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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위한
공간을 만들다

새삶 대표이사 이지영 공간크리에이터 새해를 맞이하면 새롭게 마음가짐을 다잡고자 ‘정리’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그런데 그저 깔끔하게 치우고 수납을 잘하는 것이 정리일까. 이지영 대표는 사람 중심의 가치 있는 공간 창출을 통해 정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다. 이지영 대표는 tvN ‘신박한 정리’에 출연해 정리의 미학을 보여주었으며, 현재 (주)새삶 대표이사로 사람 중심의 공간을 창출하고 있는 공간크리에이터다. 인생 정리를 통해 만난 ‘정리’코로나19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증가하면서 집 공간에 대한 개념이 변화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집 안의 물건 때문에 자신의 공간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물건을 버리자니 아깝고 쌓아두자니 공간이 좁아지다 보니 ‘정리’의 필요성을 더욱 체감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방영된 TV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는 정리의 패러다임을 새롭게 제시하고 마법 같은 정리로 화제를 불러일으키며 시즌2까지 방영 되었는데, 그 중심에 이지영 대표가 있었다.이지영 대표는 정리컨설팅 창업 이전에 유아교육을 전공하며 15년가량 현장에 있다가 30대 중반 무렵 국가 산하 기관에 계약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정규직 전환과 정년 보장까지 꿈꾸었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계약만료였다.“그때가 서른아홉이었어요. 마흔을 목전에 두고 다시 유아교육 현장으로 돌아가기엔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결단했습니다. ‘이지영의 전공을 정리’하자고 말이죠.”유아교육 전공을 선택한 건 대학 입학 당시 IMF시기였고, 취업이 잘된다는 이유였다. 이지영 대표는 전공을 정리하고 나니 ‘내가 가장 신나게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었는데, 그게 ‘정리’였던 것.“정리를 업으로 삼기까지 일말의 고민도 없었어요. 어릴 적부터 정리를 잘한다는 소리를 무수하게 들었거든요. 오죽하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방법도 정리이죠.(웃음)”정리는 남의 집 일을 해주는 게 아니냐며 주변의 만류도 있었지만, 이지영 대표는 자신 있었다. 그는 창업 초기에 무료 공간컨설팅을 해주는 조건으로 후기를 작성해줄 블로거를 모집했다. 성심성의껏 정리한 공간을 보고 크게 만족한 고객이 정성스럽게 후기를 작성해줬는데, 그 덕분에 하루 만에 12건의 일이 성사되기도 했다. 그렇게 이지영 대표는 정리를 통해 인생 2막을 열게 되었다. 본질에 충실한 정리 정돈정리와 관련한 직업은 이전에도 존재했는데, 이지영 대표만의 차별화된 정리는 무엇일까.“기존 정리 개념은 수납에 중점을 두는데, 이건 일본 문화예요. 일본은 미니멀라이프 스타일이 앞서 있었기에 수납만 잘해도 정리가 되죠. 이 문화가 한국에 넘어오면서 ‘어떻게 넣고 개느냐’가 우리의 정리 기준이 되었어요. 하지만 저는 정리 정돈의 본질에 접근하려고 했습니다.”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로 하지만, 정작 집 안에 나를 위한 공간이 없다. 가령 주부들의 개인 공간을 주방으로 생각하는데, 아니다. 안방은 엄밀하게 부부의 공간이다. 이렇게 세밀히 보면 결국 남편의 공간도 없는 셈이다.“가족 개개인의 공간을 마련해야 모두가 행복을 느낍니다. 구성원마다 취향을 살려주고, 그 사람이 오롯이 나만의 장소라고 느낄 한 공간과 모두가 화합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거죠. 