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변치 않는 품격,
클래식 시계의
가치

글 _ 정희경 시계 칼럼니스트,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 심사위원


전통적인 방식으로 제작된 시계는 단순한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를 넘어, 가치를 담은 예술 작품으로 여겨지며 오늘날에도 건재하다. 그렇다면 좋은 시계를 소유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기계식 시계의 위기

“가격은 당신이 지불하는 것이고, 가치는 당신이 얻는 것이다.”

이 문장은 세계적인 투자자 워런 버핏이 자주 언급했던 말이다. 그는 가치 투자를 강조하며 이 철학을 다양한 분야에 적용했다. 가격보다 더 큰 가치를 얻는다면, 가격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다. 이는 기계식 시계에도 해당된다. 스마트워치가 시간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는 시대에도 전통적인 시계가 여전히 사랑받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시간을 측정하는 도구는 고대부터 존재했다. 모래시계, 물시계, 태양의 그림자를 이용한 해시계 등 다양한 방식이 있었지만, 13세기 무렵부터 태엽을 이용한 기계식 시계가 등장하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태엽을 자주 감아야 하고, 온도 변화나 중력 등의 영향을 받아 정확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정밀한 시계 제조 기술이 꾸준히 연구되었다.

19세기 말 전기의 발명 이후, 사람이 직접 태엽을 감지 않아도 되는 전기 시계가 등장했다. 1969년에는 작은 전지를 동력으로 삼는 쿼츠 손목시계가 출시되며 혁명을 일으켰다. 기계식 시계가 하루 10~15초의 오차를 보이는 반면, 쿼츠 시계는 1년에 몇 초 정도의 오차만 발생할 정도로 정밀했다. 이러한 기술적 우위로 인해 쿼츠 시계가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었고, 많은 기계식 시계 브랜드가 도산하는 ‘쿼츠 파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기계식 시계는 다시 주목받기 시작했다.


파텍 필립 월드 타임 시계. 1940년대 고안된 월드타임 장치를 그대로 탑재한 모델로 기요셰 조각 등 전통적인 공예 기술로 제작했지만 청바지 패턴을 적용하는 등 젊은 감성으로 새롭게 디자인됐다. 


전통 시계의 부활

기계식 시계 산업이 다시 살아난 데에는 스와치 그룹이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일본산 쿼츠 시계에 대항하기 위해 저렴하면서도 창의적인 디자인의 시계를 출시했고, 전통적인 시계 브랜드를 재건하며 명성을 이어갔다. 이후 바쉐론 콘스탄틴, IWC, 예거 르쿨트르 등도 그룹에 흡수되어 고급 시계 시장의 명맥을 유지했다. 파텍 필립, 롤렉스, 쇼파드 등 독립적인 시계 브랜드들은 독창적인 기술과 예술성을 바탕으로 꾸준히 명품 시계를 선보였다.

2015년 애플워치 출시로 스마트워치가 전통 시계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기계식 시계의 입지는 더욱 견고해졌다. 스마트워치는 전자기기로서 기능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고, 전통 시계는 더욱 정교한 기술과 장인 정신을 바탕으로 고급화 전략을 펼쳤다.


취향을 드러내는 도구

기계식 시계가 오랜 시간 사랑받는 이유는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도 문화적 가치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 이전에는 기계식 시계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지 않았고, 정밀도가 떨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손목시계가 등장하면서 교통과 통신의 발전과 함께 필수품이 되었고, 점점 더 정교해졌다. 쿼츠 시계의 등장 이후, 시계는 단순한 시간 측정 도구에서 벗어나 패션 아이템이자 개인의 취향을 반영하는 액세서리로 자리 잡았다. 이제는 스마트 기기의 발달로 인해 시계가 필수품이 아닌 소장품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앤틱이나 빈티지 시계는 친환경적인 장점까지 갖추며 더욱 가치가 높아지고 있다.



브레게 클라시크 더블 투르비용 쾨드오흘로지 5345 시계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시계 제작자로 여겨지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고안한 투르비용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위블로 - MP-15 다카시 무라카미 투르비용 사파이어 

레인보우 시계는 팝 아티스트로 유명한 다카시 무라카미와 협업한 한정판이다. 


