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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뿐인 인생이기에
가수 김연자

대한민국 트로트의 여왕, 가수 김연자는 절대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 오로지 앞만 보면서 ‘블링블링’ 빛나는 삶을 준비하며 살아왔다고 말한다. 지난해 10월 28일 2021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영예로운 대통령 표창을 수상한 후로 더욱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를 만나보았다.  블링블링, 제2의 인생 시작 지난 2013년 가수 김연자는 오랜 일본 활동을 접고 국내에 돌아와 ‘아모르 파티’라는 곡을 발표했다.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정통 트로트를 부르던 그가 돌연 전자댄스음악(EDM)을 들고 나왔으니 화제가 될 법도 했다. 하지만 장르가 생소해서 그런지 처음에 대중들은 그 곡을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닌 게 아니라 처음 작곡가 윤일상 씨에게 그 곡을 받았을 때 김연자 씨도 당황했다고 한다. “‘아모르 파티’를 처음 들었을 때는 당황했었요. 이질감도 있었고 도대체 어떤 노래인지도 모르겠고 부르기 어려워서 힘들었습니다. 어렵게 겨우 녹음은 했고 앨범을 냈지만 처음엔 호응이 없었죠.”그러다가 서서히 인기를 얻어가더니 4년 만에 역주행에 성공했다. 트로트에 관심 없던 젊은 층도 이 노래에 열광하였고, 급기야 트로트 가수로는 최초로 대학 축제에까지 초청받아 공연도 했다. 어려운 노래였지만 결국 도전하길 잘했다며, 자신에게 제2의 인생을 살게 해준 뜻깊은 노래라고 그는 밝혔다. 또한 이 곡을 통해 시니어들이 젊은 층과 함께 소통할 수 있는, 세대 간의 가교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스스로 큰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이러한 노력들이 인정받아 그는 지난해 2021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에서 영예로운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에 그는 “앞으로 더욱 열심히 좋은 노래로 여러분들게 보답하라고 주신 상이라 생각하고 한층 더 열심히 하는 김연자가 되겠다”고 다짐했다. _대통령 표창을 받은 가수 김연자후회할 시간에 차라리 내일을 꿈꿔라 김연자는 올해로 데뷔 48주년을 맞이했다. 우리나라와 일본 양국에서 최고 가수의 반열에 올랐고 북한 평양에서도 공연을 했던 전설적인 존재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는 고난과 역경도 적지 않았다. 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은 적도 있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저도 많은 우여곡절과 슬럼프를 겪으며 살아왔어요. 하지만 전 절대 과거를 돌아보지 않으리라 생각했어요. 항상 앞만 보고 살았던 것 같아요. 뒤를 돌아봐서 후회할 시간이 있으면 그 시간에 차라리 내일을 기대하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것이 더 나아요.”자신의 노래 ‘블링블링’에도 그와 비슷한 심정을 담았다며 그 노래의 가사를 소개했다. “한 번뿐인 인생. 나를 더 사랑하며 살 거야. 더 많이많이 행복하고 싶어. 이렇게 하루하루 블링블링.” 이어서 그는 현재 코로나19로 많은 분들이 힘들어 하시는데, 어려우시더라도 과거에 치우치지 마시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준비하셔서 희망찬 내일을 꿈꾸며 살아가시길 바란다고 전했다. “두 번 강조해도 모자라지만 건강이 제일 큰 자산입니다. 이런 시기일수록 모두 부지런히 운동하시고,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셔서 몸과 마음이 건강한, 진정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영혼의 단짝을 만나다 지난해는 그는 동거 중인 약혼자와 결혼을 하려 했으나 오미크론 확산 때문에 뒤로 미뤘다. 