정리 컨설팅을 할 때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이 ‘따로’와 ‘함께’입니다.”이를 위한 정리의 시작은 ‘비움’이라고 이지영 대표는 재차 강조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물건을 많이 소유하려는 경향이 있어요. 그런데 나라 면적도 작고, 집 평수도 한계가 있다 보니, 물건을 쌓아두면 그만큼 공간이 사라지는 거죠. 즉 ‘죽어있는 공간’을 자신이 원하는 ‘살아있는 공간’으로 바꾸기 위해선 비워내야 합니다.”비움으로 정리를 마쳤다면, 새로운 공간을 ‘정돈’해야 하는데, 여기서 이 대표만의 신박한 마법이 펼쳐진다. 가령 주방에 있는 식탁을 거실로 옮긴다던가, 책장을 눕혀 사용하는 등 남아있는 물건을 효율적으로 배치해 공간을 창조해내는 것이다.“수납할 바구니 하나 사지 않고, 옷걸이를 바꾸지 않았는데도 어떻게 집이 달라지냐고 많이 질문하시는데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물건을 비워내는 ‘정리’와 내가 쓸 물건을 잘 사용할 수 있도록 배열하는 ‘정돈’. 정리 정돈의 본질에 충실했기 때문이죠.”비워내는 ‘정리’를 통해 죽어있는 공간을 발견하고, 가구의 고정관념을 부수는 ‘정돈’을 통해 공간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이지영 대표. 그가 창직해 상표출원까지 한 ‘공간크리에이터’라는 직업은 이지영 대표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주는 단어인 셈이다. 새 삶을 살아갈 사람들을 응원하며비움이 정리의 시작이라곤 하지만, 막상 물건을 버린다는게 쉬운 일은 아니다. 이지영 대표 역시 그러한 고객을 무수히 만나왔다.“사람들이 저마다 물건을 소유하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하던 가족의 유품, 잊지 못할 추억이 담긴 물건, 이러한 물건을 버리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하죠. 그래서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고객을 설득하기 이전에 그들의 삶을 존중하고 위로해줍니다.”이지영 대표가 고객에게 항상 하는 말은 ‘애썼다’이다. 애쓰며 인생을 살아온 고객의 마음을 헤아리고 보듬어주고 나면 모든 고객이 물건을 비운다고.“이후 고객들에게 잠시 외출하고 오시라고 권해요. 물건을 비워낸다고 애쓰셨으니, 제가 보답해드려야 하잖아요. ‘언니가, 딸이 대신 치워놓을게요.’라고 말씀드리죠. 정리된 집을 추후에 보여드리는 건 방송 이전부터 해오던 방식입니다.”이지영 대표는 수많은 공간과 사람들의 인생을 만나며 정리 해왔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정리로 배우 장광의 딸 미자씨와 개그맨 정은표의 아들 지웅군의 방 정리를 꼽았다.“미자씨는 시집을 가는 게 가족의 염원이었어요. 이를 위해 미자씨 방을 입구 쪽으로 보내 가족과 분리시켰죠. 또 지웅군은 공부하기 좋은 환경으로 공간을 정리했고요. 이후 미자씨는 결혼을, 지웅군은 서울대에 입학했어요. 제가 정리해준 방에서 삶을 살았던 사람이 잘되니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회사명 ‘새삶’의 ‘삶’에는 인생과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즉 정리를 통해 변화된 공간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새사람이 되길 바란다는 이지영 대표의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몇 해 동안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낸 이지영 대표. 그의 새해 목표는 ‘여행’이다.“그렇지만 계속 쉴 수는 없으니 여행지에서 정리를 해주고 싶어요. 저는 이글루에서도 공간을 창조할 수 있거든요.(웃음) 세계 각지에 지내는 사람을 이해하고 그들이 지내는 공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주고 싶어요.”이지영 대표는 전공 정리를 시작으로 대구에서 창업을 시작한 지 4년 만에 서울에 회사를 차리는 등 정리를 통해 삶이 달라졌다며, 새해를 맞이해 물건 정리를 적극 추천했다.“새해 목표로 누군가는 다이어트를, 누군가는 인맥을 혹은 생각을 정리하고픈 사람도 있을 테지만, 가장 쉬운 정리는 물건 정리입니다. 물건을 정리하면 나의 공간이 달라져 있고, 공간이 달라지면 기분이 달라지고, 이후 내 삶은 분명 달라져 있어요. 그러면 모든 분들이 소망하시는 꿈을 새해에 반드시 이룰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인생 2막을 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

