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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텝의 바람과
만나는 도시
카자흐스탄
알마티 여행기

화려한 암석과 샤린 강이 카자흐스탄의 풍경을 굽이치는 샤린 캐니언의 아름다운 전망

 

글_서병용 작가


카자흐스탄은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큰 국가로 북쪽으로는 러시아, 남쪽으로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으며, 동쪽으로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와 맞닿아 있다. 광대한 내륙 국가이면서 자원 대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현재 수도는 아스타나이지만 카자흐스탄의 최대 도시는 경제, 문화의 중심이자 옛 수도였던 알마티이다. 

또한 고려인 강제 이주의 아픈 과거를 극복하고 특유의 집념과 근면성으로 모범적인 소수민족으로 뿌리내린 고려인들의 흔적과 삶도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오랜만에 다시 찾은 알마티의 첫인상은 상쾌함이었다. 쾌청한 날씨 탓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 새롭게 개장한 알마티 공항 신청사의 현대적인 시설과 빠른 입국 절차도 한몫했을 것이다. 공항에서 30여 분을 달려 시내로 들어서면, 잘 가꿔진 크고 작은 공원과 소비에트 시대의 건축물, 현대적인 고층 빌딩이 어우러진 풍경이 펼쳐진다. 그리고 사시사철 알라타우 산맥의 만년설을 바라볼 수 있다는 점은 이 도시만이 가진 특권이다.



우연히 걷다 만난 도심 속 산책로

아침의 알마티 거리는 의외로 차분했다. 번잡한 도스틱 대로를 따라 걷다 은은한 커피 향에 이끌려 한 블록만 뒤로 들어서면 카페 테라스마다 책을 읽거나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작은 계곡 옆의 가로수 잎 사이로 흘러내리는 햇살은 도시를 부드럽게 감싸며 오가는 이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만든다. 


알마티 테렌쿠르 산책로
 

이곳은 알마티 도심에서 여름의 더위와 번잡함을 피해 한적한 휴식을 즐길 수 있는 테렌쿠르(Terenkur)라고 불리는 곳으로 최근 현지인들이 즐겨 찾는 명소 중 하나이다. ‘테렌쿠르’라는 이름은 독일어 Terrainkur, 영어로 Terraincure에서 유래했으며, ‘특별히 마련된 경로를 따라 걷는 치료법’을 뜻한다. 즉, 단순한 산책로가 아니라 걷기와 달리기에 적합하게 설계된 건강 산책로인 셈이다. 알마티에서는 ‘헬스 패스(Health Path)’라 불리며, 도심 가까이에서 몸과 마음을 동시에 힐링할 수 있는 장소로 알려져 있다.

산책로는 총 4.5km 길이로, 해발 1,060m 높이의 산으로 이어진다. 고도 차이는 약 200m에 달해 점차 숲이 울창해지며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초반에는 비교적 가볍게 걸을 수 있지만, 위로 오를수록 경사가 심해져 트래킹의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도스틱 플라자

이곳은 심불락(Shymbulak) 리조트로 향하는 길목의 무즈타우(Muztau) 정류장에서 하차해 위에서부터 내려오는 방식이 가장 수월하다. 반대로 도스틱 플라자(Dostyk Plaza) 쇼핑몰 건너편에서 시작할 수도 있는데, 이 길을 따라 다양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있어 여행자라면 커피 한잔하며 여유를 만끽하기에도 제격이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 위치한 스키리조트 심불락의 고산에서 스키를 타고 있다.




우슈토베에서 만난 천사

알마티가 우리에게 더욱 특별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아마도 ‘고려인’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수많은 고려인이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로 내몰렸고, 그 첫 기착지가 이곳 알마티에서 북동쪽으로 약 300km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우슈토베라는 곳이었다. 

알마티에서 자동차로 3시간 남짓 거리로 하루 만에 다녀올 수도 있는 곳이지만 기차는 6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적어도 하루는 머물러야 한다. 또한 숙박 시설도 여의치 않다. 다행히 소개받은 선교사님이 계셔서 나는 옛 고려인들의 흔적을 조금이라도 찾고자 기차를 타기로 했다. 선교사님은 멀리서 온 여행객을 고향에 내려온 자식처럼 따뜻하게 맞이해 주셨다. 



