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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면서도 따뜻하다
초록우산어린이재단 홍보대사,
개그맨 이홍렬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어떻게 하면 인생을 잘 살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진다. 존경받는 선배나 어른이 되고 싶고, 일이 있든 없든 마음의 중심을 지키면서 공허함 없는, 알찬 삶을 살고 싶어 한다. 그런 소망을 갖고 있다면 이홍렬에게서 소중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언제나 우리 곁에 있는 사람 방송인은 TV 출연이 뜸하면 잊히기 쉽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비록 방송에 자주 안 나오더라도 마음속 한자리를 차지하며 늘 우리와 함께 있는 것 같다. 개그맨 이홍렬이 바로 그러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연히 그를 만난 사람들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하면서 “요즘 방송에 왜 잘 안 나오세요?”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좋은 뜻으로 하는 말이라는 걸 잘 알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그는 좀 야속한 기분도 든다. “저라고 왜 방송 욕심이 없겠어요. 그런데 이제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도 많이 사라졌고 후배 개그맨들이 들어갈 자리조차 별로 없는 걸요, 우리 인생에 끝이 있는 것처럼 우리가 하는 일에도 끝이 있는 법이죠. 그걸 빨리 잘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삶이라고 생각해요.” 비록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그는 아직도 현역으로 왕성히 활동 중이다. 직접 촬영하고 편집하는 유튜브 ‘이홍렬TV’를 통해 대중과 소통하고 있고, 지난 8년간 연극 <여보, 나도 할 말 있어>를 통해 꾸준히 전국의 관객과 만나고 있다. 지난 8월 22일에는 부산은행 본점을 방문하여 초록우산어린이재단 부산지역본부와 함께하는 학교폭력예방을 위한 ‘제6회 학교폭력 예방 스마트폰 영상제’ 후원금 전달식에 참여하기도 했다. “나이 60이 넘었을 땐 조금 놀랐는데 70이 넘었을 땐 아주 깜짝 놀랐어요. ‘데뷔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떻게 이런 나이가 됐지?’하고. 그래서 ‘이제 남은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하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요즘은 좋은 선배, 그리고 꼭 좋은 어른이 되고 싶은 게 꿈이에요. 너무 흔하고 평범한 얘기일 수도 있겠지만.” 어머니에게서 배운 신용과 책임감의 가치 좋은 선배, 좋은 어른이 되는 게 꿈이라고 했지만 이미 누구나 그가 좋은 선배, 좋은 어른임을 인정하고 있을 것이다. 오랫동안 정상의 위치에 있으면서 그 어떤 스캔들이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지 않고 깨끗한 이미지로 사랑받아왔다. 후배들에게도 항상 존경받으며 의지할 수 있는 선배였고 지금도 여전히 그러하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인간관계에서 정확함을 지켰기때문이 아닐까요.”라는 답변을 들려주었다.“정확하다는 것은 ‘실력이 있고 책임감이 있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가르쳐주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신용과 책임감이에요. 갚아야 할 것이 있으면 정확한 시기 안에 갚아야 하고, 선배라도 후배에겐 신의를 지키며 지켜야 할 선을 넘지 말아야 하죠. 그래서 사회복지기관과 같이 일하는 게 저하고 잘 맞더라고요.” 사회복지기관은 많은 사람들의 기부를 받아 그 돈이 어느 곳에 적합하게 쓰이는지 누구에게나 정확하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더 많은 사람들을 후원자로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정확함’을 중시하는 그와는 궁합이 잘 맞을 수밖에 없다. “우연한 기회로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행사에서 사회를 맡은 데서 사회복지기관과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행사 끝나고 나서 흰 봉투를 받았는데 집에 와서 열어보니 당시로선 큰 액수였던 10만 원이 들어 있었어요. 