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건국대 사학과 교수 신병주 사극 통해 역사의 매력 알게 되다신병주 교수는 KBS ‘역사저널 그날’,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의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여 일반 대중에게도 매우 친숙한 역사학자다. 그는 방송에서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재치 있는 입담과 풍부한 이야기를 곁들인 해설로 우리에게 인문학의 정수를 맛보게 해준다. ‘역사의 대중화를 선도하는 사학자’로 그가 첫손가락에 꼽히는 이유다. 방송뿐만 아니라 <조선을 움직인 사건들>, <왕으로 산다는 것> 등의 대중 역사서도 많이 집필했다. 다양한 단체의 요청으로 인문학 특강도 많이 다니는데, 부산은행연수원에서 특강을 한 인연도 있어서 ‘부산은행 이야기’의 인터뷰 요청도 흔쾌히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와의 만남에서 가장 먼저 궁금했던 것은 ‘처음 역사에 매료된 순간이 언제였느냐’는 것이었다.“일단 학창 시절부터 역사가 흥미로웠어요. 초등학교 때부터 TV에서 방영하는 사극을 즐겨봤거든요. 혜경궁 홍씨의 삶을 그린 <한중록>이라든지, 옛날에 남성우라는 배우 분이 태종 이방원 역으로 출연한 드라마 <세종대왕> 등에 푹 빠졌죠.”그리고 당시 각 지역마다 ‘문화교실’이라는 것이 있어서, 이순신 장군과 같은 위인을 테마로 한 강연이 종종 열렸는데 그런 강연도 들으러 다니며 역사 공부에 관심을 더욱 많이 갖게 됐다고 한다._KBS ‘역사저널 그날’ _ 유튜브 ‘사피엔스 스튜디오’ 전국을 돌며 역사를 공부하던 시절그렇게 어렸을 때부터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그가 대학 진학 시 전공을 사학과로 결정한데는 또 하나의 결정적 이유가 있었다. 다른 과에서는 보통 대학 안에서만 공부를 하는 데 반해, 사학과는 유적 답사를 해야 하니까 전국 방방곡곡을 다닐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전국을 돌아다니며 역사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볼 수 있다는 게 큰 매력으로 느껴졌다는 것.“학기별로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 이런 식으로 나누어 답사를 나가기 때문에 4년을 마치면 전국 중요한 사적지는 다 돌아보게 되어 있어요. 책으로만 공부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역사의 현장을 실제로 본다는 게 학문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신병주 교수는 한국사 중에서도 조선시대 역사를 주로 연구했다. 조선시대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된 <조선왕조실록> 외에도 <승정원일기>와 같은 기록물을 풍부하게 남겨주었다. 조정뿐만 아니라 지방의 서원 등에도 수많은 기록이 남아 있다. 때문에 사료가 부족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비해 연구할 거리가 많고 근현대사와도 가까워 현대의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부분도 많다고 한다.예를 들어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킨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에 대해서 해법을 찾고자 할 때도 조선시대 기록은 참고가 된다. <향약집성방>, <동의보감> 같은 의서 외에도 <일성록>, <양아록>, <이향견문록> 같은 책을 보면 전염병 관련 수많은 기록이 나온다. 그는 최근 이러한 기록들을 참고하여 과거 선조들이 전염병에 어떻게 대처했는지, 왕이 어떻게 민심을 달랬는지 등을 정리한 <우리 역사 속의 전염병>이라는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매우 ‘실용적’인 학문, 역사이처럼 과거의 역사를 깊이 연구하고 현대의 대중들이 이해하기 쉽게 알리는 데 신병주 교수가 다양한 방면으로 노력하는 데는 깊은 뜻이 있다.“역사는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는 말이 있죠. 