모든 분들이 힘들어 하는 때 결혼을 하는 게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사람을 참 들뜨게 만들고 행복하게 해주는 것같아요. 그런데 지난해에는 시기가 너무 안 좋았잖아요. 저희들은 이제 나이도 먹었고 어느 정도 기다릴 수 있는 입장이기 때문에 코로나19 사태가 진정되고 세상이 좀 좋아졌을 때 결혼식을 올릴까 합니다. 아마 올해는 할 수 있으려나요?(웃음)”예비신랑은 현재 그의 소속사 대표이며 1980년대 처음 만났다. 광주의 음악학원에서 같이 노래를 배우며 우정을 쌓아왔다고 한다. 이후 오랫동안 각자 자신의 삶을 살다가 재회했을 때는 그냥 가끔씩 인사만 하는 관계였다. 그러다 김연자가 여러 가지 일로 힘들어 할 때 그가 많은 도움을 주었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까지 약속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약혼자에 대해 깊은 신뢰와 애정을 드러내며 추켜세웠다. ‘자신이 활동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는 분이며, 결혼을 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변함없이 자신을 사랑해줄 분’이라고 말한다.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지난해 김연자는 ‘블링블링’에 이어 ‘쑥덕쿵’이라는 후속곡으로 활동하며 전국 투어에 집중하고 싶었으나 코로나19가 다시 확산되는 바람에 모든 콘서트 일정이 연기됐다. 다행스럽게도 올해부터는 2022년 김연자 전국투어 콘서트가 5월 7일 전주를 시작으로 5월 14일 수원시, 6월 18일 고양시에서 열리는 것으로 일정이 준비되어 있다. 그는 어서 팬 분들을 만나고 싶어서 그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며 많은 기대와 성원을 부탁드린다고 전했다. “제 곡, ‘아모르 파티’ 가사처럼 ‘나이는 숫자, 마음이 진짜’예요. 저도 주변에 어리기만 했던 조카들이 어느새 결혼한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월이 참 빠르다는 생각이 들어요. 하지만 나이는 진짜 상관없어요. 자기 가슴이 뛰는 대로 행동하세요. 한 번뿐인 인생이니까 소중하고 아름답게 보내셨으면 좋겠어요. 제 콘서트에 와서도 나이를 잊고 신나게 뛰어 놀고 즐기세요. 그런 게 최고의 행복이지 않을까요.”한편 올 하반기에는 많은 분들이 기다려왔던 신곡을 다시 내놓으면서 TV에서도 자주 인사드릴 예정이다. 여러 모로 2022년은 김연자에게 바쁜 한 해가 될 전망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부산은행 고객들을 위해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다.“코로나19 장기화로 우리 삶의 많은 부분들이 변화됐습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직·간접적인 피해도 많이 보았지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노력했기 때문에 코로나19도 이제 마지막 고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이 고비를 잘 극복하여 코로나19 이후에 맞이하게 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차고 값진 인생을 기다리며 조금만 더 힘내시길 바랍니다. 저는 부산은행과 함께 항상 곁에서 여러분을 응원하고 격려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선, 맑은 바람
김동식