엉겁결에 받은 것이긴 했지만, 과거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아왔던 제가 어려운 아이들을 돕는 일에 써야 할 이런 돈을 받는다는 게 과연 옳은 일인가 생각하니 부끄러웠죠. 그래서 그것을 돌려준다는 의미로 어려운 형편에 처한 아이들과 후원 결연을 하나둘 맺기 시작했는데 그게 점점 더 큰 의미로 다가와서 더 많은 결연을 맺고, 주위 사람들에게도 알리면서 이렇게 28년간 초록우산어린이재단의 홍보대사 일을 해오게 된 거예요.” 마지막 남은 버킷리스트 하나 정확함을 좋아한다고 해서 인간관계에서 칼 같고 냉정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다. 사실 그는 그 누구보다도 가슴이 따뜻한 사람이다. 직업을 떠나서 주위 사람들에게 웃음과 행복을 주는 것을 천명처럼 여긴다. 사석에서 보는 그는 절묘하게 선을 넘지 않는 농담으로 주위 사람을 웃기는가 하면, 스스럼없이 흉금을 터놓고 솔직한 속 얘기를 나누는 사람이었다. 잘난 척 거들먹거리지도 않고, 상대에게 아첨하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이 존중받는다는 느낌을 받게끔 해준다. 이런 것을 가리켜 “정확하면서도 따뜻하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그는 사회복지기관과 오랫동안 함께 일하며 국토종단 대장정과 같은 버킷리스트에 있던 일을 이미 많이 이루었다. 그러면서도 인생 마지막 날까지 꼭 이루고 싶은 버킷리스트 목록이 하나 더 남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바로 주위 사람들이 121명의 에티오피아 어린이들과 후원 결연을 맺게 해주는 일이다. 참고로, 121명은 한국전쟁 때 우리나라를 돕기 위해 파견된 에티오피아 군인들 중 전장에서 사망한 사람들의 숫자이다. “2016년에 에티오피아에 가서 그곳의 참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거기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커피 껍질 볶은 물을 가지고 한 끼를 때워요. 한 달에 3만 원만 후원하면 아깝게 죽어갈 한 생명을 살릴 수 있어요. 그래서 아이디어를 낸 게, 제 나이쯤 되면 주위에서 결혼 주례를 서달라는 요청이 많이 들어오거든요. 그러면 주례를 무료로 서줄 테니 에티오피아 아동 한 명과 후원 결원을 맺어달라고 부탁하는 거죠.” 그렇게 주례를 서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57쌍의 주례를 섰고 57명의 후원 결연을 이끌어냈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이 결혼을 잘 안 하려 해서 걱정이라면서 그는 사석에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에티오피아 아동 후원 결연 이야길 꺼내며 홍보한다고. “정확하다는 것은 ‘실력이 있고 책임감이 있다’는 말과도 상통합니다.어머니가 저에게 가르쳐주신,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바로 신용과 책임감이에요.”남을 돕는 일이 곧 인생을 잘 사는 길 과거 가정 형편이 너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연예계 진출을 꿈꾸던 시절, 그는 부산에 내려와 1년가량 초량, 남포동 등지에서 음악다방 DJ와 서빙 일을 하면서 지냈던 적이있었다. 불 꺼진 음악다방에서 의자를 붙여 새우잠을 자며 어렵게 연예인의 꿈을 이루기위해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기에, 큰 성공을 거둔 뒤에도 과거 자신처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그가 지금 나이가 되어 인생을 어떻게 해야 잘 사는 것인지 깨달은 바가 있다며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이야길 들려주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사회복지기관과 인연을 맺어 좋은 일을 시작해보세요. 남을 도와주면 그 사람이 당신이 잘 되라고 기도해줄 거예요. 그러면 당신이 잘못된 길로 갈 일도 없을 것이고 나이를 많이 먹었다고 해도 당황해하거나 공허함을 느낄 일도 없을 거예요. 이건 제 경험에서 나온 얘기입니다.”