글, 사진. 이영철 여행작가,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 저자 직장이라는 굴레에 얽매이다 보면 꿈은 더욱 간절해지게 마련이다.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 1번이었다.고산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히말라야 설산들….인생 후반을 완전히 바꿔놓은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돌아본다 간절한 꿈, 버킷리스트 1번회사에서 퇴직 통보 받은 날 저녁, 핸드폰 속 지인들에게 스팸 문자를 보냈다.“29년 회사 생활 끝내고, 저 이제 백수입니다. 그 동안 감사했습니다. 앞으론 가진 게 시간밖에 없사오니, 자주 좀 불러서 같이 놀아 주세요.”대한민국 남자들에게 ‘퇴직’이란 인생에 큰 분수령이 되는 듯하다. 신분과 처지가 하루아침에 360도 바뀌는 것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폼 잡고 내밀던 명함도 없어진다. 지인들과 연락 끊고 두문불출하며 집에서 혼자 술독에 빠지는 선배들 경우도 여럿 봐왔다. 난 절대 안 그럴 거라고 다짐하며 당당한 척 밝은 표정을 지었지만 그 속이야 어디 갈까?“요즘 뭐하고 지내?” 막 퇴직한 이에게 던지는 이런 질문은 참으로 얄밉고 난감했다. 진정한 호의보다는 은근한 저의가 엿보였다. 속 좁은 피해의식이라고 자책은 하면서도 어쩐지 상대방이 야속했다. “응, 네팔 트레킹 준비하고 있어.”라고 대답할 수 있게 되자 내심 우쭐해졌다. 측은해하는 표정으로 날 위로하려 했던 친구에게 멋진 카운터펀치 한 방 날린 듯 통쾌해졌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공격 본능이었다.아침 출근할 곳이 없어진 백수 첫해 2월, 네팔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랐다. 흥분과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더 컸다. 얼떨결에 내지른 듯 묘한 후회의 기분까지 들었다. 배낭 하나 짊어진 채먼 길을 걷고, 설산을 누빈다. 세계 각지의 사람들을 만나 함께 걸으며 오순도순 이야기 나눈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미래의 내 모습이었다. 직장이라는 굴레에 얽매이다 보면 꿈은 더욱 간절해지게 마련이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은 내 인생 버킷리스트 1번이었다._다리에 걸린 오색 깃발은 모든 생명체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뜻 마주하는 풍경은 경이 그 자체카트만두에서 아침 첫차를 탔다. 내내 덜컹거리는 너덜길, 낡은 버스 안에서의 불편한 일곱 시간도 나름 행복했다.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는 네팔의 산과 들과 마을과 사람들 모습, 단 하나라도 놓칠세라, 졸려오는 두 눈을 부릅떴다. 낯설지만 따스하고 정겨운 풍경들이었다.해발 800m의 산골마을 베시사하르에서 트레킹을 시작했다. 고산족 사람들의 땀과 노새 배설물로 다져진 히말라야 산길을 올랐다. 장대하게 펼쳐진 계단식 다랭이밭에 눈길이 꽂혔고, 깎아지른 계곡 아찔한 흔들다리 위에선 식은땀이 흘렀다. 수직으로 솟아오른 절벽 중턱 좁은 길을 지날 땐 오금이 저려왔다. 계곡과 절벽 밑을 길게 흐르는 마르샹디 강의 연둣빛 석회수 강물, 고산마을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그리고 햇빛에 반사되어 눈부신 히말라야 설산들…. 난생처음 해외 트레킹에 나선 나에겐 마주하는 풍경 하나하나 모두가 경이 그 자체였다.하루 평균 500m씩 고도를 높여갔다. 