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민의 삶은 한때 초원의 이야기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요거트 한 컵, 접이식 캠핑 의자, 그리고 자유롭게 일하는 ‘디지털 노마드’의 방식까지. 길 위에서 살아온 이들의 지혜는 시대를 건너 오늘에도 이어지고 있다.
이동을 위한 음식, 오늘의 간편식이 되다
유목민에게 음식은 짐이자 생명이었다. 장기간 이동을 위해서는 가볍고 오래가며, 빠른 에너지를 제공해야 했다. 그들의 지혜는 지금 우리가 먹는 다양한 가공식품의 뿌리가 되었다. 몽골 유목민이 즐겨 만들던 보르츠(Borts)가 대표적인 예다.
소고기를 잘게 썰어 바람과 햇볕에 말려 단단한 덩어리로 만든 뒤, 이동 중 물에 넣어 끓이면 진한 육수가 되어 힘을 보충해주었다. 오늘날의 인스턴트 수프, 라면 스프, 군용 전투식량이 바로 이 원리에서 태어났다.
곡물 역시 중요한 에너지 자원이었다. 볶은 곡물을 곱게 빻아 가루로 만든 탈칸(Talkan)은 우유나 차에 타 먹는 간편식으로, 현대의 미숫가루와 시리얼, 즉석 오트밀의 시초라 할 만하다. 말젖을 발효시켜 만든 쿠미스(Kumis)는 유목민의 대표적 음료였다. 단순한 음료를 넘어 소화를 돕고 장거리 이동 중 체력을 유지하는 영양 공급원이었던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요구르트, 케피어(Kefir) 등 발효유 문화의 원형이 되었다. 또한 우유를 졸여 만든 응축유와 건조유는 현대의 연유와 분유로 이어져, 전 세계 어디서나 쉽게 소비되는 식품이 되었다.
유르트와 폴딩 가구, 캠핑 문화로 이어지다
유목민의 주거는 언제나 이동을 전제로 했다. 그 대표적인 공간이 바로 게르(유르트)다. 쉽게 조립·해체할 수 있는 원형 천막집은 몇 마리의 말만 있으면 어디든 옮길 수 있었다. 오늘날의 캠핑 텐트, 이동식 주택, 심지어 재난 구호용 임시 거처까지 모두 이 구조의 후예라고 할 수 있다. 유르트 내부에는 또 다른 지혜가 숨어 있었다. 바로 분리형·조립식 가구다. 이동을 위해 침상, 탁자, 수납장은 모두 접히거나 분해할 수 있었고, 다시 세우면 안정적인 생활 공간을 구성했다. 이 전통은 현대의 폴딩 체어, 폴딩 테이블, 조립식 모듈 가구로 이어졌다. 주말 캠핑장에서 펼치는 접이식 가구 한 벌은 사실 초원의 생활 철학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가죽과 펠트 가공은 방수와 보온성을 높여 혹독한 겨울을 견디게 했다. 이는 오늘날 아웃도어 의류, 방한화, 러그 문화로 발전했다. 또한 말 안장과 마구, 이동식 수레는 장거리 이동의 기반이 되었으며, 현대의 운송·여행 장비에도 영향을 남겼다. 휴대용 화덕과 주전자 역시 현대 캠핑 장비와 군용 야전 조리도구의 원조였다.
노마드 워크, 다시 길 위에서
오늘날 우리는 다시 ‘길 위의 노동’을 이야기한다. 과거 유목민에게 이동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택한 자유가 되었다. 노트북과 인터넷만 있으면 세계 어디서든 일할 수 있는 디지털 노마드가 그 주인공이다. 카페와 공유 오피스, 때로는 에어비앤비가 그들의 게르가 되고, 비행기와 기차는 현대판 말이 된다. 태국 치앙마이의 카페 거리, 발리의 코워킹 스페이스, 유럽의 기차 안에서 동시에 화상회의가 열리는 풍경은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특정 장소에 얽매이지 않고, 환경에 따라 일의 방식을 유연하게 전환하며, 전 세계 곳곳에서 만난 사람들과 협력하는 모습은 과거 유목민의 노동 철학을 닮았다. 이러한 흐름은 현대 조직문화에도 큰 변화를 불러왔다. 위계적 구조 대신 네트워크형 협업을, 고정된 책상 대신 프로젝트 단위의 유연성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성과는 ‘얼마나 오래 앉아 있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기민하게 연결되었는가’로 측정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 변화를 더욱 가속화했다. 원격근무와 재택근무가 일상이 되면서 일과 여행, 머무름과 이동의 경계가 사라졌다. 이제 사람들은 특정한 장소보다 연결 그 자체를 일의 본질로 여기고 있으며, 일터는 사무실이 아니라 와이파이가 잡히는 모든 공간으로 확장되고 있다.
소유보다 경험, 정착보다 이동
오늘날 유목은 더 이상 단순한 생존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아웃도어 브랜드들은 ‘노마드(Nomad)’라는 이름으로 자유와 모험을 마케팅하고, 미니멀리즘과 캠핑 같은 문화는 ‘소유보다 경험’을 중시하는 삶의 태도와 맞닿아 있다. 끊임없이 이동하며 순간과 관계를 중시했던 유목민의 철학은 현대인에게 묻는다. 정착이 정말 안전을 보장하는가?
가볍게 짐을 싸고 길 위로 나서는 순간, 오히려 더 큰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수천 년 전 초원 위를 달리던 유목민의 발자국은 지금도 세계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의 지혜는 음식으로, 주거와 가구로, 문화와 철학으로 형태를 바꾸어 오늘 우리의 일상을 지탱한다. 아침의 요거트, 주말의 폴딩 체어, 일상의 노트북. 모두가 길 위에서 전해 내려온 유산이다. 유목은 끝난 삶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우리 속에 살아 있는 또 하나의 인간의 방식이며, 빠르게 변하는 21세기의 세계에서 그 빛을 다시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