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기교 없이도 듣고 나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 노래가 있다. 사람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네듯 친근하게 다가가는 노래. 평생 그런 노래를 부르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성악가 엄정행을 만나보았다. 평생 모은 자료, 모두에게 도움 되길최근 언론 매체에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엄정행을 만난 곳은 양산시에 위치한 쌍벽루아트홀이었다. 이곳에는 오는 7월 중순 ‘엄정행 소장품 전시관’이 개관할 예정이다. 지난 3년간 헌신했던 울산예술고등학교 교장직도 올 2월에 사퇴했고 현재는 이 전시관 준비에만 열정을 쏟고 있다.“요즘엔 공연도 안 하고 방송 출연도 안 한 지 오래되니까 ‘엄정행이 죽었나?’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더라고요.(웃음) 아직도 여기저기서 요청이 들어오긴 하지만 이제 체력도 딸리고 요즘 잘하는 젊은 후배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니까 고사를 했어요. 또 스스로 제 노래가 마음에 차질 않으니까 이제 무대에 서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도 있죠.”그는 전성기 때 20년 동안은 거의 매일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렀다. 독창회만 197회 했고 하루에 두 번씩 공연한 적도 있다. 그러나 완벽주의적인 성격 때문에 스스로에게 만족하지 못하자 50세 이후론 방송 출연을 접었다. 그동안 쌓아온 인연을 무시할 수 없어서 꼭 필요한 공연에만 나갔는데 그것도 75세 이후론 그만두고 이후로는 교육자로서 후진 양성에만 전념해왔다. 그가 평생 모아온 소장품을 선보이게 될 ‘엄정행 소장품 전시관’은 그랜드피아노 2대, 오디오, 스피커 등을 설치해 전시, 공연 등을 즐길 수 있는 음향 공간, 책, 레코드, LCD, 희귀 악보 등을 볼 수 있는 전시 공간, 음악 공연 영상을 감상할 수 있는 영상 공간 등으로 꾸며질 예정이다. “이탈리아에서 유학을 하셨던 제 은사 교수님이 돌아가시면서 유럽에서 수집한 희귀한 자료들을 저에게 많이 물려주셨어요. 또 45년간 교수 생활하면서 해외에만 나가면 음악 관련 자료들을 구하느라 많은 곳을 돌아다녔죠. 성악가 중 유명 테너들의 CD만 해도 100장이 넘어요. 이런 자료들이 음악 공부하는 젊은이들과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고 즐거움을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가곡으로 아이돌 못지않은 인기 누려 엄정행이 성악가로 우뚝 서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청소년 시절에는 배구 선수를 꿈꾸며 운동만 했었다. 그런데 배구 시합 경기 방식이 9인조에서 6인조로 바뀌면서 174cm의 비교적 작은 키가 그에게 불리한 요소로 작용했다. “결국 그런 변화에 적응할 수 없어 배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음악 선생님이었던 아버지의 권유로 대학입시 한 달을 앞두고 갑자기 성악으로 진로를 변경하게 됐죠.”그렇게 음대에 진학했지만 가정 형편 때문에 유학은 꿈도 못 꿨다. 대신 성실히 음악 공부를 하며 대학원까지 마쳤다. 그러나 졸업 후에도 입신양명의 기회는 얻지 못하고 무명 성악가로 남아야 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옷 장사, 커피숍, 악기 장사 등 다른 일을 하다가 청주여자사범대에 전임강사 자리를 얻으면서 겨우 경제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던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찾아왔다. “1972년 MBC FM라디오에서 우연히 우리 가곡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았어요. 