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유산 선화 보유자 성각스님
“AI 시대가 오고, 기계가 생각을 대신하는 세상이 와도 마음은 여전히 가장 깊은 미지의 우주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찾고,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남해 망운사 주지인 성각스님은 한국 불교계에서 독보적인 선서화 예술의 대가다. 무형유산 선화 보유자로서, 수행의 길과 예술의 경지를 하나로 꿰뚫는 그의 붓끝에는 고요한 울림이 서려 있다. 수용자 교화 활동부터 붓 한 획에 담긴 선법까지, 성각스님의 삶은 곧 하나의 큰 ‘원(圓)’처럼 자비와 무욕의 세계로 흐른다.
선을 그리고, 법을 전하다
“선서화는 선법(禪法)의 도구입니다. 글과 그림이 아니라, 수행과 깨달음의 길이지요.” 성각스님은 ‘선서화’를 단순한 예술이 아닌 ‘법을 전하는 수행의 도구’라고 단언한다. 30대 중반의 나이에 출가한 그는 고산대선사에게 선맥을, 화엄대선사에게 화맥을 전수받고 망운사에서 선필의 길을 걸어왔다. 40여 년간 한 획 한 획을 통해 깨달음을 탐구해온 그는, 복잡한 세상의 번뇌를 간결한 선으로 지워내며 대중에게 고요함을 전하고 있다.
“모든 사물은 둥급니다. 지구도, 마음도, 본성도. 그래서 저는 ‘원’을 그립니다. 그 안에 불이(不二)의 진리, 탐·진·치 삼독을 벗고 나아가는 수행의 메시지를 담습니다.”
그의 선화는 단순함 속에 우주의 이치를 품는다. 여백의 침묵 속에 진리가 깃들고, 붓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수행의 호흡과 같다. 스님은 선서화를 ‘법의 성품이 꽃피는 자리’로 정의하며, 붓을 들기 전의 마음가짐부터 그 자체가 이미 선법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닦는 시간이 곧 삶의 정진이라 이야기한다.
고요한 화폭으로 죄와 고통을 어루만지다
“가온길의 긴 복도를 지나며 선서를 본 수용자들이 고백합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고요.”
성각스님의 또 다른 수행터는 바로 교도소다. 1991년부터 지금까지 30년 넘게 마산과 진주교도소, 최근에는 거창구치소까지, 스님은 교정위원으로 활동하며 수용자들에게 법회를 열고 심리적 지지와 안정의 시간을 나눠왔다. 2024년 ‘교정의 날’에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하며 그 공로를 인정받았다.
그는 단지 법문만을 전하지 않는다. 망운사 신도들과 수용자들을 자매결연시켜 영치금을 보내고, 명절이면 함께 차례를 올리는 등 실질적인 돌봄을 30년 넘게 지속해왔다. 진주교도소의 ‘가온길 갤러리’에는 스님의 선화 20여 점이 걸려 있으며, 그 그림을 보며 감상문을 쓴 수용자들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얻었다고 고백한다.
그는 말한다. “교화란, 잘못을 나무라는 게 아니라 고통을 함께 품어주는 일입니다.” 그림을 통해 번뇌가 물러가고, 마음이 밝아지는 순간, 그것이 곧 치유의 시작이라고 스님은 믿는다.
붓끝에 담긴 ‘무정설법’
“선서화는 공(空)의 그릇입니다. 담기도 하고, 비워내기도 하는 수행의 상징이지요.”
성각스님은 선서화를 ‘비움의 미학’으로 정의한다. 그는 현대 사회의 과잉과 집착, 번뇌의 소음을 단숨에 끊어내는 칼로서의 그림을 그린다. 단순한 여백, 먹의 농담, 붓질의 리듬 - 모두 수행의 일부이며, 보는 이에게 마음을 비워내는 메시지를 던진다.
“현대인들은 너무 많은 것을 담고 있습니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 이 삼독은 모든 병의 근원이죠. 저는 선화를 통해 그것을 비우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고요한 마음으로 가는 첫걸음입니다.”
그의 화법은 자유롭되 경계가 없다. ‘문법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에서 풀어내는 붓질’, 이것이 선서화의 특수성이다.

성각스님 선화_ 출처 : 동아일보
일체유심조, 해탈의 한 줄기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 지어낸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그것이 제가 전하고 싶은 말입니다.”
『화엄경』의 “일체유심조”는 성각스님이 가장 자주 언급하는 구절이다. 부처의 길은 특별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라, 모든 중생이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 있다는 가르침이다.
그는 이 구절을 단순한 명상이 아닌, 실천의 언어로 받아들인다. 괴로움, 분노, 고통—이 모든 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만든 마음의 그림자라는 것이다.
스님은 말한다. “AI 시대가 오고, 기계가 생각을 대신하는 세상이 와도 마음은 여전히 가장 깊은 미지의 우주입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길을 찾고, 삶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그는 묻는다. “오늘 당신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습니까?” 그 질문은 붓끝에서 시작되어, 화선지 위에 조용히 번져간다.

붓을 드는 순간, 모든 인연은 시작된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단지 붓을 들어 첫 점을 찍는 그 마음이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각스님은 선서화에 입문하는 이들에게 “잘 그리려고 하지 말고, 참되게 그리라”고 말한다. 그림의 완성은 형태가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으며, 그 마음이 맑다면 그 한 점도 이미 수행의 결정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화선지 한 장, 먹물 한 방울이면 충분하다고. 그것이 타인을 향한 연민이든, 자기 자신을 위한 성찰이든, 그 시작이 바로 ‘견성(見性)’의 첫걸음이다.
성각스님은 지금도 제자들을 양성하고 있으며, 선각선화보존회를 통해 전통 선서화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이 작업이 예술의 보존이 아니라 수행의 확산이라고 말한다.
“고요함에 머물고 싶다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든 이 세계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합니다.”
그의 말처럼, 선서화는 그림이 아니라 마음을 그리는 일이자, 인연을 짓는 길이다. 붓을 드는 순간, 이미 그 길은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