일본 규슈올레 ②
여행다운 여행의
묘미를 찾아서

글·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규슈의 허리를 지탱하는 구마모토 현에는 소년 장군 아마쿠사 시로에 대한 지역민들의 흠모와 슬픈 역사의 현장을 만날수 있다. 단풍나무가 찬란한 빛을 발하는 유자쿠 공원을 거닐며 계절의 변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만끽해보자.규슈의 속살을 느낄 수 있는 구마모토 제주올레와 규슈올레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는 ‘연속적’이고 후자는 ‘단속적’이라는 점이다. 하나의 길로 모두 이어져 있는 제주올레는 차량 이용이 전혀 불필요한, 이를테면 트레킹만으로 제주를 한 바퀴 돌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코스이다. 반면, 규슈올레는 18개 코스가 섬 전체에 각기 따로따로 분산되어 있다. 한 코스를 걷고 나면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다음 코스로 이동해야만 한다. 오로지 걷기만이 목적이면 단점일 수도 있겠으나 ‘여행다운 여행’의 묘미를 고려하면 오히려 장점이 되기도 한다. 규슈나 규슈올레 여행이 처음인 경우는 대개 후쿠오카현에 국한되는 경우가 많다. 이동 시간의 제약 때문이다. 규슈가 초행길이 아니면서 규슈의 속살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7개 현 중 구마모토가 접근성이나 의미 면에서 적격일 것이다. 규슈의 허리를 지탱하는 구마모토현에는, 아마쿠사라는 성씨에 이와지마, 마츠시마, 레이호쿠라는 각각의 이름을 가진 3개의 자매 코스가 있다. 일본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농민 봉기였던 시마바라 사건의 흔적과 자취들을 공통적으로 품고 있는 코스들이다. 봉기의 주동자였던 16세 소년 장군 아마쿠사 시로와 초기 기독교인들의 박해에 관한 슬픈 이야기들이 3개 코스 곳곳에 스며져 있다.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의 천인총 안내판360도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파노라마 규슈 서해안 시마바라 반도 앞에는 여러 개의 섬들이 모여 있는데 이 다도해 지역을 아마쿠사라 부른다. 이 섬들 중 세 곳에 올레 코스가 있는데 그들 중 하나가 아마쿠사(天草) 이와지마(維和島) 코스이다. 코스 초반의 조조 항은 에도 막부 시절 시마바라 반란 사건의 주동자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비운의 삶을 마친 소년장군 아마쿠사 시로의 고향이다. 농민 4만 명이 가담했고 막부군 수십만 명이 진압에 참여했던, 일본역사 최대의 농민봉기 사건이었다. 이와지마 코스 전체에 소년 장군에 대한 후세 고향 사람들의 흠모가 스며있음을 느낄 수 있다. 코스의 하이라이트인 다카야마 전망대는 해발 170m에 불과하지만 이 섬에선 제일 높은 산에 위치한다. 360도로 펼쳐지는 다도해의 파노라마가 장쾌하다. 호카비라 자연 해안을 걷는 30여분 동안은 태곳적 원시 바다의 모습이 이러했으리라 상상된다. 아마쿠사에는 두 개의 큰 섬이 인접해 붙어 있다. 동쪽으로는 내륙에 면한 가미시마 섬, 서쪽으로는 동지나해에 면한 시모시마 섬이다. 아마쿠사 마쓰시마 코스는 가미시마 섬의 북쪽 산악지형을 서에서 동으로 잇는다. 시작점인 치쥬 마을 버스정류장에서 논밭들 사이를 지나 산길로 접어들면 얼마 후 해발 233m의 정상 센간노모리다케에 이른다. 역시 360도 파노라마에 한쪽은 다도해요, 반대편은 드넓은 논밭이 펼쳐졌다. 조금 내려오고 다시 잠시 오르면 센간잔이다. 소년 장군 아마쿠사 시로가 농민군 대장들을 모아 국자로 술잔을 돌리며 격려했던 출정식 자리다. 산을 내려와 관광호텔 미사키테이를 지나 마쓰시마 전망대에 이르면 다시 시원한 다도해가 펼쳐진다. 이 섬과 마에지마 섬을 잇는 빨간색의 멋진 대교도 인상깊다. 코스의 종점은 마쓰시마 온천 ‘용의 족탕’이다. 용의 머리에서 흘러나오는 온천물에 발 담근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물론 무료다. 아마쿠사(天草) 레이호쿠(苓北) 코스는 아마쿠사의 서쪽 시모시마 섬의 북단에 걸쳐 있다. 도미오카 항을 출발하여 도미오카 성으로 올라서는데, 400년전 소년 장군 시로가 막부 진압군과 결전을 벌였던 이 성에는 당시의 소년 장군 면모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전시되어 있다. 웅장한 도미오카성이 새하얀 성벽과 주변을 둘러싼 숲 그리고 파란하늘과 바다에 극명하게 대비되어, 내려오는 내내 뒤를 돌아보게 된다. 평지로 내려와 섬의 내륙으로 들어서면 ‘천인총’을 만나는데 시마바라 난 당시 참수된 천주교도 천 명 중 330여 명의 수급을 모아 한데 매장한 곳이다. 이국의 아픈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코스다. 아마쿠사 레이호쿠 코스 후반의 산 정상구마모토 현의 우시부카 항 미야자키 현의 다카치호 코스 전경 자연산 정원의 고요함, 유자쿠 공원 규슈 7개 현 중에서 후쿠오카 동쪽으로 인접한 오이타 현도 추천할 만한 여행지다. 