과거의 일이 현재에도 비슷한 양상으로 계속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역사가 그저 옛날이야기에 그치는 게 아닌 겁니다. 우리가 역사를 잘 알면 과거의 좋은 정책이나 제도를 계승할 수 있고, 되풀이하지 말아야 할 잘못된 결정들은 반면교사 삼아 피해갈 수 있습니다.”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게 비실용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런 이들에게 신병주 교수는 절대 부인할 수 없는 확실한 사례를 하나 들어주었다. 바로 현재 전 세계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한류 문화 콘텐츠 생산에 우리 선조들의 기록과 유형적·무형적 문화유산이 한몫했다는 것.“지금 역사를 소재로 하는 문학, 드라마, 영화 등이 엄청 많잖아요. 그런 문화 콘텐츠를 창작하는 데 역사는 중요한 재료가 되는 것이죠. 스티브 잡스도 첨단 산업의 기반에는 인문학이 탄탄히 자리 잡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듯이 역사가 다른 학문 영역이나 문화 콘텐츠의 발전에 그런 역할을 해줄 수 있습니다.”예를 들어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전 세계인들이 시청하면서 우리의 전통 ‘갓’에 대해 알게 되고 심지어 호기심에 갓을 구매까지 하려 했던 일을 생각해볼 때, 선조들이 남긴 기록과 문화유산은 오늘날 우리나라의 문화산업에도 확실히 큰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다.“게다가 지역 활성화를 위해 과거의 위인이나 역사 이야기를 활용하려는 움직임도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경남 진주시의 경우 남명 조식 선생 같은 학자의 실용주의 학문이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연구하고 그런 연구를 바탕으로 그분의 유적지를 재정비하거나 그분과 관련된 유·무형의 콘텐츠를 만드는 게 해당 지역민들에게 큰 긍지를 심어줄 수 있는 것이죠.” 오리 이원익 선생을 존경해신병주 교수에게 과거 위인 중 현 시대의 바람직한 리더로 생각하는 인물을 꼽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랬더니 한 분은 누구나 다 인정하는 세종대왕이고, 또 다른 한 분은 오리 이원익 선생이라고 했다. 이원익 선생은 남인에 속했으면서도 당론에 기울지 않고 바른길을 걷고자 하였으며, 서민적인 성품을 지녀 ‘오리정승’이라는 애칭으로 백성들에게 사랑받았다.“이원익 선생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빠짐없이 등용될 정도로 그 시대에 꼭 필요한 인재였습니다. 조선이 임진왜란의 위기를 넘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대동법을 시행해 굶주린 백성들을 보살폈죠. 그는 영의정을 여섯 번이나 지냈지만 청렴하게 살아서 집 한 채도 제대로 갖추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인조가 하사한 집이 지금도 경기도 광명시에 남아 있습니다.”대중과 소통하는 역사학자로서 그는 일선 전방부대 같은 곳에 가서 강연할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TV 방송뿐만 아니라 ‘사피엔스 스튜디오’ 같은 유튜브 방송에서도 그의 재미있는 역사 강의를 들을 수 있다. 앞으로도 계속 신병주 교수의 연구와 강연을 통해 더 많은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그 속에서 각자에게 필요한 유익한 교훈을 얻어갈 수 있길 바란다.
글, 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구글어스로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둘러보자. 도심 북쪽 지역을 확대하며 검색하다 보면 대형 크레인 두 개가 설치된 건축물을 만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으로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이다. 이 외에도 바르셀로나에 많은 걸작품을 남긴 가우디. 그의 발자취를 따라 바르셀로나로 여행을 떠나본다. 145년의 대공사, 꼭 봐야 할 명소바르셀로나 여행을 다녀왔거나 꿈꾸는 이라면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을 잊지 않는다. 