첫날엔 아득한 신기루처럼 멀었던 안나푸르나 여러 봉우리들이 하루가 지나면 눈에 띄게 가까워지는 게 신기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저절로 미소가 떠오른 게 하루에도 몇 번씩이던가. 히말라야 고산마을의 잠자리는 늘 썰렁하고 추웠다. 가져간 침낭 속에 웅크려 오들오들 떨며 잠을 청했지만 마음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6일째 되는 날 해발 3,500m 마낭에서부터 고산병이 엄습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묘한 두통이다. 고산 등반이라면 한라산만 여러 번이었고, 백두산은 여행사 지프차를 타고 한 번 올랐을 뿐인 나였다.9일째 되는 날 해발 4,500m의 쏘롱페디 식당 안은 패잔병 집합소를 닮았다. 트레커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이미 고산병을 앓고 있거나 또는 고산증에 대비하는 자세인 것이다. 인근 하늘에서 헬기 소리가 점점 가까워진다. 청년 두 명이 식당으로 들어오더니 한쪽 귀퉁이에 누워있던 동료 한 명을 둘러업고 나간다. 업힌 환자의 표정이 너무나 서글프고 가련해 보인다._암석들이 언제 굴러 내려올지 모르는 산사태 위험지역 별들에 더 가까이 다가가다깎아지른 급경사 얼음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고산병에 시달려온 머리는 끊임없이 지끈거리는데 그 위로 오후의 뜨거운 햇살이 송곳처럼 내리꽂는다. 발자국 두 번 내딛고 멈춰서선 심호흡 크게 몇 번 하기를 반복했다. 쏘롱페디에서 하이캠프까지 2km, 고도 200m를 올리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고산병에 좋다는 마늘수프 한 그릇 겨우 비우고, 고산병 약인 다이아막스 두 알 먹고 침낭에 들었다. 부족한 산소와 침낭 속 답답함에 잠을 설치다 비몽사몽간에 시계를 보니 새벽 2시 반. 침대 밑 보온병을 열어 따뜻한 꿀물을 반 컵 따라 마셨다. 두통에 효과 있다 하여 저녁 먹은 후 식당에서 사왔지만 밤중에 화장실 갈 일이 끔찍하여 참고 참다가 마신 거였다.소변을 참다가 밖으로 나왔다. 문 하나만 열면 그대로 설원이다. 무수한 별빛과 하얀 눈 덕에 주위는 밝았다. 조금만 움 직이면 화장실이지만 왠지 무섭고 꺼림칙했다. 무의식적으로 잠깐 주변을 둘러보곤 선 채로 슬며시 소변을 보았다. 안나푸르나의 밤하늘은 새삼 더 찬란해 보인다. 해발 5천m에 가까이 올라왔으니 별들과의 거리도 그만큼 더 가까워진 셈이다. 길게 팔 뻗으면 별 한두 개쯤 손바닥에 살포시 내려와 앉을 것만 같다. 안나푸르나 설원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의 기억은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지금도 몽롱하다._안나푸르나의 새벽, 별빛이 쏟아질 듯 황홀하다인생의 정점이 아닌 새로운 시작그리고 다섯 시간 후인 그날 아침 9시 반, 마침내 안나푸르나 서킷 코스의 정점인 쏘롱라 고개에 올랐다. 10일 동안 걸어 백두산 두 배 높이인 해발 5,416m에 도달한 것이다. 스스로 얼마나 감격적이었을까. 허나 그때를 추억하면 많이 아쉽다. 험난했던 여정을 돌아보며 가슴 벅차오를 만도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경황이 없었다. 체력 고갈과 고산병 증세로 며칠째 두통에 시달린 뒤였다. 남들과 같은 감격의 눈물 따위도 없었다. 저 아래 까마득한 묵티나트까지 과연 내가 안전하게 하산할 수나 있을지 공포에 가까운 걱정과 두려움 뿐이었다.가파른 눈길을 비몽사몽 내려왔다. 오를 때와는 전혀 다른 긴장의 연속이었다. 더듬더듬 기어내려 산 중턱 안전지대에 겨우 이르렀다. 뒤돌아 정상을 올려다보자 비로소 눈물이 쏟아졌다. ‘내 인생도 이제 정점을 지나 내리막이구나’하는 회한이었는지 아니면, 정상에서 흘렸어야 할 가슴 벅찬 감격의 눈물이 뒤늦게 쏟아진 것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퇴직 후 곧바로, 당차게 도전한 해외 첫 트레킹이 내 인생 후반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우리 인생의 일들은 겪을 당시엔 그 의미를 잘 모른다. 특히 여행이 가져다주는 변화는 대체로 뒤늦게 감지되는 듯하다.1