사진 제공_ 김동식 선자장 선풍기, 에어컨 바람 속에 잊힌 줄 알았던 전통 부채의 멋과 기품을 꾸준히 지켜나가는 사람이 있다. 66년째 줄곧 수작업으로 합죽선을 만들어온 김동식 선자장에게서 장인정신의 진정한 의미를 배워본다. 혼과 풍류가 깃든 공예 작품 대나무를 종이처럼 얇게 깎아 맞붙여서 부챗살을 만든다. 변죽에는 인두로 문양을 그려 넣거나 거북이 등껍질을 얇게 떠서 붙이거나 나전을 붙여 옻칠을 하는 등 화려한 치장을 한다. 풀을 입힌 부챗살에 미리 재단해 접어놓은 한지를 붙이고 손잡이에는 사복이라는 장식을 박으면 하나의 부채가 탄생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합죽선은 과거 사대부나 임금만 소장할 수 있었던 귀중품이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28호인 김동식 씨는 전통 합죽선의 명맥을 잇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선자장(扇子匠)이다. “현대의 부채가 화려함에 치중했다면 합죽선은 절제된 멋이 있고 선이 매우 아름답습니다. 대나무로 만들어 손에 착 감기는 맛도 있죠, 접었다 펼칠 때 나는 소리도 남다릅니다. 소리꾼들은 그 소리를 하나의 장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에 소리가 좋은 합죽선을 애용합니다.”그는 이처럼 합죽선이 바람을 일으키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선인들의 혼과 풍류가 깃든 아름다운 공예 작품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_황칠백접선, 74˟40cm, 50살, 황칠한지, 흑단, 낙죽 엎친 데 덮친 격의 고난을 뚫고 김동식 선자장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려웠다고 한다. 당시 외갓집은 부유한 편이라 삼시 세 끼를 해결하기 위해 외가에 들어갔다. 외할아버지(고 라학천 선자장)는 고종황제에게 합죽선을 진상할 정도로 기술이 뛰어난 선자장이었다. 그는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외할아버지와 외삼촌들에게 부채 만드는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열네 살 때부터 했으니 벌써 이 일을 66년째 하고 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부채는 생활필수품이었지만 선풍기, 에어컨 등이 보급되면서 부채도, 부채를 만드는 선자장도 점점 사라져갔다. 게다가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형편이 더욱 어려워지자 그는 부채 만드는 일을 그만두려고까지 했다. 하지만 친구가 “왜 좋은 기술을 버리려 하느냐, 계속 하라”고 격려하며 당시로서는 큰돈을 빌려준 덕분에 전통 부채의 명맥을 계속 이을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함께 부채를 만들던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생활고로 그만두기도 하고 돌아가신 분도 많다. 옛날에는 1년에 800개 정도 만들던 부채를 지금은 250개 정도밖에 못 만든다. 이는 전통 합죽선 만드는 일이 상당히 어렵기 때문이기도 하다.“일본과 중국의 부채 기술자들도 합죽선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공부를 해보겠다고 찾아왔으나 모두 ‘이건 쉽게 따라할 일이 아니다’라고 손사래 치며 돌아갔습니다.” _ 대나무의 속대를 깎아내는 작업을 하고있는 김동식 선자장 _ 속대를 깎아낸 부챗살을 확인중인 김동식 선자장 모든 것을 다 바쳐 걸어온 길  조선시대에 부채를 만들던 선자청에서는 분업화가 이루어졌지만 현재 김동식 선자장은 모든 공정을 혼자서 해낸다. 합죽선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 과정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초록빛이 도는 대나무 겉껍질을 잘라서 양잿물에 30~40분간 삶아 말리면 노란색이 드러난다. 이 대나무의 속대를 깎아내 0.3mm 두께로 빛이 투과될 만큼 얇게 살을 만든다. 사십선의 경우 양쪽 변죽을 제외하고 부챗살 76조각을 맞붙여야 한다. 이때 사용하는 풀은 민어 부레를 끓여 만든 ‘어교’와 동물 가죽, 힘줄, 뼈를 고아 만든 ‘아교’를 섞어 사용한다.풀로 붙인 부챗살을 단단히 묶어 일주일 정도 말린 다음, 손잡이 부분인 ‘등’으로 사용할 재료를 깎고 다듬는다. 여기에 재단한 한지를 붙이면 부채가 완성되나, 이 외에도 등과 변죽에 어떤 재료를 사용하고 어떤 문양을 새기는지, 한지에는 황칠을 하는지, 옻칠을 하는지, 아니면 한지 대신 비단을 붙이는지 등에 따라 다양한 공정이 더 들어간다. “조선시대 사대부의 풍류와 멋은 바로 이 합죽선을 얼마나 사치스럽게 꾸미느냐로 판가름됐습니다. 