이곳은 20년 전에도 그랬고 10년 전에도 그랬듯 지금도 변함없이 공사 중이다. 그러나 늘 붐빈다. 만만찮은 금액의 입장료를 내야 함에도 전 세계 관광객들로 항상 북적인다. 종교인이 아니어도 그 안에 들어서면 하염없이 경건해진다.이곳에는 40대 초반에 건설 책임을 맡아 35년간 이 건축에 헌신하다 죽은 안토니 가우디의 유해가 대성당 지하 예배당에 안치돼 있다. 1882년 착공했고 가우디 사후 100주년에 맞춰 2026년에 완공될 예정이라 하니, 145년 동안의 대공사다. 어쨌든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딱 한 군데만 선택해야 한다면, 그곳은 바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아니겠는가?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이 16개 자치구로 구성된 것처럼 스페인 제2의 도시 바르셀로나는 10개 지구로 이뤄졌다. 부산에 처음 온 이들이 도심 몇 개 구에 많이 몰리는 것처럼, 바르셀로나 여행자들은 주로 2~3개 지구에 관심을 쏟는다. 단기 여행이라면 올드타운 중심인 고딕 지구를 포함하는 시우타트베야(Ciutat Vella) 지구와 에이샴플레(Eixample) 지구에서 주로 시간을 보내다 떠난다. 건축에 문외한이어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움리스본에서 포루투갈 여행을 마치고 비행기로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원래는 이튿날 하루 종일 빡빡하게 도시를 둘러보고 밤기차로 바르셀로나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스트라이크 때문에 다음 날 기차는 아침 두 편밖에 없고, 국내선 비행기도 거의 운행 안 할 거라는 말을 기차표 예매하러 간 매표소에서 들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상황인데 매표소 직원은 ‘뭘 그걸 갖고 그리 놀라느냐’ 하는 눈치다. 때문에 마드리드는 오후 반나절도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한 채 하룻밤 자고 아침 일찍 기차로 떠나와야 했다.바르셀로나 여행에선 가우디 건축 탐방을 빼놓을 수 없다. 건축엔 문외한이고 디자인에 대한 기본 지식도 없는 나였지만 상관없었다. 도심 현장을 돌면서 명장의 건축 작품들을 눈으로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여행의 의미와 즐거움은 배가 됨을 느꼈다. 산스몬주익 지구는 제외하고 그라시아 지구-에이샴플라 지구-시우타트베야 지구순으로 움직이면서 바르셀로나 일반 명소는 물론 가우디 작품 7개를 포함하는 동선을 계획하다 보니 가우디 테마파크인 구엘공원을 포기해야 했다. 못내 아쉽긴 했지만 그러나 바르셀로나에는 가우디 건축 작품만 있는 건 아니었다. 피카소 미술관도 있고 다른 명소들도 많았다. 여행이란 어차피 한정된 시간을 얼마큼 잘 쪼개어 쓰느냐가 핵심이다. 선별과 선택이 중요한 것이다.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여행자의 시각으로 도심 속 가우디의 일곱 개 작품들을 이틀 동안 살펴보았다. 카사 비센스(Casa Vicen)메트로 그린 라인 폰타나역에서 5분 거리의 주택가 골목에서 만난다. 가우디의 첫 건축 작품이면서 건물 형태는 평범한 직선과 직각으로 이뤄졌다. 다양한 색감의 외벽이 워낙 화려해서 얼른 눈길을 끈다. 건물주가 타일공장 사장이라 그런지 형형색색의 타일들이 건물 전체를 치장하고 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Templode la Sagrada Familia)영어 표현으론 ‘Sacred Family’, 즉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을 일컫는 ‘성(聖)가족’이 성당 이름이다. 성당은 예수와 12제자와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는 총 18개 첨탑으로 이뤄진 구조이고, 건물 외벽은 예수의 탄생-수난-부활이라는 3개의 문으로 구성된다. 카사 밀라(Casa Mila)그라시아 거리 초입인 디아고날역을 나와 한 블록 내려오면 맞은편 대로변에 괴상한 동굴모양의 건축물이 서 있다. 늘 인파가 몰려 있어서, 금세 가우디 명품임을 알아볼 수 있다. 100년 전에 사업가 페드로 밀라가 가우디에게 의뢰해 지은 임대 주택, ‘밀라(Mila)의 집(Casa)’이다. 