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철학자 김시천,
《논어 학자들의 수다: 사람을 읽다》 저자
우리는 더 이상 성공이 곧 행복이 아님을 알지만, 행복이 무엇인지는 뚜렷하게 알지 못한다. 성공하기보다 행복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장자가 찾은 답이 자신의 행복을 찾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란다.
성공했는데 여전히 불행하다 느끼는 현대인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꾼다고 한다. 온갖 인문서들은 공자나 노자 같은 지혜로운 철학자들의 고전과 사상을 소개하며,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삶의 지혜를 다채롭게 소개한다. 하지만 ‘행복’이란 말이 본래 우리 전통에는 없던 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행복이란 말은, 고전 그리스어 ‘eudaimonia’나 영어 ‘happiness’의 번역어로, 우리 사회에서 널리 쓰이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다. 달리 말해 삶의 목표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게 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오히려 전통 사회에서 행복에 필적하는 것은, 오래 살고, 자손이 많으며, 부유하고, 높은 지위를 누리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오복(五福)’과 같은 말이었다. 다만 이 오복은 행복처럼 개인이 노력을 통해 성취하는 것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많은 경우 오복의 내용은 타고나는 것으로, 개인의 성취나 자기실현과는 거리가 있다.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혹은 때를 잘 만나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근대에 접어들어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개인의 삶은, 각자에게 주어진 것이며 스스로가 만들어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게 된다. 즉 내가 어떻게 노력하고 성취하는가에 따라 나의 삶의 질이 결정된다는 생각이 확산된 것이다. 사회적 약자 계층에 속했던 이가 기업의 주인이 되고,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판검사가 되는 시대가 된 것이다. 하지만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삶의 조건은 확연하게 개선되었음에도 여전히 우리는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도대체 성공했음에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은 왜일까?
성공을 규정하는 두 가지 힘
성공했음에도 불행하다고 느끼는 까닭은, 알고 보면 쉽게 답할 수 있다. 인생에서 성공하는 것과 행복한 삶은 별개라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높은 지위와 명예를 성취했음에도 스스로가 불행하다면, 그러한 성공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결정적인 열쇠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가 성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들은 행복에 이르기 위한 주변적인 조건일 뿐 행복한 삶의 핵심 내용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전통 사회에서든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든, 사람들이 추구하는 성공이란 힘을 쟁취하는 것이다. 우리가 권력이나 재력이라 부르는 두 가지 힘은 예나 지금이나 성공의 내용이다. 높은 지위와 명예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귀찮은 일 대신, 타인에게 지시하고 명령하는 일을 함으로써 성취감을 높여준다.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생활은 편안함과 안락함을 줌으로써 상당한 만족감을 주기에 적합하다.
엄청난 입시경쟁과 인정투쟁 그리고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즉 재력과 권력을 획득하기 위해 우리는 어마어마한 투자와 노력을 경주한다. 그러나 승자독식 사회에서 성공했음에도 우리의 삶이 불행하다면, 권력과 재력이 성공의 증표이기는 하지만 행복한 삶으로 이끄는 힘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권력과 재력이 현실을 감당하고 살아내는 힘이라면, 우리의 삶을 살아가는 힘은 그와는 조금 다른 종류의 힘인 것은 아닐까?
성공의 문법과 행복의 문법
어느 날 공자가 자신의 애제자 안회에게 말한다. “너는 집은 가난하고 거처도 비루하다. 관직에 나아가 신분과 처지를 바꾸어 보지 않겠느냐?” 하지만 제자 안회는 의외의 답을 한다. “선생님, 저는 자그마한 농사일로 먹고 입는 일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거문고 연주하며 놀고, 선생님의 도(道)로 스스로의 삶을 즐길 줄 압니다. 그러니 벼슬하지 않겠습니다.” 공자는 안회의 대답에 감탄하며 대견해 한다. 이른바 가난함을 편히 여기며 도를 즐긴다는 안빈낙도(安貧樂道)는 여기서 유래한다.