변죽 재료로 거북이 등껍질을 얇게 떠서 붙이거나 나전을 붙여서 마무리했는가 하면, 한지에 금빛의 황칠을 해서 시간이 갈수록 더 깊고 은은한 빛을 내게끔 하기도 했습니다.”특히 황칠액은 작은 병 하나가 4백~5백만 원의 고가이다. 황칠을 하면 부채 한 개당 15~16만 원어치의 재료값이 더 드는 셈이라고 한다. 더구나 옛날에는 ‘등’의 재료로 요즘은 구하기도 힘든 상아를 사용하기도 했다 하니 그 호화로움은 상상을 뛰어넘는다. _천연염색선, 54˟30cm, 40살, 천연염색한지, 흑단, 낙죽 _쪽물염색선, 54˟30cm, 40살, 쪽물염색한지, 우족, 낙죽모든 것을 다 바쳐 걸어온 길 부채 하나 만드는 데 최소 150번의 손길이 가야 한다는 고단한 작업. 끈기와 인내심이 없으면 도저히 해낼 수 없다. 대나무 껍질은 부서지기 쉬워 기계 사용은 꿈도 못 꾸고 모든 공정을 오로지 수작업으로만 해야 한다. 기능뿐만 아니라 아름다움도 중요하다. 이렇게 온갖 정성과 혼을 다 바쳐서 만드는 합죽선이기에 그는 지난 2007년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선자장으로 지정된 데 이어 2015년 국가무형문화재 첫 번째 선자장으로 지정될 수 있었다. “장인은 헛된 생각을 하면 안 돼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합니다. 고집과 오기로 한번 밀어붙이면 끝을 내야 하는 것이 장인정신입니다.” 김동식 선자장의 아들인 김대성 이수자는 5대에 걸쳐 합죽선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 곁에서 일을 배워왔다. 여러 공정 중 하나라도 허투루 하면 안 된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이어받아 정직하고 부지런하게 장인의 길을 걷고 있다. 어떤 때는 부채의 대중화를 고민하며 전통 부채와는 조금 다른 형태를 시도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합죽선은 언제나 본질로 돌아올 때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그 본질은 절제된 멋과 아름다운 선에 있다. 자연에서 비롯된 대나무와 종이가 만나 맑은 바람을 일으키는 전통 부채. 그 정갈한 아름다움과 청량한 기품을 지키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의 소중한 전통은 오늘날에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_백접윤선(흰색), 50˟82cm, 50살, 한지, 화덕나무, 낙죽, 백동사북 _백접윤선(검정), 50˟82cm, 50살, 염색한지, 낙죽, 백동사북

종이는 숲이다

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한 해 동안 인쇄용지를 만드느라 잘려 나가는 나무는 700만 그루이다. 종이봉투가 비닐봉투보다 더 친환경이라는 인식이 무색해지는 지점이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대하는 종이가 곧 우리가 지켜야 할 소중한 숲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종이로 둘러싸인 우리의 일상 울진과 삼척 산불은 213시간 동안 여의도 면적의 72배를 태우고 나서야 진화되었습니다. 사라진 숲도 숲이지만 숲에 깃들어 살던 동물들은 어찌 되었을까요? 산불이 나면 우리는 인명 피해와 재산상의 피해만 집계할 뿐 정작 그곳의 주인인 동물의 피해를 헤아리진 않는 것 같아 더 안타깝습니다. 산불이 아니어도 숲은 계속 사라지고 있어요. 매 순간. 하루도 나무를 만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까요? 아침에 현관문을 여니 새벽 배송된 택배가 있습니다. 종이박스를 열고 배달된 물건을 꺼냅니다. 출근길 전철역 앞에서 나눠주는 헬스클럽 전단지를 받아 쓰레기통에 넣고 화장실에 들어가 휴지를 사용하고 손을 씻고는 종이 타월로 닦습니다. 점심 식사 후엔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들고 근처 공원에 잠시 들러 볕 좋은 햇살을 즐깁니다. 저녁엔 친구와 공연을 보러 가기 전에 종이 박스 안에 종이로 감싼 샌드위치를 먹고 공연장 입구 티켓 박스에서 예약번호를 입력하고 종이 티켓을 발급받습니다. 