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기현
서울대 철학과 명예교수
어디를 둘러보아도 AI 이야기다. AI가 출현 이후 내내 탄탄대로를 걸어온 것은 아니다.
70년대 출현한 이후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식어가는 몇 번의 과정을 거친 끝에
이제 AI는 우리 시대를 상징하는 표어로 자리를 잡고 있다.
AI와 디스토피아의 유혹
AI가 사회 전체를 뒤흔들 기세다. 격변의 시절이 오면 공포를 부추기는 온갖 이야기가 난무한다.
AI가 인간의 일을 대신하게 되면 사라질 직업과 안전한 직업, 또 새로 부각될 직업에 대한 말들이 넘쳐나면서, 나는 과연 앞으로 평안하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을 갖게 된다. 엄청난 지능을 갖춘 로봇이 만들어지면 인간은 그들의 노예가 될 수 있다는 공상과학적 우려도 이어진다. 과거를 돌아보자.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사람들이 하던 일을 기계가 대신하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미래를 두려워했고 일부는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산업 구조가 개편되면서 더 많은 직업이 생겨났고,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는 무너져 민주주의가 성숙할 배경이 형성되었다. 삶의 질은 전체적으로 개선되었다. AI와 바이오가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줄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에게 유토피아에 대한 이야기보다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가 더 많이 들려올까?
산업 발전과 혜택의 이야기는 너무 ‘당연한 것’처럼 들려 주목을 끌지 못한다. 반면 디스토피아적 이야기는 불확실한 미래 앞에 선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그래서 영화와 교양지에서 AI를 주제로 한 디스토피아 서사가 난무한다.
선택의 외주화와 자율성의 위기
비록 전체적으로 보면 AI가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가져다주겠지만, 빛이 있으면 그늘도 있기 마련이다. 특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관련해 긴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AI 시대, 우리는 시간이 갈수록 선택과 결정을 AI에 더욱 많이 의존하게 된다. 예를 들어, Netflix에는 13,600여 개의 항목이 있어, 이들을 살펴보고 무엇을 볼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행히도 Netflix의 알고리즘이 내가 이전에 어떤 것을 보았는지를 참고로 하여 내가 좋아할 만한 것을 추천하고, 나는 그들 중에서 구미가 당기는 것을 선택하여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YouTube를 보거나, 새로운 음악을 선택하여 듣고자 할 때도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해주는 것에 의존한다. 우리는 알고리즘에 선택을 맡기면서 그 편리함에 고마워하고 편안함을 느낀다. 선택과 결정은 어차피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던가?
시간이 지나며 데이터는 쌓여가고, 데이터를 다루는 AI는 점점 더 발전해 갈 것이다. 미래의 어느 날을 생각해보자. 수없이 많은 사람의 성향과 능력, 그리고 그에 따른 직업 선택, 그리고 결과적인 만족도와 성공 여부에 대한 데이터가 방대하게 축적될 것이다. 이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내가 어떤 길을 가면 성공하고, 어떤 길을 가면 실패할 것인가를 AI가 진단해준다. 내가 하고 싶은 일과 AI의 추천이 서로 다를 때 나는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소설가가 되고 싶다고 해서, AI가 그 길로 가면 삶이 황폐해질 확률이 95%라는 진단을 무시하고 소설가로의 길을 선택할 배짱이 있을까?
한 청년이 AI에 물어보니 지금 사귀는 여자친구와 결혼하면 불행하게 이혼할 확률이 95%라고 한다면, 그녀와의 결혼을 선택할 수 있을까? 현재의 추세라면 우리의 선택과 결정을 AI에 외주화(Outsourcing)하는 일은 더욱 그 범위를 넓혀가게 될 것 같다. 선택과 결정의 외주화는 우리 인간의 정체성에 대하여 중요한 문제를 던진다.