주택이라기보다는 거대한 암석을 깎고 다듬어 만든 동굴이나 조각처럼 보인다. 카사 바트요(Casa Batllo)베란다 모습이 마치 눈이 휑한 해골을 닮았다. 그 베란다를 받치는 기둥들은 인체나 동물의 뼈를 연상시키듯 괴기스럽다. 섬유사업으로 성공한 바트요가 자신의 부를 과시할 목적으로 뭔가 특이하고 극적인 느낌의 건물을 원했다고 한다. 당시 최고 건축가 반열은 아니었지만 특이한 디자인을 시도하는 것으로 알려진 가우디에게 건축을 맡겼고 결국은 만족했다고 한다. 카사 칼베트(Casa Calvet)외형도 장식도 단순하고 단정해 보이는 건물이다. 앞서의 작품들에 비해 곡선 감도 덜하고 평이해서 그런지 주변엔 관광객도 별로 없다. 그럼에도 1900년 제1회 바르셀로나 건축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카사바트요나 카사밀라에 비해 특징이 없어 보이지만 이들이 세상에 나오기 6~10년 전에 지어진 작품임을 감안하면 쉽게 수긍이 된다. 레이알 광장 가로등(Fanalsde la Placa Reial)람블라스 거리의 리세우역 인근에 레이알 광장이 있다. 야자수 나무와 분수대가 잘 어울리는 이 조그마한 광장 한켠에는 특이한 가로등이 눈길을 끈다. 멋진 투구를 씌운 기둥에 가로등 6개가 달려 있는 가우디 데뷔 작품이다. 학교 졸업 후 바르셀로나 시가 주최한 디자인 공모전에서 당선된 작품이나, 비용 문제 때문에 실제 거리 현장에는 적용되지 않았다고 한다. 구엘 저택(Palau Guell)레이알 광장에서 람블라스거리 맞은편 골목으로 5분 정도 들어가면 왼편에서 있는 웅장한 대형 건물이다. 가우디의 예술적 감각을 현실세계의 건축에 제대로 반영할 수 있도록 40년 동안 후원해 준 에우세비 구엘의 저택이다. 본관과 연결되는 별관으로 지었지만 구엘은 건물이 더 마음에 들어 본관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가우디가 건축가로서의 입지를 굳히는 계기가 된 작품이다.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대도시 레온을 떠나던 날 새벽에 안토니 가우디의 실물 크기 좌상(坐像)과 만났었다. 자신의 설계 작품 카사 보티네스(Casa Botines)를 바라보며 앉아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라 그의 옆자리에 잠시 앉아 있었다. 사후 100년 넘어서까지도 자신의 상상력과 창의가 이렇게 세계인에게 영감을 주고 영향을 미칠 지 생전의 그는 과연 예감이나 했을까?
글_ 유효석 메이킹협동조합 이사장, 적정기술 메이커 커뮤니티 Cre8on 총괄대표운영진우리의 적정기술은 어떻게 발전이 되고 있을까? 적정기술은 항상 선진국에서 저개발국가로 전수해주는 구조가 맞는 것일까? 많은 의문점이 든다.적정기술은 사회문제 해결과 그 지역에 맞는 조합이 잘 이루어져야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변화되는 적정기술을 생각해보아야 할 것이다.그러기 위해서 한국과 베트남은 적정기술 교류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4차 산업 기술에서 우수한 베트남한국은 선진국, 베트남은 개발도상국이라는 인식이 있다.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한국이 남베트남에 해외파병을 한 인연도 있다. 베트남 통일 이후 교류가 단절되었다가 경제 개방으로 한국과 재수교를 한 베트남은 여전히 열악한 환경이었고, 인프라 수준이 낮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근 베트남은 눈부신 발전을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베트남에는 한국 및 글로벌 기업들이 진출하여 저렴한 인건비를 활용함으로써 다양한 제조업의 발전을 이룩했다. 그럼에도 베트남은 아직도 많은 사회문제를 안고 있다.왜 베트남에 적정기술이 활발해져야 할까? 사실 베트남은 4차 산업 기술을 선도하는 국가 중 하나이다. 베트남의 IT 실력은 한국 다음으로 우수한 편에 속하며, 전 세계 IT 아웃소싱 2위를 기록하고 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우리는 적정기술에 대해 생각의 전환을 가져야한다._폐기되는 페트병으로 환경오염 문제가 심각한 베트남에서 한 생수 회사가 신제품 생수 용기의 50%를 리사이클링 제품으로 사용하여 소비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한국의 아이디어와 베트남의 기술력이 결합해야보통 사람들은 한국에서 적정기술을 만들어 베트남에 보급하면, 좋은 결과물이 나올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적정기술은 원조를 통해 잠깐 사회문제 해결을 실현할 수 있으나 그 이후 인프라의 발전 가능성은 적기 때문이다.