이처럼 종이로 만든 수많은 물건이 우리 일상 곳곳에 스며들어 있습니다. 콘크리트 빌딩 숲에 사는 줄 알지만 사실 숲에 살고 있었던 거였어요. 수많은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을 소비하는 우리는 나무꾼인 셈입니다. 종이를 만들기 위해 쓰는 나무 양은 한 해 벌목되는 나무의 42%가량이라고 해요. 종이가 친환경적이라는 착각 흔히 비닐봉지는 반환경적인 물건이고 종이 가방은 친환경이라 인식하는 경향이 있어요. 플라스틱 빨대가 바다로 떠밀려가 바다거북을 비롯한 해양 동물이 피해를 보는 사례가 알려지면서 종이 빨대가 대안으로 떠오르기도 했으니까요. 그런데 비닐봉지가 종이봉투의 대안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1959년 스웨덴 공학자인 스텐 구스타프 툴린이 비닐봉지를 처음 궁리해 낸 사람인데요. 종이봉투를 만드느라 수많은 나무가 베어지는 걸 해결하려 비닐봉지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해요. 가볍고 오래가는 비닐봉지를 몇 번이고 재사용한다면 종이봉투보다 훨씬 친환경일 거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1980년대 이후로 비닐봉지가 본격 쓰이게 된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었지만 현실은 툴린의 예상과는 완전히 어긋나버렸습니다. 가볍고 오래가는 비닐봉지가 가격마저 너무나 쌌으니 두 번 사용할 필요가 없었던 거지요. 1990년대부터 폐플라스틱이 해양을 오염시킨다는 보고가 나오면서 비닐봉지의 부작용이 부각되기 시작했어요. 비닐봉지의 대안으로 다시 종이봉투가 떠오르는 건 여러 가지로 불편합니다. 무엇보다 제지산업을 알고 나면 종이가 결코 친환경일 수 없거든요. 제지산업에는 물이 많이 쓰입니다. 종이 한 장을 만들려면 머그잔 한 잔의 물이, 책 한 권을 만들려면 욕조를 가득 채운 300리터의 물이 필요합니다. 펄프를 염색해 하얀 종이로 만들려면 표백이 필요하고 그 과정에 많은 화학약품과 첨가제가 들어갑니다. 이런 이유로 제지산업은 석유화학, 철강, 시멘트에 이어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산업입니다. 한국제지연합회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1년에 약 970만 톤의 종이가 사용되는데 이 가운데 절반 이상이 물건 포장용과 인쇄용지로 쓰였습니다. 택배 상자는 내용물만 꺼내고 나면 곧장 쓸모가 사라지니 더욱 아까운 쓰레기입니다. 택배를 줄이는 것 말고 달리 방법이 없을까요? 택배 상자를 잘 모아서 우체국이나 편의점 등 택배 상자가 필요한 곳에 가져다주는 건 어떨까요? 인쇄용지도 다르지 않아요. 전체 소비량의 45%가 곧장 쓰레기통으로 버려진다고 해요. 한 해 동안 인쇄용지를 만드느라 잘려 나가는 나무가 700만 그루인데 이 가운데 315만 그루는 단 한 번 사용하기 위해 베어지는 셈입니다. 한 환경단체는 식목일 전날을 ‘종이 안 쓰는 날’로 만들었어요. 나무를 아무리 심은들 종이로 사라지는 숲을 생각하면 그 마음이 이해가 가고도 남습니다. _종이를 생산하고있는 공장모습 티슈 대신 손수건, 제로 상점도 이용하자 종이 소비를 아예 안 할 수는 없지만 줄여볼 수는 있겠지요. 제 경우는 손수건을 3장 가지고 다닙니다. 하루에 3장이면 종이 타월을 쓰지 않고도 충분하더라고요. 종이컵은 내부가 폴리에틸렌으로 코팅돼 있어서 뜨거운 음료가 닿으면 내분비계교란물질이 녹아 나올 수 있으니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가능하면 머그잔이나 텀블러를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편의점이나 마트에서 물건을 사고 받는 영수증은 대부분 받자마자 쓰레기통에 버리지 않나요? 한 해 발급되는 종이 영수증이 우리나라에서만 128억 건이나 된다고 해요. 이 종이를 만들려면 나무 12만 그루를 베어야 합니다. 2022년 1월부터 정부는 마트에서 종이 영수증 대신 전자 영수증을 받으면 현금을 적립 받을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했어요. 마트, 백화점, 포장재 없이 내용물만 파는 제로 상점 등을 이용하면 회당 최고 2,000원까지 돌려받을 수 있다고 하니 이 제도를 잘 활용하면 종이도 아끼고 여러모로 좋을 듯합니다. 