자전거,
선진국에서 부활한
가장 오래된 적정기술

글_ 신관우 서강대학교 화학과 교수, 국경없는과학기술자회 회장 MIT가 개발하여 페루의 주민들에게 제공된 무동력 자전거 세탁기, 영국 해협을 건넌 인간 동력 항공기 등을 볼 때 자전거는 여전히 인류에게 유용한 적정기술이다. 환경 친화적·노동 친화적인 자전거이른 새벽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노동자들의 끝도 없는 행렬의 사진을 기억합니다. 수천수만 명의 노동자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사진은 오랜 은둔에서 깨어나 개혁과 개방, 근대화로 가고 있는 중국 산업화의 상징으로 기억됩니다. 간혹 적정기술의 사례를 알려달라고 질문을 받으면, 일반인들에게도 잘 알려진 대표적인 몇 개의 적정기술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마 가장 널리 언급되고 알려진 사례는 자전거를 이용한 도구들입니다. 본 기능인 이동 수단으로서의 자전거는 현장에서 다양하게 활용됩니다. 먼저 자전거 인력거가 있습니다. 자전거에 부착하는 짐수레도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거동을 못 하는 환자를 눕혀서 이동시키는 자전거 앰뷸런스도 소개된 바 있습니다.자전거는 인체공학적이고, 직관적이며 효율적인 에너지 전환 장치입니다. 고장이 적으며 누구나 수리할 수 있습니다.환경 친화적이며, 자전거를 이용하지 않는 동일한 일의 노동 강도에 비하면 노동 친화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페달의 회전운동을 이용한 에너지는 이동 수단으로 활용하는 것 이외에도 다른 기계적 회전이나 전기 에너지로의 전환이 가능하게 합니다. 농사에 필요한 물을 길어오는 양수기로, 수확된 쌀을 털어내는 탈곡기로, 수확된 쌀을 도정하는 장치로도 활용됩니다. 전기가 없는 지역에서는 물을 끌어 올릴 수 있는 펌프로, 또한 긴급히 충전할 수 있는 전원장치로도 활용됩니다. 건강한 현대생활의 이미지가 되다한편, 베트남의 현대화는 오토바이로 상징됩니다. 도로마다 가득 차 있는, 마치 강물이 이동하듯, 동시에 이동하는 끝없는 오토바이의 행렬은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상징입니다. 최근의 동남아는 자전거를 이용한 이동 수단을 찾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오토바이에 연결된 소위 ‘툭툭’으로 불리는 이동 수단이 있습니다. 시내에서는 휴대전화로 ‘그랩(Grab)’이라는 위치 기반 앱으로 1인승 오토바이가 신속하게 이동시키는 서비스가 보편화되어 있습니다. 작은 시골의 도로에도 페트병에 판매하는 오토바이용 휘발유 좌판대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동남아의 여러 국가는 소위 자전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오토바이로 상징되는 산업화 국가로 넘어서고 있는 듯 보입니다.그렇다면 이제, 자전거의 적정기술 역할은 사라졌을까요?선진국에서의 자전거는 하나의 현상입니다. 당장 한강공원에 가보면 카본 프레임, 티타늄 동체, 디자인도 멋진 휠 셋과 수십 단의 기어, 200km 정도는 단숨에 달릴 수 있을 것 같은 로드바이크, 강력한 산악자전거 등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에는 5억 대가 넘는, 즉 한 가구당 한 대꼴로 자전거가 널리 보급되어 있습니다. 유럽과 북미의 도시마다 자전거로 출퇴근하는 모습은 환경과 자연, 그리고 건강한 현대생활의 이미지이기도 합니다. 자전거의 진화는 끝나지 않았다한편 선진국에서는 적정기술에서 진화된 자전거가 상품화되고 있습니다. 헬스클럽에서 운동 삼아 밟는 페달 에너지를 집안의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기구들이 판매되고 있습니다. 자전거로 구동되는 첨단(?) 헬스 겸용 세탁기도 출시되고 있습니다. MIT가 개발하여 페루의 주민들에게 제공한 무동력 자전거 세탁기가 그 원형 모델입니다.지상에서의 이동성뿐 아니라, 자전거와 같은 원리의 인간 동력 항공기와 보트도 선보인 바 있습니다. 미국 나사에서 개발한 조종사가 페달로 구동하여 비행하는 항공기는 영국 해협을 건너기도 하였습니다. 