당시 성악가들의 음반은 SP레코드, 즉 모노로 녹음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거긴 FM이니까 스테레오로 가곡을 새로 녹음해서 틀어줬거든요. 가곡 ‘비목’을 작곡한 장일남 선생님이 그 녹음을 주도했는데 그 분을 찾아가서 다짜고짜 저도 녹음에 참여하게 해달라고 졸랐죠.”장일남 선생은 그 노력이 가상해서 무명 성악가였던 그에게 한 곡만 부르게 했다. 그러나 막상 노래를 시켜 보니 기대 이상으로 잘 불렀고, 방송국 측의 반응도 좋아서 12곡이나 녹음을 하게 됐다. 그 곡들을 토대로 ‘테너 엄정행 한국가곡집’ 앨범이 나왔고 그것이 큰 반향을 일으키면서 엄정행은 하루아침에 국민적인 스타로 떠올랐다. 고음질 음악방송에 특화된 FM라디오의 태동, 한국 가곡 붐이 일기 시작하던 무렵의 희귀한 스테레오 음반이라는 행운도 따라주었지만 그의 뛰어난 음악성이 없었다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끊임없는 공부와 연습의 길 왜 우리 국민들은 많은 성악가들이 부른 가곡 중에 특히 엄정행이 부른 것을 ‘가곡의 정석’으로 인정하고 사랑하게 됐을까. 이는 그가 외국 유학을 다녀오지 않은 순수 국내파로서, 우리 노래 가사에 담긴 정서, 발음, 발성법 등에 대해 엄청난 공부와 연습을 한 덕분이었다. “한국어 발음은 어렵기가 세계적으로도 유명합니다. 우리 노래 가사에 담긴 고유의 정서를 정확한 발음과 억양으로 잘 전달하기 위해서는 많은 훈련이 필요하지요. 국악 명창들이 어릴 때부터 피나는 연습을 하는 것도 그 이유에서입니다. 저는 우리 가곡을 잘 부르기 위해 판소리 명창이신 조상현 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소리를 배우기도 했습니다.”이와 함께 그는 ‘구름을 타고 간다.’라는 노래 가사 한 구절을 불러보며 그중 ‘타고’의 ‘타’ 한 글자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따라 노래가 어떻게 완전히 달라지는지를 즉석에서 시범을 보여줬다. 그는 단 한 구절을 부르더라도 가사의 뜻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청중들의 가슴에 여운을 남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의 대표곡이라 할 수 있는 ‘목련화’는 처음 선보이기 전, 연습 중에 60번이나 고쳐 부른 일화로 유명하다. 음악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지 않아유명해진 후에도 그는 초심을 잃지 않고 겸손하고 소탈한 성품으로 높은 인기를 얻으며 전국 방방곡곡을 누볐다. 세종문화회관, 예술의전당 같은 큰 무대뿐만 아니라 탄광촌, 어촌 등도 가리지 않았다. “제가 한창 공연을 다녔을 때는 우리나라 도로 사정이 열악해서 아스팔트길을 별로 못 다녀봤어요. 음악 전문 공연장도 드물어서 극장이나 시민회관 같은데서 연주했죠. 시골 어르신들이 엄정행 얼굴 한 번 보자고 그렇게 많이들 와서 좋아해주셨어요. 참 정이 많던 시절이었죠.”그는 음악을 하는 후학들에게 돈이나 명성에 얽매이지 말라고 조언한다. “노래만 잘한다고 해서 절대 출세할 수 없다. 음악을 사랑하는 청중들과 소통할 줄 알아야 한다. 실력 이전에 인성이 먼저 갖춰져야 음악을 꾸준히 할 수 있다.”고. “저는 음악을 위해 인생을 희생하지 않았습니다. 돈을 쫓아서 원치 않는 무대에 서본 적도 없고, 유명한 성악가랍시고 사람들 앞에서 거만하게 굴지도 않았습니다. 주최 측 형편이 어려워 보이면 개런티를 받지 않고 무대에 서기도 했지요. 그러니 어디에서 누구를 만나든 마음이 편하더군요.”현재 그는 고향인 양산시에서 ‘엄정행음악연구소’를 열어 여성합창단을 지도하고 있으며, 매년 우수한 신인 성악가를 발굴하는 ‘엄정행 콩쿠르’를 개최하고 있다. 지난 2년간은 코로나19 때문에 콩쿠를 개최하지 못했으나 내년부터는 다시 시작할 계획이다. 성악가 엄정행은 평생 동안 음악과 인생 어느 한 쪽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 가곡 대중화에 기여한 뛰어난 음악가이자, 후학들에게 삶의 본보기가 된 훌륭한 교육자로 오래도록 우리 기억에 남을 것이다.