또 한 가지 방법은 분리배출을 제대로 해서 재활용률을 높이는 거지요. 종이라고 해도 우유 팩, 신문지, 잡지처럼 종류가 다양하기 때문에 구분해서 배출해야 합니다. 탁상달력처럼 스프링이 붙어있을 경우 스프링을 제거한 뒤 배출하고 세워두기 위해 딱딱한 종이와 속지가 서로 종이 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 역시 분리해서 배출해야 합니다. 우유 팩은 양면이 코팅되어 있어서 재생 종이로 만드는 과정이 일반 종이와 다르기 때문에 일반 종이류와 섞어 배출하면 코팅 비닐이 재활용을 방해합니다. 주스 팩이나 두유 팩처럼 멸균 팩도 종이와 함께 알루미늄이 섞여 있어서 종이류에 섞어 배출하면 역시 재활용을 방해합니다. 이렇게 따로 배출해야 하는 우유 팩이나 멸균 팩은 아파트에 분리 배출할 수 있는 별도 수거함을 설치해달라고 지자체에 요구하면 좋을 것 같아요. 이미 주민센터 등에서 수거를 하지만 우리 동네나 가까운 곳에 수거함을 설치해야 효과가 더 커지니까요. _재생 종이를 사용해 패스트푸드 용기를 만든 사례재생 종이로 1년에 27만 그루 나무를 심자 종이를 구입할 때 재생 종이를 선택하는 것도 숲을 지키는 방법입니다. 재생 종이는 한번 사용한 종이를 40% 이상 이용해서 만든 종이입니다. 나무를 벌목해 새 종이를 만드는 것보다 한번 사용한 종이를 재활용하는 것이 물, 에너지, 화학약품을 소비하는 공정을 줄일 수 있어서 나무를 덜 베는 것 이상으로 에너지가 절약됩니다.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는 인쇄용지 중 10%만 재생 종이로 바꾸어도 날마다 760그루의 나무를 덜 베게 된다고 해요. 1년이면 27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효과가 있습니다. 재생 종이를 찾는 소비자가 늘어나면 재생 종이 사용량도 증가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부터 재생 종이에 관심을 기울이면 어떨까요? 종이 안 쓰는 날의 핵심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순환입니다. 나무 한 그루가 온전히 숲의 일원으로 존재할 때 나무는 우리가 배출한 온실가스를 흡수하고 깨끗한 공기를 선물합니다. 더운 여름날 나무는 우리에게 시원한 그늘을 제공하지요. 새들이 깃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나무입니다. 종이를 덜 쓰는 만큼 이 많은 혜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원재료부터 착하게’
저개발국가 성장 돕는 공정무역

최근 세계적인 패션브랜드들이 중국 신장지구에서 소수민족인 위구르인들의 강제노동에 의해 면화가 생산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신장 면화 거부에 동참하고 있다. 이처럼 원재료의 윤리적 소비가 화두로 떠오른 지금, 공정무역에 대한 관심도 높아져가고 있다. 공정무역의 세계로 떠나보자. 개발도상국 생산자‧노동자 보호 위해 생겨나다국적기업 등이 개발도상국 생산자의 경제적 자립과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생산자에게 보다 유리한 무역조건을 제공하는 공정무역. 빈곤에 시달리는 개발도상국의 생산자와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생겨났다. 그 첫 시작은 1946년 북미 메노나이트교회가 푸레르토리코 노동자의 자수품을 거래하고 영국 빈민구호단체 옥스팜이 동유럽과 중국 난민들의 수공예품을 구매하는 것에서부터다. 국내에서는 2003년 아름다운가게가 네팔‧인도산 수공예품을 판매하는 것에서 시작됐다. 스타벅스‧롯데 등 기업 착한원두 판매 앞장공정무역은 시간이 흐르면서 발전을 거듭해 최근에는 많은 기업들이 공정무역을 통해 제품의 원재료를 생산하고 있다. 특히 커피에 대한 불공정무역이 전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이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제3세계 국가의 커피생산자들이 원두 1㎏를 팔고 받는 돈은 커피 가격의 200분의 1수준인 100원에 불과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이유는 엄청나게 세분화된 유통단계 때문. 