공자와 안회의 대화에서 중요한 것은, 벼슬이 상징하는 권력과 재력을 거부한 위대한 인격에 대한 칭찬이 아니다. 오히려 자족적 삶 속에서 권력이나 재력과 상관없이 삶을 즐기는 것(樂)이 가능함을 말하고 있다는 점이다. 스스로의 즐거움을 찾는 것이 곧 삶을 즐기는 것이고, 이 즐김을 현대의 학자들은 행복이라고 번역한다. 달리 말해 우리가 고전에서 ‘행복’을 찾는다면, 그것은 바로 ‘즐거운 삶’이다.
현실의 경쟁에서 성공했는데 삶이 불행하다면, 그 둘은 문법이 다른 것이다. 즉 성공의 문법과 행복의 문법은 다르다. 우리가 추구하는 신분, 지위, 권력, 부는 분명 우리에게 강력한 힘을 준다. 하지만 그런 힘은 현실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군비와 다를 게 없다. 이기고, 지배하고, 정복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이 불행하다면, 그런 힘들은 우리를 행복으로 이끄는 힘이 아님이 분명하다.
행복하고자 하는 자,
자신의 매력[德]에 투자하라!
춘추전국시대의 제자백가들은 하나 같이, 새로운 시대를 이끌 가치로 ‘덕(德)’을 내세웠다. 덕을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하리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현실에서 승리할 수 있는 비법으로 ‘덕’을 추구했다. 권력과 재력은 이러한 덕의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수많은 역사서가 보여주듯 권력과 재력을 가졌던 많은 사람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즉 이와 같은 덕은 성공을 보장하지만, 우리의 삶을 행복으로 이끄는 힘은 아니었던 것이다.
《장자》는 이 ‘덕’이란 힘을 전혀 새로운 차원의 의미로 이해한다. 그것은 바로 ‘매력’으로서의 힘이다. 코로나 팬데믹이 세상을 덮치기 직전, 2019년 6월 2일 영국의 웸블리 스타디움에는 6만 명이나 되는 엄청난 인파가 몰렸다. 저 먼 아시아의 끝에서 온 아티스트 그룹 BTS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인파는 그 거대한 스타디움을 꽉 채웠다. 전 세계 수많은 아미(BTS의 팬)를 모이게 만든 이 힘은, 바로 예술이 갖는 매력(attraction)이다. 이 매력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덕’이다.

현실과 삶은 문법을 달리한다. 삶은 능력으로 살아 가는 것이 아니라 매력으로 살아가는 것 아닐까? 권력은 타인의 삶을 쥐고 흔드는 힘이지만, 매력은 타인의 삶을 나의 삶으로 초대하는 힘이다. 권력이나 재력과 같은 능력이 오만한 주체가 타인을 지배하려는 힘이라면, 매력은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인간적인 공감의 힘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공감의 힘 안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을 함께 누린다. 성공하진 못해도 불행하지는 않을 듯하다.
우리는 경제적인 성공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포트폴리오를 통해 수익을 극대화하려는 노력에는 엄청난 열정을 갖고 투자한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한 삶을 위한 투자는 게을리한다. 스스로 즐거워하는 일, 주변 사람들과 자신의 삶을 함께하는 일, 자기 주위로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힘을 만드는 일에는 투자하지 않는다. 성공을 위해 투자가 필요하듯 행복을 위한 투자 또한 필요한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장자》의 메시지에 귀 기울여 볼 필요가 있다. 행복하고자 하는 자, 자신의 매력을 기르는 일에 투자하라!
작가 소개
김시천_ 숭실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상지대학교 교양대학을 거쳐 현재 숭실대학교 베어드학부대학에서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고 있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동양철학 전문 팟캐스트 《학자들의수다》의 기획 및 제작, 진행을 맡아 매주 다양한 주제로 대중과 소통하는 인문학 활동을 하기도 했다. 2004년 첫 책, 《철학에서 이야기로―우리 시대의 노장 읽기》로 주목받은 이후 《이기주의를 위한 변명》, 《노자의 칼 장자의 방패》, 《논어 학자들의 수다: 사람을 읽다》 등의 대중서와 학술서를 선보였으며, 《장자, 거절할 수 있는 자유》, 《K-철학 어떻게 할 것인가》 등의 책이 출간을 앞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