사진 제공_군포시 방짜유기전수교육관방짜 유기는 세월이 흘러도 정갈한 빛과 단아한 곡선을 품으며 은은한 멋을 유지한다. 장인의 손끝에서 탄생한 자연스러운 질감, 부딪혔을 때 오래도록 울리는 청아하고 맑은소리…. 전통 수공예, 방짜유기를 경기도 무형문화재 10호 방짜유기장 김문익과 함께 체험해 본다. 방짜유기의 매력기록에 따르면 놋쇠의 장인을 유장(鍮匠)이라 부르는데 이는 유기(鍮器) 즉 놋 제품을 다루는 장인을 가리키는 포괄적인 명칭이다. 놋은 그 재료에 따라 두 종류로 구분된다. 구리에 아연을 넣은 주동과 아연 대신 주석을 넣은 향동으로 구분되며, 향동이 더 고급 놋쇠로 방짜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방짜유기로 만든 식기는 다양한 장점을 지닌다. 따뜻한 음식은 온기를 오래도록 유지하며, 차가운 음식은 시원함을 지속할 수 있다. 예로부터 독극물을 가려내는 효험으로 왕의 수라에서 독을 판별하기도 했으며 주동과 달리 납과 같은 소량의 불순물도 전혀 들어있지 않으며 살균 효과도 뛰어나다. 최근에는 방짜유기 식기를 사용하면 음식에 미네랄이 흡수되어 부족한 미네랄을 섭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발견되어, 건강한 식기로 주목받고 있다. 또한 징‧꽹과리 등 풍물에 쓰이는 악기들도 방짜유기로 만든다. 악기의 소리는 장인의 망치질에 따라 고유의 울림이 고르고 오래간다. 구리와 주석의 비율을 정확히 맞춘 놋쇠를 불에 달궈 망치로 두드려 만드는데, 이 과정을 거쳐 조직이 치밀하고 변색이나 변형이 적기 때문이다. _방짜유기로 만든 식기 70년 한 길을 걷다김문익 장인은 경남 함양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기 공방에 목탄을 대던 이모부를 따라다니다 12세에 유기장 최두건 공방에 입문 하였다. 함양은 유기 중에서도 악기가 유명한 곳이다. 그는 다른 지역과도 인적 교류를 많이 하는 가운데, 공방에서 13년 동안 유기 기술을 연마했다. 이후 경기 안양에서 평안도 정주 출신 중요무형문화재 제77호 이봉주 휘하에 들어가 17년 동안 평북 정주의 납청방짜 기법도 배웠다. 연마한 기법으로 1988년 서울 올림픽과 장애인 올림픽 개막 당시 춤사위에 사용되던 ‘바라’와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악기 등을 다수 제작했다. 그 외에도 1981년부터 1999년까지 다수의 입상과 전시, 1992년 5월 28일 경기도 무형문화재 방짜유기 기능보유자로 지정되며 그 기술을 인정받았다. 김문익 장인의 방짜유기는 다른 방짜유기 보다 주석의 비율을 높여 제작해, 소리의 음역대가 정확해 악기 중에서도 단연 으뜸으로 친다. _꽹과리 – 20cm × 20cm 방짜 유기 기술방짜유기는 주물에 의한 생산이 아닌 두드려 만드는 전통적 기술이다. 10단계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기 때문에 유장의 노련함에 따라 빛을 발하게 된다. 먼저 구리16냥, 주석 4냥5돈의 비율로 합금하고 조형한 쇠인 바둑을 두들겨서 늘리고 분리한다. 이후 여러 작업을 거치며 불에 달궈 성형으로 형태를 만들고 물에 담그는 담금질로 식힌다. 이때 찬물에 일그러진 형태를 바로잡아주는 벼름질을 하고 마지막으로 겉면을 깎고 다듬는 가질의 단계를 거치면 하나의 방짜유기가 탄생한다. 전통 방짜 작업의 하이라이트는 심야에서 새벽까지 장정 6명이 하나가 되어 호흡과 리듬을 맞춰 합금과 메질을 하는 장면이다. 망치질 3명, 집게 1명, 풍구질 1명, 쇠달구는 사람 1명이 호흡을 맞추어 정신을 집중해서 쉬지 않고 최소 3시간 이상을 작업해야 한다. 김문익 장인은 지금도 방짜유기 작업에서 두드리기 작업을 할 때 잡념이 들지 않도록 가장 집중한다. 두드리는 리듬과 강약에 따라 그릇과 악기의 질이 미세하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의 장인 정신은 마지막 망치질까지 최선을 다해 집중하는 그 세밀한 손끝에 담겨있다.전통에서 현대까지심혈을 기울인 작업 끝에 탄생한 꽹과리와 징 등의 악기는 국악인들 사이에서 최고로 통한다. 1986년 작고한 전설적인 쇠잡이 김용배 선생이 그의 꽹과리를 썼으며, 현재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사물놀이패인 김덕수 사물놀이패도 그가 만든 징과 꽹과리를 이용하고 있다. 다른 악기와 소리가 다르다는 평가는 김문익 장인이 체득한 노하우와 그만의 예민한 감각에서 비롯되었다. 