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오랑주리 미술관에 전시된 모네의 ‘수련’을 감상하고 있는 관람객
글_ 신기환 미술평론가
한여름의 무더위 속에서 우리는 때때로 물을 본다. 물은 그저 차갑기만 한 액체가 아니다. 반짝이는 빛, 출렁이는 그림자,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정적이 물 위에 머물고 있다. 그림 속 ‘물’은 단순한 풍경이 아니다. 감각을 환기시키고, 시선을 붙잡는다. 때론 감정을 다스리는 ‘이미지의 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서양과 동양이 물을 다루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물의 모습은 같아도 그것을 바라보는 관점과 표현방식은 완전히 다른 문화를 반영한다.
일본식 다리가 있는 수련, 지베르니_ 클로드 모네_ 1899_ 89.5cm × 92.5cm_ 파리 오르세 뮤지엄
서양화: 물은 빛과 시간, 감각의 재료
클로드 모네의 〈수련〉 연작은 한여름 연못의 수면 위를 가만히 응시하며, 그 안에서 빛의 변화와 감정의 떨림을 포착한 작품이다. 물은 움직이지만, 화면은 고요하다. 그는 파리 근교의 작은 마을 지베르니(Giverny)에 집을 짓고, 수련이 있는 연못과 다리를 만들었다. 그리고 생의 절반을 연못만 바라보며 살았다. 그는 더 이상 멀리 보이는 풍경을 담지 않았다. 대신 수면 위를 흐르는 빛, 시간의 변화, 자신의 시선을 좇는 감각이 중심이 되었다. 〈수련〉 속 물은 거울과 같다. 하늘과 나뭇가지, 구름을 비추는 수면은 얼핏 고요해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빛의 파편이 끊임없이 스며들고, 연꽃은 떠 있는 듯 미묘하게 흔들린다. 정적 속에서도 미세한 떨림이 살아 있는 이 화면은 여름의 시간과 감정을 천천히 담아낸다.
모네의 그림은 시각을 즐겁게 한다. 시선이 머물고, 감정이 퍼진다. 그리고 빛의 속도가 붓질의 흔적을 따라 잔잔히 번진다. 그림을 바라보는 우리는 어느덧 연못의 깊이를 가늠하지 않고도 그 수면 아래 감정의 진폭을 읽게 된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시선이 인상주의 내부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라, ‘우키요에’라는 일본 판화로부터 받은 시각적 충격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다. 실제로 모네는 일본 목판화를 수집했고, 그의 집 거실에는 우키요에 작품 수십 점이 걸려 있었다.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원근법에 얽매이지 않는 우키요에의 구도, 평면적인 색면 처리, 화면을 가로지르는 강렬한 선의 리듬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이러한 요소는 수련 연작에서 볼 수 있는 수평적인 구성, 중심 없는 화면, 감각의 단편화와 긴밀하게 연결된다.
수련_ 클로드 모네_ 1916_ 캔버스에 유채_ 마츠카타 컬렉션
동양화: 물은 기운과 여백, 관계의 흐름
서양에서 물이 빛을 담는 화면이었다면, 동양에서 물은 기운을 흐르게 하는 매개체였다. 그 중심에 가츠시카 호쿠사이(葛飾北斎)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가 있다.
날카롭게 솟구친 파도는 손톱처럼 휘어져 있고, 그 아래 작은 배들은 휘말릴 듯 위태롭다. 멀리 보이는 후지산은 움직이지 않고 묵묵히 그 광경을 내려다본다. 이 장면은 단순히 극적인 풍경이 아니다. 자연과 인간의 관계, 순간과 영원의 대비, 형태와 기세의 공존이라는 동양화 특유의 시선이 응축되어 있다.
호쿠사이는 물을 단순하게 묘사하지 않았다. 그는 파도의 기운, 리듬, 방향성까지도 한 장의 목판에 새겨 넣었다. 선은 반복되며 파열되고, 움직임은 화면을 휘감는다. 그림 전체가 물처럼 ‘움직이고’ 있다. 정적인 서양화와 달리, 동양화는 선과 기운의 흐름으로 생명감을 만들어낸다. 더불어 동양화에서 물은 종종 ‘그려지지 않은 것’으로 존재한다.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_ 가쓰시카 호쿠사이
19세기_ 24.6 cm × 36.5 cm_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런던 영국박물관 등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도〉나 이인문의 〈강산무진도〉와 같은 우리나라 산수화에서도 물은 하얀 여백으로 남겨지지만, 그 여백은 공백이 아니라 ‘기운의 통로’다. 물은 산과 산을 이어주고, 나무와 사람 사이를 흐르며, 전체 풍경에 생기를 부여한다. 묘사보다 중요한 것은 물의 역할, 흐름, 관계이다. 특히 정선의 〈박연폭포도〉는 한여름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의 시원한 기운을 수묵의 농담만으로 훌륭하게 전달해낸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시선은 저절로 아래로 끌려가고, 몸은 상상 속의 서늘함에 잠긴다. 여름의 계곡은 이렇게 수묵 안에서 살아 움직인다.
박연폭포도_ 겸재 정선_ 18세기_ 종이에 수묵, 119.5cm × 52cm_ 개인 소장
강산무진도_ 이인문
19세기_ 비단에 수묵담채, 44.1cm × 856cm_국립중앙박물관
물의 두 얼굴: 보는 물 그리고 느끼는 물
동서양의 물은 결국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다. 서양에서는 물이 빛을 담고, 시선을 붙잡고, 감각을 깨운다. 그림을 보는 이로 하여금 더 오래 응시하게 만든다. 동양에서는 물이 기운을 흐르게 하고, 관계를 이어주며, 감정을 따라가게 만든다. 보이는 것보다 느껴지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쪽은 수면에 반사된 세계를 오래 바라보게 하고, 다른 한쪽은 파도 속 움직임에 나도 함께 흐르게 한다. 두 시선 모두 여름을 해석하는 아름다운 방식이다.
우리는 여름이 깊어질수록 차가운 것을 찾는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바라는 건 시원한 물이 아니라, 그 물이 건네는 감정과 시선의 방향일지도 모른다. 여름을 담은 동서양의 그림 앞에서 우리는 묻는다. 당신이 머무르고 싶은 물은 어느 쪽인가? 조용히 가라앉는 연못 위인가, 거세게 부서지는 파도 위인가. 혹은 그 둘 사이 어딘가, 물과 물 사이의 여백일지도.
작가 소개
신기환_ 영국 역사와 문화, 예술을 전하는 아트가이드이자 해외테마여행 기획자.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현지 가이드 및 도슨트로 일하고 있으며 지방자치인재개발원, 한국과학기술기획평가원, 서울관광재단 등 활발하게 교육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MBC FM4U <세상을 여는 아침>에 고정출연 중이며 저서로는 《90일 밤의 미술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