이트(Aquamate)는 보다 현대식 태양열 증류식 담수기입니다. 평소에는 공기를 빼고, 작게 접어서 구명보트 등에 보관하다가, 바다에서 식수를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 왔을 때, 펼쳐서 바다에 띄워서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검정색 바닥의 원통에 바닷물을 넣어두면, 태양열로 증발된 물의 수증기가 투명한 고깔 안쪽에 맺히고, 그렇게 흘러내린 물방울을 모아서 마실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물론 비상시가 아닌, 평소에 쓸 수 있을 만큼 많은 양의 물이 생산되지는 않겠지만, 망망대해를 표류하는 구명보트 안에서, 단기간 마시기에는 상당한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태양열로 염수를 증발시켜서 수증기를 모은다고 해서, 꼭 이렇게 적은 양의 식수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필요에 따라서, 큰 규모의 물 공장을 만들 수도 있지요. 1872년에 칠레의 라스 살리나스(Las Salinas)에는 주변의 은광이나 질산 칼륨 광산 노동자에게 물을 공급하기 위해서, 4,700㎡ 면적의 태양열 증류식 담수기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목재 프레임과 유리판을 이용해서 만들었는데, 약 40여 년간이나 운영하면서, 하루에 약 23톤의 담수를 생산했다고 합니다.적정기술, 물 부족을 해결하다_아쿠아메이트알렉산더가 살던 시기에는 땔감과 구리항아리, 스펀지는 있어도, 햇볕을 투과시키는 투명한 소재는 구하기 어려웠을테니(고대에도 유리는 있었지만, 매우 귀했다고 해요.) 태양열로 바닷물을 증발시켜서 수증기를 모으는 담수기보다는 연료를 이용해서 딱 필요한 만큼의 마실 물을 구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이었을 것입니다. 현대라면, 투명할 뿐 아니라, 가볍고 접기도 쉬운 플라스틱 필름이 있으니, 접이식 튜브형 태양열 담수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고요.라스 살리나스의 태양열 담수기는 아직 플라스틱이 발명되기 전에 만들었으니, 투명 비닐 필름이 아닌 유리판을 사용한 것이 당연했을 것입니다. 물론, 플라스틱이 개발된 이후에 태양열 담수기를 만들었다고 하더라도, 많은 양의 물을 수십 년간 공급하기 위해서는, 비닐 필름보다는, 내구성이 좋은 유리판을 선택하는 것이 합리적이겠지만요.이처럼, 고대에나, 근대에나,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도,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자원과 그 적용 방법은 조금씩 다르지만, 각각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적정기술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의
현대적 해석은 계속된다
청자상감운학문매병

_국보 제 68호 청자 상감운학문매병, 간송미술관 소장품 현대적 감각과 전통을 매개로 한 문화유산 굿즈 열풍은 계속되고 있다.청자상감운학문매병을 모티프로 한 굿즈는 이어폰&핸드폰 케이스 펀딩 시 6,288%를 달성하며 성공적으로 프로젝트가 종료되었다.고려 시대 청자, 어떻게 현대적 감각으로 만들 수 있었을까? 고려의 비취색을 재현한 굿즈_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운학문 문양을 활용한 굿즈들원 안에서는 하늘로 향하고, 원 밖에서는 땅으로 향하는 학 69마리가 새겨진 국보 제68호 ‘청자상감운학문매병’. 한국의 대표 문화재가 새로운 용도와 디자인을 만나 힙한 상품으로 재탄생했다. 고려청자의 대표로 칭송받는 청자상감운학문매병의 운학문 문양을 활용한 굿즈가 지금까지도 큰 인기를 끌고 있기 때문이다.국립중앙박물관의 전통 유물을 알릴 방안으로 개최된 입점 위탁 상품 공모전에서 여러 업체 중 국내 디자인 회사 미미달이 당선되었다. 미미달이 제품을 개발해 2020년도부터 박물관에 입점하여 판매되고 있는 운학문 휴대폰 케이스와 무선 이어폰 케이스는 전통을 모티프로 하여 실용성을 더했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고려청자를 21세기에 걸맞게 재해석하여 도자기 같지만 깨지지 않고, 단단하면서 매일 들고 다닐 수 있는 핸드폰과 이어폰 케이스. 가장 고심한 부분은 ‘고려청자의 비취색을 어떻게 구현할까’였다. 도자기에서 나오는 컬러가 플라스틱이나 종이에 나오는 컬러와 차이가 나기에, 고민 끝에 청자와 똑같이 구현하기보다는 소비자가 원하는 컬러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서 시중의 다른 제품보다 가격이 높음에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 전통문화를 소유할 수 있다는 메리트는 필요뿐 아니라 물건의 가치 소비를 중요하게 여기는 MZ 세대들의 자발적 SNS 구매 인증을 이끌었고, 자연스레 홍보로 이어져 ‘쇼핑 좀 한다’는 사람들의 소비로 이어졌다.