공예 기술이 더해진 예술품

현재 시계 업계는 기술의 평준화로 인해 더욱 정교한 제작이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중력에 의한 오차를 줄이는 투르비용 기술은 과거에는 극소량만 생산되었으나, 현재는 중가 시계에도 탑재될 정도로 보편화되었다. 이에 따라 전통적인 시계 브랜드들은 단순한 기술력을 넘어 장인 정신을 담은 디자인과 마감을 강조하고 있다.

스켈레톤 시계의 증가와 함께 부품 하나하나를 정교하게 마감하는 기술이 발전하고 있으며, 수작업 연마 기법이 더욱 강조되고 있다. 다이얼과 케이스 또한 공예적인 요소가 강화되면서, 미세 조각, 에나멜 채색, 미니어처 페인팅, 보석 세팅 등의 기술이 접목되어 예술품의 반열에 오르고 있다.


기계식 손목시계가 부활하면서 탁상시계도 다시금 제작되고 있다. 

반클리프 아펠은 주얼리 브랜드답게 귀금속과 보석으로 만든 탁상시계를 제작했는데 잎이 펴지면 새가 날갯짓을 하는 모습을 기계식 자동인형, 오토마톤을 구현했다. 

 

시대에 부합하는 위대한 유산

최근에는 전통적인 금, 플래티넘, 스틸 외에도 티타늄, 카본, 사파이어 크리스탈, 세라믹 등 친환경적이고 인체 친화적인 신소재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또한, 다양한 예술가 및 디자이너와의 협업을 통해 젊은 세대에게 어필하는 시계들도 증가하고 있다. 한정판 시계는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낙찰되는 경우가 많아 투자 대상으로도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외형적인 요소보다도, 클래식 시계가 높은 가치를 지니는 가장 큰 이유는 오랜 전통과 역사가 담긴 위대한 유산이라는 점이다. 또한, 졸업, 결혼, 승진 등 중요한 순간과 연결된 기억의 물건으로서 의미를 갖는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대표적인 클래식 시계 브랜드



1. 전통적인 브랜드

100년 넘은 역사를 가진 브랜드로 지금까지 꾸준히 전통적인 방식으로 기계식 시계를 만들어 온 제조사들이다. 1755년 설립 이후 2025년 270주년을 맞이한 바쉐론 콘스탄틴, 1775년 가장 위대한 시계제작자로 여겨지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가 설립한 브레게, 1839년 설립되어 경매시장에서 시계 역사상 가장 높은 가격에 낙찰된 시계를 제작한 파텍 필립 등이 대표적이다.


2. 주얼리 브랜드

유서 깊은 주얼리 브랜드는 오랜 기간 시계를 판매해왔고 그 경험으로 시계도 제작했다. 주얼리 브랜드의 시계는 직접 또는 전문회사에 의뢰해 제작한 무브먼트, 귀금속과 보석을 사용해 독창적이고 아름다운 디자인을 소개하고 있다. 1904년 현대적 손목시계의 시대를 연 까르띠에, 시적인 컴플리케이션을 소개하는 반클리프 아펠, 얇은 시계로 세계 기록을 갱신하고 있는 불가리 등이 있다.


3. 패션 브랜드

시계가 TPO에 맞춰 착용하는 액세서리가 되면서 패션 브랜드도 시계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더 나아가 전통적인 방식으로 자사 무브먼트를 제조하며 진지하게 시계를 제작하는 브랜드가 늘어났다. 에르메스, 샤넬, 루이 비통, 몽블랑 등은 시계의 핵심 부품을 제작하는 제조사의 지분을 인수하거나 합병 등을 통해 트렌디한 시계를 소개하고 있다.


4. 아방가르드 브랜드

50년이 안 된 짧은 역사를 가졌지만 전통적인 방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대신 시간을 보는 색다른 방법, 기발한 디자인으로 관심을 모으는 브랜드다. 이들 브랜드는 서로 협업도 하면서 시곗바늘 대신 큐브와 창, 자동차나 비행기를 닮은 케이스 등 독창적인 디자인과 스타일을 선보인다. 주로 독립시계 제조사가 많은데 MB&F, 모저 앤 씨, 아크리비아 등 젊은 시계제작자와 기획자가 이끄는 브랜드가 있다.


작가 소개

정희경 _ 시계 컬럼니스트이자 2016년부터 시계업계의 오스카상이라 여겨지는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에서 심사위원으로, 스위스 고급시계재단(Fondation de la Haute Horlogerie) 아카데미 한국 앰버서더와 트레이너로 활동했으며,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롤렉스, 까르띠에 등 시계업계 직원들에게 시계 지식과 트렌드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