특히 온천 여행도 겸하고 싶다면 더 할 나위가 없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벳푸 온천과 유후인 온천이 모두 이 지역에 해당한다. 오이타 현에는 원래 3개의 올레 코스가 있었는데, 고코노에 야마나미 코스는 환경과 안전 등의 이유로 2020년에 폐쇄되었다. 남은 두 곳 중 하나인 오쿠분코(奧豊後) 코스는 규슈올레 원년에 개장되었으니 벌써 1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오이타역에서 1시간 넘게 걸리는 무인역 아사지역에 내리면 코스 출발점이다. 일본의 전형적인 농촌 마을을 지나면에도시대 이곳 영주에게 막부가 별장 정원으로 하사했다는 유자쿠 공원을 관통한다. 수백여 그루의 단풍나무와 벚꽃이 만발한 거의 완전한 자연산 정원 속을 고요하게 걷는다. 우리말로 보광사로 읽히는 절, 후코지에는 절벽 같은 암벽에 20m 높이의 거대 석불이 새겨져 있어 눈길을 끈다. 규슈에서는 최대 크기의 마애석불이다. 이 코스의 하이라이트는 오카 산성 터다. 에도 시대에 난공불락으로 지어졌다는 산성이지만, 지금은 성벽 사이사이에 돌이끼만 잔뜩 끼었고, 성벽 위에는 건물 등의 흔적은 전혀 없는 공터이다. 성이 상당히 높게 쌓여져 있고 한쪽은 완전한 절벽이다. 무심코 가까이 갔다가 위험 표지 하나 없는 천길 낭떠러지 성벽에 식겁할 수 있다. 멀리 아소산 등으로 잘 이어진 거대 산맥의 정경이 매우 장쾌하다. 성 아래로 내려오면 다케다 마을이다. 옛날에는 작은 교토라고도 불렸다고한다.오이타 현 오쿠분코 코스의 유자쿠 공원오이타 현의 오쿠분코 코스 초입 / 가고시마 현의 이브스키 가이몬 코스 종반 지점 가고시마 현의 기리시마 묘켄 코스 종반 지점

위기 탈출의
구원투수,
비상용 라디오

글_ 박헌균 ㈜솔라리노 대표,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책임연구원과거에는 사람들이 라디오로 뉴스를 많이 들었지만 요즘은 라디오 대신 휴대폰으로 뉴스를 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재난과 재해 상황에서 휴대폰이 터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까? 적정기술로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는 라디오가 해답이 될 수 있다.재난·재해 시 가장 필요한 건 라디오 해마다 태풍과 수해 등 각종 재난과 재해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핸드폰에서 재난 문자알림이 너무 자주 울려서 귀찮게 느끼는 사람들까지도 있을 정도인데요. 만약, 정말 엄청나게 큰 재난이 일어나서, 주변의 휴대폰 기지국까지도 망가진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꼭 기지국이 파괴될 정도의 재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한 장소에 휴대폰을 쓰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리면, 통화가 일시적으로 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때, 재난을 당한 미야기현 주민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였더니, 재난 환경에서 정보를 얻는 데 가장 도움을 주는 매체로 라디오를 꼽았다고 합니다. 라디오는 비교적 간단한 장비로 방송을 송출할 수 있어서, 해당 지역을 대상으로 임시로 재해 방송을 내보내기 용이합니다. 또한, 수신자 입장에서도 라디오 수신기는 가볍고 저렴하며 에너지도 많이 소모하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사진1. 1962년에 발표된 깡통과 쓰레기로 만든 라디오 프로토타입 깡통과 쓰레기를 이용해 만든 라디오 최근에도 근해에서 지진이 발생하기는 했지만, 인도네시아도 화산과 지진 등의 자연 재해가 많은 나라인데요. 오스트리아의 디자이너이자 교육자인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은 인도네시아 발리 섬에서 자연 재해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접하고, 주민들을 도울 수 있는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아주 낮은 가격의 저렴한 라디오를 개발했다고 합니다. 1962년 빅터 파파넥과 그레고리 시거스(Gregore Seegers)가 발표한 깡통으로 개발한 9센트짜리 라디오 프로토타입(사진1)을 한번 봐주시기 바랍니다. 깡통 입구에 철사를 감고, 케이블과 안테나를 연결하는데, 깡통 속에 쓰레기나 동물 배설물 등을 태워서 나오는 열로 유도전류를 발생시켜서 전파를 수신한다고 하네요. 라디오 주파수를 하나만 잡을 수 있다는 단점이 있지만, 방송 주파수가 하나밖에 없는 곳이라면 쓸모가 있겠지요. 물론, 이보다도 현대적인 비상용 라디오도 있습니다. 영국의 라이프라인 에너지(Life Line Energy)에서는 손잡이로 발전기를 돌리거나 태양전지를 연결해서 전력을 공급하는 라디오(사진2)를 개발했습니다. 제품에 따라서, 비상용 조명이나 충전 배터리로 쓸 수도 있습니다. 