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이안수 북스테이 모티프원 설립자,
도서 《여행자의 하룻밤》 저자
하늘
나는 아내와 십수 년을 떨어져 지냈고, 아이들과도 자주 따로 살아야 했다. 부부가 서울에서 일하는 동안 세 아이들은 고향에 계신 부모님께 맡겨졌다. 내가 외국에 체류할 때는 아내 혼자 한국에 남았다. 아이들이 성장한 뒤에도 각자 미국, 프랑스, 영국 등지에서 홀로 지내며 공부하고 일했다. 삶을 유지하기 위해, 각자의 길을 걷기 위해 우리는 한 지붕 아래 모여 사는 시간을 스스로 포기해야 했다.
그 때문인지, 우리 가족은 유독 하늘을 자주 바라본다. 아들이 고등학생이던 시절, 가족 단체 메시지에 이렇게 적었다. “하늘 보고 여유 좀 가집시다, 가족!” 아내도 8년 전, “하늘 좀 봐요. 우린 이런 우주 속에 살고 있어요”라는 메시지를 보낸 적이 있다. 이후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하늘 사진을 찍어 가족 채팅방에 올리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다.
사는 곳은 제각각이었지만, 머리 위의 하늘만은 같았다. 그 단순한 사실이 막연하지만 확실한 위로가 되었다. 하늘 사진 한 장에는 각자의 안부가 담겼고, 살아가고 있다는 증명이 담겼다. 그리고 여전히 서로를 떠올린다는 조용한 속삭임이 실려 있었다.
가족이 함께 모일 때마다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그렇게 남은 가족사진은 손에 꼽을 정도다. 우리는 여전히 떨어져 있고, ‘같은 하늘을 이고 있다’는 사실만이 그 거리를 덜어준다.
약속
그런 우리가 마침내 같은 땅에 발을 딛게 되었다. 외국에서 공부하고 일하던 딸과 아들이 모두 한국으로 돌아왔고, 아내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었다. 그때 오래전 결혼 초에 나눴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언젠가 모든 일을 마무리하면 이 나라를 떠나 수행자처럼 떠도는 삶을 살아보자던 약속이었다. 하지만 삶은 늘 빠듯했고, 그 이야기는 입 밖으로 꺼낼 틈이 없었다.
“아이들이 다 한국으로 돌아오니, 이제 우리 차례가 온 것 같소.” 내가 말을 꺼내자 아내도 기꺼이 동의했다. 퇴직과 함께 아내는 ‘자전거 국토 종주’와 ‘서울에서 고향까지의 346km 도보 순례’로 체력을 점검했다. 나 역시 그동안 일과 주변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한국을 떠나며 하나의 조건을 스스로에게 걸었다. ‘10년’이라는 시간이었다.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진짜 수행이 되기를 원했기에, 쉽게 돌아오지 못하도록 스스로에게 높은 벽을 세웠다. 필요에 따라 잠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서 대안을 찾고 불편 속에서 사는 법을 익히고자 했다. 가족들과도 해자(垓字)를 둔 것이다. 물리적 거리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에서도 독립을 시도하는 다짐이었다.
눈물
그렇게 한국을 떠난 지 3년째. 우리는 유럽과 북미를 지나 중미로 이동했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성당과 수도원들, 불을 뿜는 화산들 사이에 있는 18세기의 도시, 과테말라 안티구아는 마치 현실을 초월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이 비현실적인 풍경은 때때로 묵언의 선사(禪師)처럼 우리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내는 매일 아침 옥상에 올라 화단에서 오레가노와 민트 잎을 따 차를 우리고, 그 차 한 잔과 함께 몇 시간씩 조용히 사색에 잠긴다. 그녀만의 의식이다.
어느 날, 아내가 방으로 돌아와 말했다.
“한 시간을 울었어요.”