결국 현지 토착화와 현지에서 재생산 발전이 기반으로 깔려야 한다. 베트남은 아이디어 창출 능력이 높아졌다고는 하나 아직은 그런 것과 거리가 먼 상황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그런 문화가 익숙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아이디어가 ICT기반의 베트남의 기술력과 결합했을 때 더 저렴하면서 현지화 가능한 적정기술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한국의 아이디어 및 연구개발과 베트남의 재생산과 현지 적용 능력을 결합하면 가장 이상적인 적정기술 융합 ICT 제품 및 서비스가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베트남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현지화된 적정기술베트남은 저개발국가이면서 가난한 나라지만, 창의성과 기술개발 능력은 절대 가난한 나라의 실력이 아닌 선진국에 버금가는 실력을 가지고 있는 국가이다.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논의 하여 현지에서 같이 협업을 했을 때, 바로 시제품 및 서비스가 바로 나올 수 있는 곳이 베트남이다.그 예시는 베트남 껀터시에 소재한 껀터대학교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베트남 대학이라면 한국의 대학에서는 한 수 아래라고 느낄 수 있다. 그렇지만 실제로 확인해보면 베트남 껀터대학교 대학생들의 실력은 그 이상이었다. 이미 사회문제 해결에 대해 많이 연구한 상황에서 우리보다 더 혁신적인 제품을 연구개발 할 수 있었다. 오히려 한국의 ICT 개발인력 부족에 따른 보완도 해결할 수 있고, 수익 모델 협업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수준으로 발전해 있었다.한국에서 적정기술 5개를 개발하여 가보았을 때 단 2일만에 업그레이드하여 현지 적용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리고 현지 재료를 오히려 한국보다 더 빠른 시간에 구해서 진행할 수 있었다. 그것도 제조국가인 베트남의 큰 장점이었다. 이런 상황이 적정기술의 선진화된 현지화 모델을 선보일 수 있는 것이다._페트병을 재활용해 3D 프린팅 필라멘트로 만드는 기기 Polyformer 미래의 혁신기술을 적정기술에 결합하는 모델의 협업그러므로 한국의 아이디어가 제일 중요한 것은 현지 문제가 곧 다른 나라에서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 문제의 해결책을 베트남에 만들어보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플라스틱 페트병을 수거하여 페트병을 필라멘트로 재생산해서 판매하는 ICT 결합형 사회문제 해결 모델을 고민하게 되었다.실험은 이미 시작되었다. 그 실험 과정에 대해서는 다음에 다루고자 한다.
우리에게는 ‘에밀레종’이라는 이름으로 더 친숙한 성덕대왕신종.1,200년이나 지난 금속 종이 아직도 깨지지 않고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은 당시 신라인들의 금속 주조 기술이 세계적 수준이었다는 걸 보여준다.무엇보다 이 종이 들려주는 천상의 소리는 그 아름다움을 형용할 말을 찾기가 쉽지 않다. 무엇이 이 종을 특별하게 만든 것일까? 에밀레종 전설은 창작소설이었다이야기에 들어가기 앞서 먼저 큰 오해 하나를 시정해야겠다. 성덕대왕신종에 대해 거의 전 국민이 다 아는 전설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 종을 주조할 때 영험한 종소리를 내기 위해 어린 아기를 인신공양 했다는 것인데, 억울하게 희생된 아기의 영혼이 자신을 시주한 어미를 원망하여, 꼭 ‘에밀레~ 에밀레~(어미 탓이야~)’라고 한탄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이 기상천외한 전설을 아직까지도 믿고 있는 사람이 많다.그런데 사실 이 전설은 현재 전해지는 어떤 역사 기록에도 찾아볼 수 없는 낭설에 불과하다. 