인간 동력 보트는 최대 13노트를 달성했습니다. 자전거의 페달로, 더 빠르고 유용한 새로운 이동 수단이 개발되고 있는 것입니다.개발도상국보다 가장 현대화된 선진국에서 자전거가 더 관심을 받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광경입니다. 인력을 가장 효과적인 에너지원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이 발명품의 진화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동 수단에서, 적정기술로, 그리고 적정기술을 응용한 새로운 도구로 진화하고 있습니다. 자전거는 여전히 150년 전과 같은 디자인이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고 있습니다. 잘 만들어진 유용한 도구, 자전거는 앞으로도 인류의 변화된 삶을 바꾸는 새로운 적정기술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소유하고 싶은
국보 금동반가사유상

우리나라 국보가 MZ 세대에게 인기 있는 굿즈템으로 떠올랐다.MZ 세대의 인기를 한몸에 받는 금동반가사유상은 전 세계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평가받아 해외에서도 러브콜을 받는 자랑스러운 문화재이다.금동반가사유상을 어디에서, 어떻게 감상할 수 있는지 살펴보자. MZ 세대의 원픽 문화재 굿즈지난 10월, 국립중앙박물관 상품 브랜드 뮷즈(MU:DS)와 협약을 맺은 프리즘(PRIZM)에서 반가사유상 미니어처 모형 1,000개 한정 판매 라이브 방송을 진행했다. 문화재에 관심있던 사람들만 기념품 정도로 구매할 거로 생각했다면 오산. 반가부좌 자세로 한 손을 뺨에 대고 평안한 미소를 띠고 있는 미니어처 굿즈는 MZ 세대 사이에서 ‘힐링템’으로 불리며 사랑받고 있다. 이전에 BTS RM이 작업실에 놓아둔 것이 SNS에 널리 퍼지며 완판됐고, 이후 프리즘에서 더욱 다채로운 색상을 준비했다. 형형색색 여러 파스텔 색상 중에 선택할 수 있는가 하면, ‘내가 그리는 반가사유상’ 미니어처는 취향에 따라 물감, 페인트, 마커펜 등 다채로운 재료의 질감과 색채를 더해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나만의 반가사유상을 만들 수 있다.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국보, 금동반가사유상프랑스에 루브르 박물관을 대표하는 모나리자가 있듯, 한국에는 국립중앙박물관을 대표하는 우리의 문화유산, 국보 반가사유상이 있다. 반가사유상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900년 전,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보다 1,400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한 점씩 전시했던 반가사유상을 사상 처음으로, 두 점 동시 상설 전시를 하면서 관람하러 온 사람들도 많아졌다. 국립중앙박물관 2층에는 오로지 국보 반가사유상 2점만을 위한 공간, ‘사유의 방’이 있다. 입구에는 이런 글귀가 있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Time to lose yourself deep in wandering thought)’ ‘반가사유상’이라는 이름의 뜻은 무엇일까. 수행이나 명상을 할 때 가부좌를 하는데 여기서 한쪽 다리를 편하게 내려놓은 반만 가부좌했다는 뜻의 ‘반가’, 생각에 잠긴 상이라는 뜻의 ‘사유상’을 합친 말이 그 의미이다.반가사유상은 불상의 형태 중에서도 특별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손을 뺨에 대고 한쪽 다리를 올리고, 한쪽은 내렸을 때 측면, 뒷면, 앞면을 조각한다는 것은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일이었다. 그 때문에 당시 사람들의 머릿속에 사유상의 뛰어난 조형미가 강한 인상을 남겼고, 보통 부처의 이름을 넣는 석가모니상, 아미타불상, 약사불상 등과 달리 특이하게도 자세가 불상의 명칭이 되었다._전시실 입구  나만의 문화재 관람 포인트현재는 국보의 서열화 논란으로 문화재 지정번호를 폐지하였기 때문에 이전의 국보 78호(6세기 후반 제작)를 왼쪽, 국보 83호(삼국시대 제작)를 오른쪽에 있는 반가사유상이라 말할 수 있다. 