고려만의 첨단 하이테크, 상감도자기 표면을 문양대로 파낸 뒤, 다른 색의 흙을 메워 넣어 무늬를 표현하는 상감기법은 양각이나 음각이 아닌 방법으로 문양을 넣는 고려의 독창적인 기법으로 세계 도자기 역사상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중국에서도 상감기법의 청자가 최고의 가치를 인정받아 고급 관리들에게 보내는 선물 중 으뜸이 되었다. 그렇다면 이 상감기법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을까?고려시대 때 은입사 기술이나 나전칠기 기술같이 쇠나 나무에 문양을 새겨 넣는 상감기법이 있었지만 도자기에다가 다른 흙을 메꿔서 문양을 나타내는 것은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세계에서도 고려만의 독창적인 기법이었다. 구운 도자기에 그림을 그릴 수 있지만 영구적인 무늬는 아니었다. 청자는 1,200℃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지는데, 어지간한 안료는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면 불에 견디면서도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만들 수 있을까. 오랜 고민 끝에 고려의 장인들은 상감이라는 기존의 공예기법을 청자에 적용하는 기발한 묘안을 생각해낸다. 청자 흙과 채워 넣는 흙의 수축관계를 고려해 문양이 매끄럽게 표현되도록 했고 초벌구이 후 유약을 얇게 발랐다. 유약 속에는 주석이나 전석, 석회석이 들어갔고 철이 3% 정도 들어가 있다. 유약은 환원상태*)에서 녹으면서 푸르게 변하며 작품의 강도를 더하고 유리질화가 되면서 문양이 제 빛을 발하도록 한다. 상감기법은 이처럼 당대 고려인들의 우수한 기술력이 집약된 하이테크의결정판이었던 것이다.*) 환원상태 : 도자기를 구울 때 산소량을 줄여 분자 결합의 변화로 푸른색을 낼 수 있는 상태고가의 미술품이었던 고려청자를 되찾은 간송조선 시대에는 이미 고려청자를 찾아볼 수 없었고, 남아있는 것은 무덤에 있는 것뿐이었다. 당시 일제 시대, 일본이 나서서 조직적으로 도굴을 시작하며 세상에 나오게 된 고려청자. 국보 청자상감운학문매병에 남은 상처가 당시 도굴꾼들이 사용했던 탐침봉의 흔적으로 추정된다고 하니, 사실상 조선에서 도굴꾼의 활약이 없는 곳이 없었을 것이다.청자상감운학문매병은 도굴되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일본인 거간 마에다 사이치의 수중으로 들어간다. 마에다는 청자를 손에 넣자마자 판매를 위해 조선과 일본에 청자의 사진을 뿌렸는데, 가장 먼저 구매 의사를 밝힌 곳은 조선총독부박물관이었다.당시 만 원에 구매 의사를 밝혔는데, 1930년대 경성의 집 한 채 가격이 천 원이었으니, 만 원의 가치를 환산하면 아파트 열 채 가격이었다. 그러나 마에다는 거절하였다.당시 청자의 소문을 들은 조선인 청년 간송 전형필이 마에다를 찾아가 고려의 청자를 보여 달라고 한다. 고가의 미술품이었던 고려청자는 너무 비싸서 조선인들이 손을 댈 수 없는, 영역 밖의 가격이었다. 마에다는 청자를 보여주면서도 전형필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전형필은 그 자리에서 청자의 가치를 알아보고 가격을 물었고, 마에다는 2만 원을 요구했다. 조선총독부 박물관에서 제시한 2배의 가격이었는데, 전형필은 가방에서 2만 원을 꺼내 값을 지불하고 그 자리에서 청자를 가지고 조선으로 돌아갔다.당시 일본 내에서는 마에다 사이치보다 그의 장인이 더 유명한 거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이치의 장인이 오사카에 있는 굉장히 유명한 골동품상을 거래처로 갖고 있었는데, 오사카의 거상이 청자 사진을 보고 구매 의사를 밝혔으나 이미 팔린 뒤였다. 너무 아쉬웠던 오사카의거상은 한국에 와 전형필을 만나게 된다. 그가 구매 금액 2배, 4만 원을 제시하며 양보를 해 줄 수 없느냐, 물으니 전형필은 ‘이거보다 더 좋은 청자를 저한테 주시면 정당한 가격을 쳐서 구매하고 이 청자는 원래의 가격에 드리겠다.’라며 정중하고 의연하게 거절하였다.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을 거치며 한국 문화유산의 수호자로 여겨지는 간송 전형필 선생(1906~1962).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술 수집가 중 한 명인 그가 1938년 개관한 간송미술관은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미술관으로 개관한 이래 지금까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립미술관 중 한 곳이다. 문화를 통해 우리 민족의 정신을 지킨다는 ‘문화 보국’의 건립이념으로도 유명하다. 문화재의 가치를 알아본 개인의 안목과 그 가치를 보존하고 다시 현대적 해석의 노력으로 새로운 가치가 부여된 청자상감운학문매병. 이제는 소유하고픈 굿즈로 21세기의 매력적인 아이템으로 각광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