헬렌(박희진) 선교사

헬렌(박희진) 선교사님은 목사이신 남편을 따라 러시아에서 선교를 시작한 뒤 알마티로 거처를 옮겨 활동하시다가 이곳에 정착하셨다고 한다. 고려인의 첫 정착지였던 이 지역에서 고려인 초기 강제 이주와 고난의 역사를 접하고 교회와 고려인 역사 단지를 설립했다. 지금은 공식 개관을 앞둔 ‘고려인 기념관’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계셨다. 선교사님은 선교활동과 기념관 관리 이외에도 이 지역의 소외계층을 위한 교육, 의료, 장학금 지원 사업을 펼치고 있어 현지 주민들 사이에서는 ‘우슈토베의 천사’로 불리고 있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선교사님을 통해 고려인의 지난 역사를 조금이나마 가까이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알마티로 돌아오는 길, 발걸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고려인 기념관


이국적인 풍경의 카인디 호수

알마티를 찾는 여행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방문한다는 명소가 있다. 바로 ‘중앙아시아의 그랜드 캐니언’이라 불리는 샤린 캐니언, 3개의 호수로 이루어진 ‘톈산의 진주’ 콜사이 호수, 그리고 신비로운 풍경을 간직한 카인디 호수다. 알마티 시내를 벗어나 자동차로 약 세 시간 반, 광활한 초원 지대와 협곡을 지나야 만날 수 있는 곳이다. 

그중에서도 카인디 호수는 카자흐스탄의 수많은 호수 가운데 가장 독특하고 이국적인 곳으로 꼽힌다. 1911년 큰 지진으로 산사태가 일어나 협곡이 막히며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호수는 해발 2,000m에 자리 잡고 있다. 길이 약 400m, 최대 수심 30m에 이르는 규모보다 더 눈길을 끄는 것은 호수 속에 잠겨 있는 숲이다. 산사태로 물이 차오르며 침수된 가문비나무들이 여전히 뿌리를 내린 채 서 있는데 가지와 잎은 사라지고 회색 줄기만이 수면 위로 우뚝 솟아 있어 마치 침몰한 선박의 돛대를 연상케 한다. 



카인디 호수

호수의 빛깔 또한 시시각각 변해 햇살이 비치면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고, 구름이 드리우면 짙은 청록으로 깊어진다. 계절에 따라 물빛은 더욱 다른 표정을 보여주는데, 여름에는 선명한 푸른빛이, 가을에는 금빛 숲과 어우러진 신비로운 색채를 보여주고 있어 사진가들이 많이 찾는 명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곳으로 향하는 길은 또 다른 즐거움과 고통을 선사한다.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푸르공


호수 근처까지 일반 차량으로는 접근이 어려워 인근 주차장에서 하차한 뒤 ‘푸르공’이라 불리는 특수차량을 타고 20분가량 비포장도로를 달려야 한다. 흥이 넘치는 운전사가 틀어 놓은 큰 음악 소리와 함께 달리는 동안 놀이공원에서처럼 즐거울 수도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큰 고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차량에서 내린 뒤에도 오르막길을 또 20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호수를 볼 수 있다. 짧은 구간이지만 말을 타고 호수까지 다녀올 수도 있다. 

호숫가에는 작은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어 비교적 가까이에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바람이 불면 물결이 일렁이며 수면 위 나무 기둥들이 흔들리는 듯 보이는데, 그 모습은 마치 시간이 천천히 흘러가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카인디 호수는 단순한 풍경을 넘어, 오랜 여운을 남기는 장소로 기억될 것이다.


작가 소개

서병용여행작가. 『이지 시베리아 횡단열차』, 『이지 조지아』, 『중앙아시아 3국』 여행 가이드북을 집필한 전문 여행작가로, 중앙아시아와 유라시아 지역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활동해왔다. 실용적인 여행 정보에 더해 인문학적 배경을 유려하게 풀어내는 글쓰기로 잘 알려져 있으며, 알마티를 비롯한 다양한 지역의 매력을 흥미롭고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