나는 놀란 마음으로 아내의 붉어진 눈을 바라보았다.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손도 잡아보고 싶고, 껴안고 싶고, 함께 밥도 먹고 싶어서…”
그 말 한마디에 내 마음도 무너져내렸다. 우리는 가족과 떨어져 사는 삶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모든 시간은 ‘견딘 것’에 가까웠다.
결혼식
하지만 진짜 고비는 아들의 결혼식이었다. 아들 영대는 10여 년 전 유학 중 만난 연인과 오랜 시간 연을 이어왔다. 함께 공부하고, 서로의 성장을 도운 동료 같은 관계였다. 언젠가 아들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효정’이 될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결혼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우리는 결혼식 참석 여부를 두고 오랜 대화를 나눴고, 끝내 처음 정한 원칙대로 ‘10년 수행’의 불문율을 넘지 않기로 했다. 그 선택이 아들과 며느리를 향한 사랑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시작한 길을 중단하지 않기로 했다.
양가 상견례와 결혼식은 영상 통화로 진행했다. 아내는 며느리 효정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는 딸이 대신 낭독했다.
“효정아. 너를 어떻게 불러야 할지 고민했단다. ‘며늘아기’라고도 불러봤지만 왠지 마음에 와닿지 않았어. 나는 너를 딸처럼 생각하고 있으니, ‘효정’이라고 부르는 것이 오히려 내 진심을 담는 것 같구나. 멕시코에서 사돈어른과 영상 통화를 나눈 뒤, 자꾸만 눈물이 나더구나. 우리 부부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기로 한 것에 대해 너희가 흔쾌히 이해해줘서 너무 고마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례식 현장에서 너와 아들을 꼭 안아주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단다.
우리는 형식에 얽매이거나 명분을 앞세우며 살아온 사람들은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남편 몰래 눈물을 훔치며 약해지는 내 마음을 다잡는다.
효정아. 나는 네가 아들과 함께 살아갈 ‘결혼’이라는 새로운 미답지를, 두려움보다 설렘으로 맞이하길 바란다. 우리도 45년을 함께했지만 여전히 매일이 처음 맞이하는 길 같단다.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곳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수 곁에서 자연과 자급의 삶을 살았던 자리이다. 곧 스콧과 헬렌 니어링 부부가 노년을 보냈던 ‘굿 라이프 센터’로 향할 예정이야. 위대한 스승들을 만나는 일도 기쁘지만, 매일 맞이하는 삶 속에도 늘 배움이 깃들어 있다는 걸 우린 깨달아가고 있어. 효정아. 이제부터 너는 나의 동료야. 함께 미지의 길을 탐험하며, 서로의 삶을 응원하자꾸나. 사랑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너희를 향한 우리의 마음은 언제나 변함이 없을 것이다.
_이 편지가 나의 포옹이 되길 바란다.”
마음의 상태
지금 우리는 카리브해의 심장부, 도미니카공화국의 산토도밍고에 머물고 있다. 이곳 사람들은 말한다. “카리브해는 단순한 장소가 아니라, 하나의 마음 상태이다.”
우리에게도 가족은 어떤 지리적 개념이 아니다.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하다. 오늘도 아내는 이곳의 하늘을 찍어 가족에게 전송했다. 하늘은 여전히 우리를 잇는 끈이다. 떨어져 있어도, 멀리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가족이다.
작가 소개
이안수_ 여행과 음악, 디자인 잡지, 인문서를 만드는 출판사에서 기자와 편집장으로 일했다. 취재, 여행, 공부를 위해 여러 나라를 떠돌며 가족과 종종 떨어져 살았다. 그러다 헤이리에 세계의 예술가와 여행자들이 모여드는 북스테이 모티프원(motif#1)을 짓고 운영하며 헤이리 예술마을 촌장을 지냈다. 현재는 정년을 맞아 은퇴한 부인과 함께 10년 동안 나라 밖을 살아보는 삶을 실험 중이다. 저서로 《여행자의 하룻밤》, 《아내의 시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