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김승주
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교수
비트코인의 극심한 가격 변동성을 보완하겠다며 2014년에 처음 등장한 것이 바로 ‘스테이블코인(Stablecoin)’이다. 이름 그대로 ‘안정적(Stable)’과 ‘화폐(Coin)’의 합성어인 스테이블코인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달러 같은 실물자산을 담보로 하는 ‘담보형’, 다른 하나는 별도의 담보 없이 알고리즘을 통해 공급과 수요를 조절해 가격을 안정시키는 ‘알고리즘형(무담보형)’이다.
스테이블코인을 주목하는 이유
담보형 스테이블코인(Collateralized Stablecoin)은 발행사가 법정화폐(달러 등), 국채 같은 안전자산, 혹은 다른 암호화폐를 담보로 예치해 가격을 고정(일명 ‘페깅(Pegging)’)하는 방식이다. 발행사는 담보 자산을 기반으로 동일 가치의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고, 사용자는 이를 액면가로 상환할 법적 권리를 가진다. 따라서 발행사는 상환 요청이 들어오면 합리적인 기간 내에 1:1 또는 동등한 자산으로 지급해야 한다. 발행사의 주요 수익원은 예치금 운용이다. 예를 들어 발행 규모가 1,000억 달러라면 이 돈은 단기 미국 국채 등에 투자되어 연 4~5%의 수익을 낸다. 미국 기준금리가 오를수록 수익도 늘어나며, 환전 수수료 등을 통해 추가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최근 스테이블코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뜨거워진 배경에는 트럼프 진영이 지지한 「지니어스(GENIUS) 법안」이 있다. 이 법안은 스테이블코인을 제도권 금융상품으로 편입하는 방향을 제시하며, 중앙은행은 ‘발권 주권자’와 ‘최종 대부자(Lender of Last Resort)’의 역할을 유지하되 발행과 기술 혁신은 민간에 맡기는 방식이다.
이는 전형적인 미국식 공공-민간 파트너십(PPP, Public-Private Partnership) 모델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다. 대표 사례로는 페이팔(PayPal)이 2023년 자회사 팍소스(Paxos)를 통해 출시한 달러 연동 담보형 스테이블코인 PayPal USD(PYUSD)가 있다. PYUSD는 미국 달러 예치금, 미국 국채, 현금성 유동자산으로 100% 담보되며, 항상 ‘1PYUSD = 1달러’ 가치를 유지하도록 설계되었다. 또한 외부 회계법인이 매달 담보 상태를 검증해 투명성을 확보한다. PYUSD는 페이팔과 벤모(Venmo) 계정 간 수수료 없는 송금, 실시간 결제, 온라인 쇼핑 등 다양한 결제 수단으로 활용 가능하다.
스테이블코인의 기대 효과
페이팔 사례는 빙산의 일각이다. 국제결제은행(BIS)에 따르면, 활성화된 스테이블코인의 수는 2024년 중반 약 60개에서 2025년 현재 170개 이상으로 급증했다. 나아가 아마존(Amazon), 월마트(Walmart) 같은 글로벌 대기업들 역시 달러 스테이블코인 도입을 검토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우리도 뒤처지면 안 된다’는 위기의식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미국 언론은 “이들 기업이 자체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하거나 기존 코인을 채택할 경우, 비자·마스터카드에 지불하던 결제 수수료를 대폭 절감할 수 있다”고 보도했다. 월마트의 경우, 스테이블코인 도입으로 수익성이 최대 60% 개선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한국 기업들이 이를 곧바로 따라 하는 것은 신중해야 한다. 왜냐하면 스테이블코인이 가장 효과를 발휘하는 영역은 국제 송금이나 복잡한 금융 거래처럼 중간 과정이 많고 비용이 높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리플(XRP)이다. 리플은 전 세계 은행 간 송금에서 느리고 비싼 SWIFT 시스템을 대신해 빠르고 저렴한 송금을 가능하게 하며 주목받았다.