사물놀이용과 무속용의 소리가 다 다르다는 그는 유기장의 망치질 정도에 따라 사물놀이용은 산뜻하고 무속용은 요란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오랜 시간 방짜유기를 두드렸던 손끝에서 체득한 그만의 비결이다. 과거만큼은 아니지만 요즘도 유기를 찾는 곳은 꾸준하다. 주문이 들어오는 물량을 보면 불기 60%, 가정 반상기 20%, 사물놀이용 악기가 20% 정도인데 반상기의 인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건강한 그릇이라는 인식이 퍼지며 주목받고 있고, 혼수로 유기 반상기를 구비하는 사람들도 꽤 늘어났다. 그릇은 관리만 잘해도 다음 세대가 쓸 수 있다.장인의 기술이 전수되어야 한다는 바람은 방짜 유기의 매력에 빠진 사람들도 원하는 바다. 전통이 꾸준히 사랑받고 있으니, 경기 군포에 국일 공예사 공방을 운영하며 방짜유기 생산과 후진 양성에 힘쓰고 있다. 군포시 또한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10호인 김문인 장인의 작품과 기술을 유지‧전수하고자 2018년 방짜유기전수교육관을 개관했다. 방짜유기의 명맥을 잇고 활성화하기 위해 방짜유기 체험 활동과 전시‧홍보 등으로 대중화에 힘쓰고 있다. 낮에는 방짜에 반사되는 빛 때문에 일하기 힘들어 주로 밤에 작업을 했다는 방짜유기장 김문익 장인. 그가 놋쇠를 다룬 지도 어언 70년이 되었다. 유수의 세월을 등에 업은 그의 뒤를 전수자인 조카 김춘복 씨가 37년째 따르고 있다. 방짜유기전수교육관에는 이춘복 씨의 아들 이광운 씨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방짜유기의 매력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다음 세대의 활약이 기대된다. _김문익 장인이 전수자 조카 김춘복 씨와 완성된 악기 소리를 듣고 있다
글. 최원형 생태환경 작가, 서울시 에너지정책위원회 시민협력분과 위원 6월 3일은 ‘세계 자전거의 날’입니다. 자전거는 단순하고, 쉽고, 신뢰할 수 있고, 환경 친화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운송 수단입니다. 사람들의 일상에 자전거가 깊이 파고드는 미래를 꿈꾸어봅니다. 자전거가 늘어날수록 숲도 늘어난다 _에펠탑 앞에서 자전거를 타며 휴일을 즐기는 파리 시민들하늘은 높고 대기는 더없이 청량합니다. 출근길, 도심 한복판의 널찍한 도로 위를 가득 메운 사람들이 자전거를 탄 채 신호를 기다리고 있어요. 선글라스에 헬멧을 쓰긴 했지만 드러난 얼굴에서 밝은 표정을 읽을 수 있습니다. 자전거 그림이 그려진 초록 신호등이 켜지자 자전거 행렬은 썰물처럼 도로 위를 움직이며 멀어집니다. 마치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듯 이동하는 모습은 익숙한 아침 풍경입니다. 한 무리의 자전거가 사라지고 붉게 포장된 자전거 도로 위로 도장처럼 찍힌 하얀 자전거 그림이 잠깐 보이나 싶더니 이내 새로운 자전거들이 속속 그 자리를 채웁니다. 신호가 바뀌자 자전거를 이용할 수 없거나 좀 먼 거리를 이동하는 사람들을 태운 전기 버스가 출발합니다. 또 한 번 신호가 바뀌자 이번에는 승용차들이 느린 속도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주차할 장소도 점점 줄어드는 데다 시속 30km 이상 속도를 낼 수도 없고 대중교통이나 자전거로 충분히 이동할 수 있으니 자전거 도로의 5분의 1밖에 안 되는 자동차 전용 도로는 언제나 한산합니다. 더 이상 차가 다니지 않는 도로와 주차장을 걷어낸 자리에 숲이 들어섰어요. 숲이 여기저기 생기니 점점 많은 새가 찾아와 도시는 지저귀는 새소리로 정겹습니다. 자전거 공간 확보가 중요한 이유 이런 상상 어떤가요? 그저 꿈같은 이야기일까요? 2020년 1월 파리 시의 안 이달고 시장은 재선에 도전하면서 여덟 가지 공약을 발표했습니다. 공약 가운데는 ‘파리 시내 상젤리제를 비롯한 몇 군데 도심을 제외하고는 자동차 속도를 시속 30km로 제한하겠다’, ‘주차장의 절반 이상을 걷어내고 정원을 조성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지요. 과연 안 이달고를 파리 시장으로 또 만날 수 있을까 싶었지만 파리 시민들은 이 멋진 공약을 선택했습니다. 