커피 산지에서 수확한 원두가 소비자에게 커피 한 잔으로 도달하는 데는 최대 150단계의 유통단계를 거친다. 원산지 커피회사, 다국적 커피회사, 한국 생두수입사, 국내 커피회사 등의 중간과정을 거치면서 이익의 99%가 이들의 손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에 많은 커피기업들이 이를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세계적인 커피브랜드인 스타벅스도 이런 움직임에 동참했다. 스타벅스는 지난 2000년부터 공정무역 인증커피를 구매하여 현재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 28개국에서 공정무역 인증커피를 판매,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공정무역 인증커피를 유통 및 로스팅하고 있다. 스타벅스는 제3자 인증의 윤리 구매 프로그램인 C.A.F.E Practice를 통해 커피 품질은 뛰어나나 공정 무역 조합에 가입되지 않는 농가들에게 시세보다 높은 프리미엄 가격을 보장해 농가에도 정당한 이익이 돌아갈 수 있는 지속가능한 거래를 만들어 가고 있다. 소비자들은 스타벅스 매장에 가면 공정무역을 통해 생산된 원두를 살 수 있다. 국내기업 중에선 롯데GRS가 지난 2019년 국제 공정무역기구 한국사무소와 업무협약을 맺고 엔젤리너스에 공정무역 원두를 도입했다. 또 2020년에는 전국 롯데리아 매장으로, 2022년에는 크리스피크림도넛 130여 개 매장으로 확대했다. 한국, 공정무역 역사 짧지만 성장 속도 빨라커피 말고도 초콜릿, 설탕, 홍차, 면화(목화)와 같이 주로 저개발국가의 농민들이 재배하는 작물에 대해 공정무역이 이뤄지고 있다. 공정무역 제품은 생산자들에게 정당한 몫의 원료비를 제공하여 그들의 자립을 돕는다. 특히 5~10%의 공동체 발전 기금(공정무역 프리미엄, 소셜 프리미엄)을 지불하도록 되어 있어 훈련 및 장비 지원, 보건위생시설, 교육 시설, 도로 등 사회적 서비스 비용에 투자되면서 지역사회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소비자들이 공정무역 제품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할 이유다. 사실 한국의 경우 공정무역의 역사가 긴 영국, 독일, 미국에 비하면 공정무역 판매액은 그리 큰 편은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성장 속도는 빠른 편이다. 아름다운커피, 아시아공정무역네트워크, 아이쿱생협 등 국내 주요 공정무역 단체 12곳이 모여 2012년 설립한 한국공정무역협의회(KFTO)에 따르면 2018년 회원사들의 매출액은 189억 7,200만원으로 매출액이 매해 늘어나고 있다. 한국 공정무역의 희망이 보이는 대목이다.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한국의 공정무역. 저개발국가의 농민들이 한국 소비자들의 관심과 성원 속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그날을 꿈꿔본다.

최초의 은행이
신전이었다구요?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프란시스 베이컨은 “돈은 좋은 머슴이긴 하지만 나쁜 주인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돈 때문에 울고 웃었던 경험은 있기 마련. 이번 호에서는 돈과 관련된 단어들의 기원에 대해 알아본다. 신전의 탁자가 은행이 된 사연 은행을 영어로 뱅크(bank)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탁자’를 의미하던 고대 이탈리아어 방카(banca)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고대의 ‘탁자’가 오늘날 ‘은행’이 된 것일까요? 이에 대한 대답을 얻으려면 은행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최초의 은행은 4천 년 전 바빌로니아에 있었던 신전 은행이었다고 합니다. 이곳 성직자들은 사람들로부터 담보물을 받고 대출을 해주고 그 내용을 일일이 적어 신전 창고에 소중히 보관했다고 합니다. 당시 신전 은행 안마당에는 벽에 고정해 둔 의자와 탁자가 있었어요. 신전에 온 사람들은 거기에 앉기도 하고 자신이 가지고 온 담보물을 거기에 올려놓기도 했어요. 바로 이 의자나 탁자 위에서 거래를 한 것이지요. 