사진2. 영국의 라이프라인 에너지에서 개발한 비상용 라디오 스마트폰을 라디오로 활용하는 방법 21세기에 대한민국에서 사는 우리는 어떨까요? 요즈음에는 스마트폰의 보급으로, 굳이 라디오를 따로 갖고 있지 않는 사람도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대로, 재난 사태에 대비할 라디오가 필요할 수도 있는데요. 이런 경우에는 스마트폰을 비상용 라디오로쓰는 방법도 있습니다. 원래 대부분의 스마트폰 통신 칩에는 라디오 수신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많이 안 써서, 제조사에서 아예 라디오 기능을 차단해 둔 경우도 있으니 확인이 필요합니다. 제가 쓰는 안드로이드폰의 경우(갤럭시 노트20), 유선 이어폰 줄을 안테나 역할로 쓰기 때문에 C-type 유선 USB 이어폰을 연결하고, ‘라디오’ 앱을 검색해서 사용해 보니 잘 되는군요. 다만, 인터넷 정보를 검색해보니, 유선 이어폰이라도 정품이 아니면 모델에 따라서 안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하니, 복잡한 것을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그냥 재난 대비 비상용 소형 라디오를 준비해두는 것이 편할 수도 있겠네요. 아무쪼록, 모든 분들이 사고 없이 안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황후의 권세를 드러낸 탑 경천사지 십층석탑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후기 충목왕 때 조성된 석탑으로 기존의 신라계 석탑과는 달리 화려한 양식을 자랑하는 특이한 석탑이다. 이 탑에는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까지 된 기황후의 기세등등했던 권세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데, 어떤 연유인지 자세히 살펴보자.약탈에서 반환까지, 사연 많은 탑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하려고 왔다가 경천사지 석탑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개성으로 가서 이 탑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후, 그는 황태자가 이 탑을 자기에게 하사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가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인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7일자 논설을 통해 다나카의 석탑 약탈을 폭로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 대변지 ‘재팬 메일’이 해당 논설은 거짓이라며 석탑 약탈을 부인하였다. 당시 헤이그 특사를 준비하던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해 개경 경천사에 가서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해당 주민의 증언을 인터뷰하였다. 이후 ‘재팬 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 이 석탑 약탈 사건에 대해 기고했고, 일본이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등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조선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들끓자 일본은 마지못해 10년 후인 1918년이 되어서야 석탑을 반환했다. 이 석탑은 그 뒤 오랫동안 경복궁 근정전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년 재건에 착수하여 1960년 완공되어 경복궁에 전시되었다. 1980년대 경복궁 복원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1995년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작업을 거친 뒤, 2005년부터는 신축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실내에 전시되고 있다.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다. 섬세한 솜씨로 빚어낸 뛰어난 걸작 일본인들이 그렇게 탐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의 다른 일반적인 석탑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원나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외래 요소와 고려 전통적인 불탑 양식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흔치 않은 재료인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석탑이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목조 건축물처럼보인다. 