파리 시민들이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삶의 질에 대한 성찰을 제대로 했던 걸까요? 파리 시는 도로 차선을 줄이고 자전거 길을 늘리며 2024년까지 파리 시내 전체를 자전거로 다닐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목표를 향해가고 있습니다. 2015년 파리에 갔을 때 전철역마다 즐비한 공유 자전거 밸리브를 보고 잊었던 자전거를 떠올렸어요. 곧 자전거로 파리 시를 맘껏 다닐 수 있을 거라니 상상만으로도 즐겁고 부럽습니다. 서울시에도 이제 따릉이가 있고 여러 도시에 공유 자전거가 제법 생기고 있어요. 그렇지만 공유 자전거에도 격이 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닐 수 있는 공간을 얼마나 확보했느냐가 격을 가늠하는 척도이지요. 자전거의 메카가 된 네덜란드 _암스테르담의 출근길에서 자전거의 물결을 보는 것은 흔한 일네덜란드는 이동 수단 1위가 자전거일 만큼 세계에서 자전거 이용률이 가장 높은 나라답게 사람보다 자전거 수가 더 많습니다. 자전거가 부담하는 운송률은 자그마치 36%에 이르거든요. 암스테르담, 로테르담, 위트레흐트는 세계 자전거의 메카입니다. 출근 시간 암스테르담은 자전거 물결로 가득합니다. 네덜란드는 어떻게 자전거의 메카가 되었을까요? 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네덜란드에서 한 해 교통사고 사망자는 3,000명이 넘었고 400여 명의 어린이가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60년대를 지나면서 시민의 발이었던 자전거가 밀려나고 자동차가 도시를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오늘날 많은 도시가 그렇듯 자동차가 사람과 자전거를 모두 밀어낸 거지요. 그러다 1972년 9월 당시 일간지 De Tijd의 한 기자가 아이를 자동차 사고로 잃게 됩니다. 그 일이 기사화되자 시민들은 분노하며 거리로 뛰쳐 나왔어요. “Stichting Pressiegroep Stop de Kindermoord.” 아이들을 그만 죽이라는 이 외침 아래 모인 이들이 자전거로 도로를 점령합니다. 이후로 어린이 교통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이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고 해요. 게다가 마침 두 번의 오일쇼크가 전 세계에 닥칩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치솟는 기름 값을 감당키 위해 ‘자동차 없는 월요일’을 한시적으로 시행했어요. 거리에 자동차가 사라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도시에 함께 살면서도 자동차 소음에 파묻혔던 새 소리가 살아납니다. 자동차에 밀려났던 사람들의 발걸음이 살아나며 도시를 되찾았습니다. 인간의 동력으로만 움직이는 데다 교통사고마저 급격히 줄이는 자전거는 사람들의 일상으로 파고 들기에 이릅니다. 네덜란드에 자전거가 뿌리내리게 된 배경에 시민들의 노력이 출발점이었다는 걸 기억해야 할 것 같아요. 더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즐기도록 세계 도시들이 자전거의 매력에 푹 빠졌다는 게 느껴지나요? 자전거는 인류의 놀라운 발명품입니다. 자전거는 인간의 동력으로 움직이며 사람이 다닐 수 있는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어디든 이용 가능한 탈것입니다. 6㎡면적에 자전거를 적어도 10대는 세울 수 있지만 자동차 1대를 주차하려면 그보다 20배나 넓은 11.5㎡의 주차 공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자동차 운행과 상관없이 도로와 주차장은 그 공간을 24시간 점유하고 있습니다. 겨울부터 봄까지 미세 먼지로 마스크와 공기청정기가 필수품이 되어버렸지만 자동차 수는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도시에 사는 사람 수가 자동차 대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데도 사람이 다니는 길은 도로에 비하면 굉장히 협소합니다. 