반면, 네이버나 카카오 같은 국내 플랫폼 기업은 주로 내수 시장을 대상으로 하며, 해외 소비자나 공급업체와의 금융 거래는 거의 없다. 이미 국내에는 간편결제, 실시간 송금, 카드 결제 등 효율적인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어 굳이 블록체인 기반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도입해야 할 필요성도 크지 않다. 즉, 스테이블코인이 해결해야 할 문제가 국내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비기축통화인 원화를 기반으로 한 스테이블코인이 국제 결제 수단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도 불확실하다.
원화 스테이블코인 활용 기대 분야
가장 큰 문제는 한국이 준비 중인 원화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제도화 논의는 진전되고 있지만, 실사용의 접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법적 기반과 발행 주체, 준비금 요건 등은 비교적 잘 설계되어 있으나, 정작 중요한 ‘사용 수요’에 대한 논의는 부족한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돌파구는 의외로 ‘금융’이 아닌 ‘문화’, 특히 팬덤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최근 팬들이 콘텐츠에 투자하는 문화 금융 플랫폼이 확산되며, 소비 방식도 크게 바뀌고 있다. 팬들이 좋아하는 아티스트의 음악 저작권을 조각 구매해 수익을 공유하는 구조는 감정적 유대와 경제적 보상을 동시에 실현하는 새로운 문화경제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이 구조에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결합된다면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팬이 저작권에 투자하고 수익을 스테이블코인으로 받으며, 이를 콘서트 티켓이나 굿즈 결제에 활용하고, 팬미팅이나 커뮤니티 활동에 참여한다면, 하나의 독립적인 디지털-문화 화폐 생태계가 형성될 수 있다. 이는 단순한 결제 수단을 넘어, 팬과 아티스트, 콘텐츠와 경험, 정체성과 보상을 연결하는 새로운 플랫폼이 된다.
콘텐츠와 금융이 결합된 이 문화 화폐 모델은 한국이 보유한 고유 자산이자, 디지털 자산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현실적 전략이다. 단지 금융 허브를 지향하는 것을 넘어 문화와 감성, 기술이 융합된 복합 생태계를 만든다면, 그것은 홍콩이나 싱가포르와는 다른 방향의 리더십이 될 수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이 이 화폐를 ‘쓸 수 있다’는 조건보다 ‘쓰고 싶다’는 동기를 가지게 만드는 일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K-의료와의 결합이다. 한국은 이미 의료관광 분야에서 높은 경쟁력을 갖추고 있으며, 이를 디지털 화폐 인프라와 연계한다면 새로운 시장을 창출할 수 있다. 외국인 환자는 한국에 입국하기 전, 원화 스테이블코인으로 단기 의료보험 상품이나 특정 진료 패키지에 가입할 수 있다. 건강검진, 성형, 치과, 한방치료와 같은 서비스에 사전 가입해 보험료를 스테이블코인으로 납부하면, 한국 도착 후 병원에서 즉시 혜택을 누릴 수 있다. 환자는 환전이나 복잡한 보험 제휴 절차를 거칠 필요가 없으며, 병원과 보험사 역시 투명하고 간편한 정산 시스템을 활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해외 보험사와의 연계도 가능해, 한국 병원 ↔ 국내 보험사 ↔ 해외 보험사 간 정산이 블록체인 기반으로 실시간 처리될 수 있다. 결국 원화 스테이블코인은 한국 의료 서비스의 글로벌 확장성을 강화하는 ‘디지털 의료보험·결제 플랫폼’으로 기능할 수 있다. 이는 환자에게는 예측 가능한 비용과 편리한 경험을, 병원에는 안정적인 수익 모델을, 한국에는 ‘디지털 의료 금융 허브’라는 새로운 위상을 제공할 수 있다.
지금까지 스테이블코인은 주로 기술적·제도적인 언어로 설명되어 왔다. 그러나 디지털 화폐가 일상 속에 자리 잡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정체성과 취향, 감정과 공동체가 함께 작동해야 한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성공은 얼마나 정교하게 설계되었느냐보다, 사람들이 얼마나 그것을 자연스럽고 즐겁게 사용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작가 소개
장하용_고려대학교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로, 정보보호와 블록체인 전문가이다. 한국인터넷진흥원(KISA) 팀장을 역임하며 정보보호 분야의 실무 경험을 쌓았다.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 위원 및 국방혁신위원회 위원 등 다양한 정부 자문 활동을 통해 정보보호 정책 수립에 기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