두 반가사유상의 외형은 살짝 다르다. 그렇기에 비교 포인트를 잡으면 더욱 즐겁고 의미 있는 관람을 할 수 있다.먼저 눈에 띄는 비교 포인트는 ‘보관’이다. 왼쪽은 해와 달이 있는 뾰족한 관이고, 오른쪽은 장식이 생략되어 있고 단순한 형태의 삼산관이다. 두 번째 비교 포인트는 ‘옷’이다. 왼쪽은 날개옷 같이 부드러운 비단옷을 선으로만 표현하여 얄팍한 천의 느낌을 살렸으며, 오른쪽은 상의는 목걸이만 착용하였고 하의 치마를 역동적인 주름으로 만들어 두꺼운 천을 표현했다. 뛰어난 주조 기술의 정수주조 과정은 철심 위에 진흙으로 내형틀을 만들고, 내형틀 위에 밀랍을 씌워 불상의 모양을 조각한다. 조각된 밀랍 위에 진흙을 발라 외형틀을 만들고, 외형틀을 고온으로 가열해 밀랍이 녹아 나오게 한 뒤 밀랍이 녹아 나온 공간에 1,100℃ 정도의 동과 주석을 섞은 쇳물의 온도를 유지하며 부어 완성한다. 세세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전해지는 전통 주조 기술과 과학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주조하여도 한 번에 성공하기란 쉽지 않다. 또한 왕실이나 가능했을 규모의 후원과 몇 십 명 정도의 장인들이 힘을 모아야만 완성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비파괴검사인 CT촬영을 통해 사유상을 점검해 보면, 왼쪽의상은 신체 곳곳에 금속을 이어 붙여 주조 결함을 수리한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당시 금동은 굉장히 비싸고 귀한 재료이다 보니 금동의 두께를 4mm로 아주 얇게 주조하는 바람에 신체의 복잡한 자세까지 쇳물이 흘러 들어가지 않았다. 때문에 주조 이후에 금속을 이어 붙인 것으로 보인다. 약 50년 정도 후에 만들어진 오른쪽 상을 CT촬영 해보면 몸통부분은 이어붙인 흔적 없이 주조 과정에서 한 번에 성공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 시도 끝에 기술적으로 발달한 방법으로 오른쪽 상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_국보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왼쪽) 반가사유상만을 위한 사유의 방국립중앙박물관 단일 전시장 사상 처음으로 건축가가 설계를 맡은 곳, 사유의 방. 건축가는 박물관 요청 세 가지, ‘2개의 반가사유상을 놓고 싶다’, ‘유리 케이스에 넣고 싶지 않다’, ‘반가사유상의 뒷모습도 보여주고 싶다’를 충족하기 위해 면적을 소극장 크기로 늘려 설계했다.전시장의 바닥은 살짝 올라가 있고, 천장은 조금 더 큰 각도로 내려가 있어서 멀리서 보면 뒤쪽으로 공간이 더 확장되는 느낌이다. 이 공간을 설계한 최욱 건축가는 이러한 장치를 통해 관객과 두 불상이 서로 교감할 수 있는 공간을 더욱 크게 확장하는 효과를 노렸다고 말한다.사유의 방이 특별한 건 뭐든 조금씩 어긋나고 틀어져 있다는 점이다. 전시장 바닥이 1도쯤 기울어 있어 구슬을 굴려보면 입구 쪽으로 굴러내려 간다. 천장에는 2만 천여 개의 알루미늄 봉을 마치 하늘의 별처럼 박았다. 천장 역시 불상 쪽으로 갈수록 아래로 기울었다. 황토로 만든 전시관 벽면도 살짝 누웠다. 빛을 흡수하는 소재인 황토에 계피를 섞어 은은한 향기까지 풍기게 했다.무엇보다도 중요한 건 반가사유상 두 불상의 시선이 살짝 틀어져 정면을 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덕분에 관람객도 반가사유상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치지 않기에 공간이 경직되지 않고 자연스러운 느낌을 준다. 사유의 방을 설계한 건축가는 과거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반가사유상의 미소에 젊은 세대가 공감하는 공간을 만들고자 했고, 그로 인해 작품의 가치가 더욱 빛난다면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될 것으로 믿었다.이제 우리에게 더욱 친숙해진 국보 반가사유상을 만나러 가보자. 그곳에서 오랫동안 묵혀두었던 나만의 사유를 완성해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