팬데믹 기간 서울시 따릉이 이용자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지만 자전거 도로 사정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도로 일부를 자전거 길로 만든 곳도 있지만 자전거 도로를 확보하지 못한 곳이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좁은 인도를 두고 사람과 자전거가 경쟁하고 있는 게 현실이지요. 탄소 중립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도, 오염 물질 없는 깨끗한 대기를 위해서도 자전거는 세계적인 흐름입니다. 이제 좀 더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쾌적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가 필요합니다. 자전거로 막힘없이 어디든 다닐 수 있도록 자전거 도로를 요구하는 일은 이제 생존을 위한 우리의 권리입니다.6월 3일은 ‘세계 자전거의 날’입니다. 유엔에 따르면 세계 자전거의 날은 ‘단순하고, 쉽고, 신뢰할 수 있고, 환경 친화적이면서 지속 가능한 운송 수단인 자전거의 중요성, 지속성, 다양성을 확인하는’ 날입니다. 자전거는 거실이나 헬스클럽이 아닌 도로 위를 달려야 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자전거를 타면 생각이 정리됩니다. 자동차 대신 자전거가 늘어나면 우리가 사는 도시의 공기가 더 깨끗해질 것이고 도로는 훨씬 여유로워질 겁니다. 자전거를 타든 타지 않든 자전거 도로를 지방 정부에 요구해주세요. 더 많은 사람이 자전거를 즐길 수 있도록 말이지요. 자전거 전용도로는 내가 숨 쉬는 공기가 깨끗해지는 길이며 기후 위기로부터 우리의 미래를 지키는 일이니까요.
글. 장한업 이화여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한국인이 사랑하는 커피의 어원은 커피의 본고장인 에티오피아의 ‘카파’ 지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카파에서 카흐와, 카흐베, 까페, 그리고 커피로…. 커피를 둘러싼 흥미로운 세계사를 알아보자. 이슬람교 덕분에 널리 보급된 커피 오늘날 우리는 커피를 참 많이 마십니다. 현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한국 성인은 연간 평균 353잔을 소비했는데, 이는 세계 성인의 평균 소비량의 2.7배에 해당해요. 한국은 전통적으로 차를 마시던 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이처럼 애음되고 있는 커피는 어디에서 시작되었고 전 세계를 어떻게 돌아다녔을까요? _에티오피아에서 전통 방식으로 커피 원두를 로스팅 하고 있는 여인 커피의 본고장은 에티오피아 카파(Kaffa)라는 지역이라는 것이 다수설이에요. 6~7세기 경 이곳에는 칼디라고 불리는 목동이 있었는데, 이 목동은 어느 날 염소들이 어떤 열매를 먹기만 하면 이상한 흥분 증세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호기심에 이끌린 이 목동은 자신도 그 열매를 먹어보았고 비슷한 흥분 증세를 느꼈다고 해요. 그는 곧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고 이로써 커피의 효능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15세기 경 커피는 홍해 너머 예멘에도 알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16세기에는 이슬람 순례자들에 의해 인도 등 여기저기에 보급돼요. 아랍 사람들은 커피를 ‘카흐와(qahwah)’라 불렀고, 터키 사람들은 ‘카흐베(kahveh)’라고 불렀어요. 커피가 이슬람 세계에서 널리 유행한 데에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어요. 하나는 이슬람 교리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술을 대신할 음료가 필요했기 때문이지요. 다른 하나는 커피가 하루에도 몇 번씩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에게 졸음을 쫓아주는 기능을 했기 때문이지요. 