이 이야기는 1925년 8월 5일자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창작문예란에 염근수라는 작가가 ‘에밀레종’이라는 동화를 발표한 데서 비롯됐다. 내용은 우리가 아는 그 전설 그대로다. 이것은 성덕대왕신종과는 아무 관련 없는 얘기였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이 창작소설이 마치 실화인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퍼지면서 성덕대왕신종과 관련된 전설로 잘못 알려지게 된 것이다. 비록 페이크 뉴스에 불과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오해 덕분에 성덕대왕신종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종이 되었다. _용의 머리와 허리로 주조되어 있는 용뉴는 힘차고 기백있는 모습이 일품이다.신비한 여운을 남기는 소리의 비밀 그런 전설을 사람들이 믿었던 배경에는 아무래도 이 종이 들려주는 소리에 영험한 기운이 서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성덕대왕신종의 종소리는 잡음과 왜곡이 없는 맑은 소리와 낮고 높은 소리들의 조화로운 배합으로 이뤄져 있다. 소리가 사라졌다가 되살아나는 것이 반복되는 맥놀이, 그리고 초기의 타격음 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는 여음이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아름답게 느끼게 하는 주요한 특징이다.특히 ‘맥놀이’란, 종에서 진동이 다른 두 개의 소리를 나오게하는 것으로, 이 두 소리가 서로 간섭하며 강약을 반복함으로써 소리를 먼 데까지 보내는 현상을 뜻한다. 성덕대왕신종뿐만 아니라 다른 우리나라 종에서도 이 맥놀이 현상이 발견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한국에서 생산된 종들을 ‘한국 종’이라는 고유의 학명으로 부르기도 한다.그렇다면 이렇게 ‘웅웅웅’ 하면서 끊어질 듯 이어지는 소리가 반복되며 여운이 오래 가는 ‘맥놀이’ 현상은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학자들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그 원인은 바로 이 종의 위아래 부분과 중간(배) 부분의 두께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비대칭적인 특성으로 인하여 위상이 다른 두 개의 소리가 발생 되고, 두 소리가 합쳐졌다가 떨어졌다가 하는 간섭 현상에 의해 소리의 세기가 일정한 주기로 커졌다가 작아졌다 하는 맥놀이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최적의 맥놀이 특성을 얻으려면 문양과 조각을 배치하는 이론적 기술과 주조 오차를 최소화하는 복합적인 기술이 필요하다. 성덕대왕신종은 이러한 특성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어서, 현대의 최신 음향학 관점에서 보아도 그 뛰어난 기술력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_구름 위의 연화좌상에 앉아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공양하는 아름다운 보살의 모습을 나타낸 비천상미려한 예술성에 견고함까지 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부분은 이 종이 가진 조형적인 아름다움이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종에 새겨진 ‘비천상’이다. 이 작품은 구름 위의 연화좌상에 앉아 바람에 옷자락을 휘날리며 공양하는 아름다운 보살의 모습을 나타낸다. 신라의 미를 대표하는 상징으로 널리 알려진 이 비천상뿐만 아니라 상부의 용뉴(龍鈕) 조각 또한 기가 막히다.용뉴란 종을 종각에 거는 부위로 용의 머리와 허리로 주조되어 있다. 용뉴의 용과 비천상의 힘차고 기백 있는 모습들은 서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섬세하고 미려한 예술성으로 따지자면 전 세계 그 어떤 예술 작품에도 뒤지지 않는 걸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_연꽃문양으로 주조된 당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