그리고 석탑의 모든 면에 불회도(佛會圖), 부처, 보살 등이 빠짐없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의 예술성 또한 뛰어난데, 석탑이 무른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섬세한 조각이 가능했다. 조각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서부터 기단부 1층에는 사자, 용, 연꽃이, 기단부 2층에는 당(唐)의 현장(玄奘) 법사가 구법을 위해 서역에 다녀오는 서유기(西遊記) 내용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으며, 기단부 3층에는 서유기 장면과 나한상이 새겨져 있다. 서유기 조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상으로 원에서 희곡으로 공연되던 현장의 취경설화(取經說話)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탑신에 새겨진 불회도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다.”라고 기록하였고, 채수는 “더할 수 없이 정교(精巧)하여 인력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원나라 기황후와의 깊은 인연 특히 탑 1층부에는 원나라 황제, 기황후,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만수무강과 원나라의 만세불변을 기원하는 글이 있는데, 당시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까지 된 기황후와 그녀를 둘러싼 권력가들의 권세를 잘 보여주는 예라서 흥미롭다. 당시 중국은 원의 순제(順帝)가 집정하던 시기였는데, 순제의 부인이 바로 고려인 기 씨였다. 순제의 후계자로서 그녀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기 씨는 기황후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중국의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고려에서는 기 씨 일족과 이에 부응하는 친원세력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원의 탈탈 승상이 경천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진령군(晉寧君)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다가 이 탑을 만들었다는 말이 세간에 전해진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경천사에 탈탈 승상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탈탈은 석탑을 건립하고자 원의 기술자를 고려에 보냈으며, 탈탈의 인척인 강융이 실무를 주도했다. 그런데 탈탈은 기황후의 아들인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자신의 집에서 기를 정도로 사적으로 기황후와 친밀하였으며 사재를 바쳐 태자의 축원을 비는 사찰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그는 원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고려에 있는 경천사에도 석탑을 건립하였다. 개경에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경천사에 원의 번영과 원나라 황제, 기황후, 황태자 등의 천수만세를 기원하는 석탑이 세워진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석탑 탑신에 새겨진 불회도(佛會圖) 기단부 3층까지는 티베트·몽골의 영향이 뚜렷하다.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아름다움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특수형의 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아(亞)자형의 사면 돌출형의 평면과 다포식 조영 등이 그 이유가 되고 있으며, 조선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세조(世祖)는 불교를 옹호하여 원각사(圓覺寺) 창건을 통하여 조선 건국 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세조는 원각사 창건에 큰 의미를 부여한 만큼 원각사에 최고의 석탑을 만들고자 했다. 이에 가장 아름다운 석탑 모델로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선택하여 탑의 재료부터 구조, 조각까지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유사한 형태를 가진 두 기의 석탑이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