지식인들의 아지트가 된 카페 17세기 중엽 커피는 유럽으로 들어가게 돼요. 프랑스에 커피를 전한 사람은 오스만 제국 대사 술레이만(Suleiman)이라고 해요. 1669년 7월 그가 파리에 도착했을 때 루이 14세는 오스만 제국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의 접견을 거부했어요. 이에 불만을 가진 슐레이만은 한 가지 기지를 발휘했어요. 자신을 거처를 아랍식으로 꾸미고 이국적인 물건으로 그 속을 채워서 파리 귀족들의 호기심을 끌었지요. 그의 예상대로 귀족들은 그의 집에 몰려들었고 그때마다 그는 그들에게 커피를 대접했어요. 이런 환대는 방문객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이 소문은 베르사유 궁에 있던 루이 14세의 귀에도 들어갔지요. 결국 루이 14세는 그해 11월 술레이만을 궁으로 부르게 돼요. 향긋한 커피 향을 이용한 대사의 기지가 성공하는 순간이었지요. 커피는 프랑스에서 ‘카페(café)’라고 불렸어요. 1686년 르 프로코프(Le Procope)를 시작으로 다양한 커피 전문점이 여기저기에 생겨났어요. 이 커피 전문점들은 볼테르, 디드로 등 당대 지식인들이 모이는 비밀의 장소였고, 거기서 벌인 열띤 토론은 프랑스 대혁명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해요. 이처럼 프랑스 커피 전문점은 사상·문학·예술의 산실로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지요. 예를 들어 1885년에 문을 연 레 드 마고(Les Deux Magots) 카페에는 피카소, 헤밍웨이, 보부아르, 사르트르, 랭보 등 수많은 사상가, 문학자, 예술가들이 드나들면서 교류했지요. 헤밍웨이 작은 흑백 사진이 걸려 있는 자리에서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그의 작품을 읽는다면 남다른 감회를 느낄 수 있겠지요. _피카소, 헤밍웨이 등 수많은 명사들이 드나들었던 카페 ‘레 드 마고’ 점심 후 커피 한 잔은 못 참지 한국의 커피 역사는 100년이 조금 넘어요. 1895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을 때 그곳에서 커피를 처음 마셨다고 해요.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간 뒤에도 커피를 즐겨 마셨지요. 이 커피는 20세기 초 일반인에게도 보급이 되었고, ‘다방’이 생기면서 더욱 확산되었지요. 이런 다방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대부분 문을 닫았다가, 한국전을 계기로 미군이 한국에 주둔하면서 다시 활기를 띄게 됐습니다. 1980년대에는 커피 믹스가 생기고 커피자판기가 생기면서 커피의 대중화가 이루어져요. 그래서 오늘날 커피는 한국인이 가장 즐기는 기호식품 중 하나로 자리 잡았습니다. 많은 직장인들은 점심 후에는 꼭 커피 한 잔을 마시면서 오후 일과를 시작하지요. 회사가 밀접한 지역에 커피 전문점이 많은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답니다. Tip 알쏭달쏭 커피 메뉴 이름의 유래는?■ 에스프레소 : ‘빠르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express’에서 유래됐다. 높은 압력을 가하여 빠르게 추출하는 커피이기 때문. ■ 카푸치노 : 이탈리아 프렌체스코회 수도사들의 수도복에 달린 후드를 뜻하는 ‘cappucio’에서 비롯됐다. 커피 위의 하얀 거품이 후드를 덮은 듯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마키아토 : ‘표시한’, 또는 ‘얼룩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macchiato’에서 비롯됐다. 커피의 우유 거품에 갈색의 얼룩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 아포가토 : ‘끼얹다’는 뜻의 이탈리아어 ‘affogato’에서 비롯됐다. 차가운 아이스크림에 뜨거운 에스프레소를 끼얹은 커피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