우리는 자신의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시대정신 아래 살고 있다. ‘내 인생은 나의 것’, 그래서 내가 무엇을 할지, 어떤 사람이 될지는 스스로 선택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의 뒷면에는 스스로의 삶을 자율적으로 결정하지 못하고 외부에 의존하는 것은 노예와 같다는 생각이 놓여 있다. 모든 개인은 주인 의식을 갖고 자신의 삶을 자율적으로 영위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상식이 되어 있다. 상식이 되어 있다고 하여, 그 가치를 가볍게 보아서는 곤란하다.
인간의 자율성을 지키는 길
역사를 돌아보면 대부분의 사회는 권위주의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왕과 귀족, 혹은 종교적 지배층이 구성원들의 삶을 규정했고, 개인이 틀을 벗어나 자신만의 삶을 꾸리는 것은 불온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인류는 그러한 권위주의에 저항하며 자유와 자율의 가치를 쟁취해왔다. 그런데 오늘날, 선택과 결정을 AI의 알고리즘에 의존하는 편리함에 익숙해져 가는 사이에 자유로운 개인, 스스로의 삶을 자율적으로 꾸려가는 개인이라는 이 귀한 가치가 위협을 받는다. 알고리즘에 의하여 선택과 결정이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행위가 결정되는 인간의 모습은 원격 조종되는 로봇의 모습을 닮아 있다. 로봇도 인간도 외부의 알고리즘에 의하여 행위와 선택이 좌우된다. 인간과 같은 로봇이 나올까 걱정할 일이 아니라, 인간이 로봇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할 일이다. 로봇이나 노예는 외부의 강제에 의하여 수동적인 존재가 된 반면, AI 시대의 인간은 자발적으로 AI의 알고리즘을 사용한다는 점에서 자율성이 포기된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다.
별로 설득력이 없다. 우선은 우리에게 AI의 알고리즘을 따를지 아닐지를 자율적으로 결정할 여유가 있을까? Netflix의 추천을 무시하고 데이터를 검색하여 무엇을 시청할지를 결정할 여지가 있을까? 그런 여지가 있음을 백번 인정하고, 자발적으로 AI의 결정을 따르기로 하였다고 해도 사정이 달라지지 않는다.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기로 결정하였다고 해도 노예는 노예이기 때문이다. 귀중한 자산인 자율성을 버리고 알고리즘에 선택과 결정을 외주화할 것을 강요받는 시대,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인터넷을 떠나 자신과 홀로 대화하는 시간을 갖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성찰하는 시간을 늘려야 한다. 영화나 음악의 선택과 같은 경우에, 과거의 선택으로부터 미래에 어떤 것을 원할지를 추려내는 것은 감각적 만족이라는 범주를 통하여 일반화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러나 삶의 기로에서 어떤 길을 갈지와 같은 문제는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예를 들어, 간호사가 될지 고민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성공에 비중을 둘 수 있지만, 그것보다는 병자를 돌보는 과정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런 과정에서 내가 부여하는 가치는 또 달라질 수도 있다.
아이를 키우는 과정에서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아니면 성장통을 함께 겪으며 아이와 연대감을 형성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다. AI의 알고리즘이 이러한 인간의 삶의 다층적이고 역동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인간을 쾌락 만족의 장치로 일반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경계할 필요가 있다. 올바른 경계가 이루어지려면, 우리 스스로 정형화된 일반인이 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자신과의 대화가 없이 지금처럼 인터넷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알고리즘이 가정하는 그저 일반적인 사람들의 경향을 좇아가는 수렁에 점점 더 깊이 발을 들여놓게 될 것이다.
작가 소개
김기현_ 서울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로서, 『인간다움』의 저자로, 공감·이성·자유를 축으로 인간다움의 본질을 탐구해온 철학자다. 지성사와 인지과학을 아우르는 연구와 대중 강연을 통해 현대 사회에서 인간다움의 의미를 쉽고 설득력 있게 전달하며, 인문학적 성찰을 대중과 나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