그래서 ‘탁자’와 ‘은행’이 연결될 것이에요. 은행 이야기가 좀 더 하자면, 이후 성직자들은 군주나 상인에게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어요. 오늘날과 비슷한 민간 은행이 생겨난 것은 12세기 말이에요. 1193년 이탈리아 피콜로미니 가(家)는 토스카나 지방의 시에나(Siena)에 근대식 민간 은행을 세웠다고 해요. 시에나는 프랑스와 로마를 잇는 무역로에 있어서 은행업이 크게 발달할 수 있었다고 하네요. _고대 바빌로니아의 낭릴 신전. 이곳은 은행으로서의 역할도 겸했다. 산골 마을 이름이 ‘달러’가 되다 _‘달러’의 어원이 된 독일의 요하임스탈 마을 기차역과 달러‘돈’을 의미하는 머니(money)도 신과 관련이 있어요. 이 단어의 어원은 모네타(Moneta)인데, 모네타는 제우스의 아내 주노(Juno)에게 붙이는 칭호였지요. 고대 로마 사람들은 주노의 신전이나 그 근처에서 주조한 돈을 모네타라고 불렀어요. 이것이 후기 라틴어와 고대 프랑스어를 거쳐 13세기 말에 영어로 들어가 머니가 된 것이지요. 19세기에는 지폐를 포함한 모든 돈을 머니라고 불렀어요. 아무튼 이것을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들은 신을 내세워 고귀한 척하면서도 자신의 부를 추구했음을 잘 알 수 있어요. 오늘날 일부 교회나 절에서 막대한 돈을 축적하는 것을 보면 예나 지금이나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네요.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위력을 가진 돈은 달러(dollar)입니다. 흔히 달러하면 미국을 떠올리지만 이 단어 자체만 보면 독일을 떠올려야 합니다. 이 사실을 확인하려면 16세기 독일로 옮겨가야 하지요. 지금의 독일 동쪽 국경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야히모프(Jáchimov)라는 산골 마을이 있어요. 독일은 이 마을을 점령하여 요하임스탈(Joachimsthal)이라고 불렀지요. 여기서 탈(thal)은 ‘골짜기’라는 뜻이에요. 그런데 1516년 이곳에서 은광이 발견되었어요. 사람들은 이 은으로 동전을 주조하였고 거기에다 마을의 이름을 본떠 요하임스탈러(Joachimsthaler)라는 글자를 새겨 넣었어요. 얼마 후 사람들은 이 단어가 너무 길다고 여겼는지 그냥 탈러(thaler)라고 부르기 시작했지요. 이 단어가 북독일어 달러(daler)를 거쳐 1553년 영어로 들어가 달러(dollar)가 되었어요.돈을 갚아서 진정시키는 것이 ‘페이’오늘날 사람들은 ‘노동이나 서비스에 대해 지불한 돈’을 ‘페이(pay)’라고 불러요. 이 단어의 어원도 참 재미있어요. 페이의 어원은 ‘진정시키다’라는 의미의 라틴어 동사 ‘파카레(pacare)’입니다. 그렇다면 노동이나 서비스에 대해 지불한 돈과 페이라는 단어는 어떻게 연결된 것일까요? 중세에 페이는 ‘빚을 갚음으로써 채권자를 진정시키다’라는 의미로 쓰였어요.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돈을 빌릴 때는 빌려주는 사람이 갑(甲)이 되지만 일단 돈을 빌려주면 돈을 빌린 사람이 갑이 되지요. 대부분의 경우 채무자는 빚을 갚지만, 만약 채무자가 빌린 돈을 이런저런 이유로 못 갚겠다고 버티면 채권자는 진정하지 못하고 애가 탑니다. 이때 채무자가 빌린 돈과 이자를 지불하면 채권자는 비로소 마음을 놓고 진정하게 되지요. 아무튼 돈을 가지고 너무 애태우지 않는 그런 사이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Tip 돈에 대한 기타 재미있는 상식■ 왜 우리나라 돈은 ‘원’이라고 불리나요?‘원’은 1902~1910년, 대한제국에서 유통된 통화에 최초로 사용된 이름입니다. 동전의 모양이 둥근 데서 착안하여 둥글다는 뜻의 한자 ‘원(圓)’에서 따온 이름이지요. 1953~1962년 사이에는 ‘환’이라는 화폐 단위도 사용되었으나 1962년 6월 제3차 통화 조치 때 ‘원’이 한국 돈의 기본 단위로 정식 채택되었습니다. ■ 동전의 테두리에는 왜 홈이 파여 있나요?옛날에 주화를 금이나 은으로 만들었을 때 가장자리를 몰래 조금씩 깎아내어 이득을 보려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테두리에 톱니 모양의 홈을 넣게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