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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화의 용기를 위해서
필요한 것들

글_ 김경일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도서 《마음의 지혜》 저자

 

우리 모두는 살아가면서 변화를 원한다. 물론 더할 나위 없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고 계신다면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런 절묘한 상황에 계신 분들이 얼마나 계시겠는가. 하지만 그렇게 간절히 원하면서도 좀처럼 이뤄지지 않는 것이 변화다. 왜일까? 우리가 못나서일까? 무능력해서일까? 그렇게 간단한 생각으로 자신을 자책하고 포기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데 잘되지 않는 것들은 고집스러운 훼방꾼이 우리 옆에 있기 때문이다. 그 훼방꾼을 살짝만 비켜서게 해도 우리에게는 변화를 위한 용기가 직접 실현되는 경우가 정말 많다. 그중 의외의 실마리를 본 지면에서 한번 알아보자. 


반응과 결정을 구분하면 변화는 쉬워진다.

몇 해 전 필자가 직접 겪었던 에피소드다. 장애를 가진 분들이 출근길에 지하철 탑승 이동권과 관련된 항의 집회를 시내에서 몇 차례 여신 적이 있다. 물론 집회 방식의 적법성에 관해서는 찬반양론으로 얼마든지 나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는 그것을 다루려는 것이 아니다. 필자는 한 기업의 부장님과 세미나 참석차 지하철로 이동 중이었다. 그런데 그 시위로 인해 우리 일행은 그 기업의 꽤 중요한 세미나에 제시간 도착이 어려운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 세미나의 주최 당사자이자 심지어 진행자의 역할까지 맡고 있던 그 부장님은 매우 당황해했다. 당장이라도 짜증 섞인 목소리로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부장님의 표정은 그리 간단해 보이지 않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모습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필자는 이내 알아차렸다. 그 부장님은 평소에 장애인 권리에 관심이 많고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난감한 상황에 꽤 많은 심리학자들이 떠올리는 문구가 하나 있다. 바로, ‘Fear is reaction. Courage is a decision(공포는 반응이다. 용기는 결정이다).’ 윈스턴 처칠의 말이라고 알려진 이 말은 심리학자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참으로 타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무섭거나 충격적인 일을 경험하면서 느끼는 공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경험하게 되는 매우 자연스럽고 정상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용기는 결정이다. 무슨 뜻일까? 무언가를 경험하면서 느끼는 감정과 최종적인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결정은 분명히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포(감정)와 용기(결정)는 얼마든지 양립할 수 있다. 뇌에서의 발생 순서도 다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감정과 결정을 종종 동일시해야 한다는 착각을 한다. 하지만 이는 명백한 오류다. 그분들의 시위를 보면서 느끼는 불편한 감정은 반응이다. 자신이 피해를 보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원하고 지지를 하는 것은 결정이다. 그래서 그 부장님의 난감해하는 마음을 필자는 이런 말로 덜어드렸다.

“부장님. 속 시원하게 짜증 내세요. 그리고 그분들을 열심히 응원하세요.”



반응과 결정을 별생각 없이 동일시하면 자신이 현재 순간적으로 느낀 감정과 평소에 늘 지니고 있던 가치 중 어느 하나를 왜곡하는 오류를 범하기 쉬워진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실수가 화가 나거나 두려우니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을 의심하는 경우다. 변화가 두려워 자신은 별 볼일 없는 사람이거나 무능한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는 경우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또 다른 형태의 오류도 있다. 현재 자연스럽게 느낄 수밖에 없는 반응, 즉 감정들이 자신의 신념체계와 맞아떨어지지 않으니 경험한 감정 자체를 부정하는 오류다. 예를 들어, 불안하고 불편한 감정을 애써 외면하면서 변화를 시도하니 매우 빠른 속도로 동력을 상실하기 쉬운 사람들은 이 유형의 실수에 해당한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마땅히 느낄 수밖에 없는 불안감과 긴장감을 애써 부인하면서 대범한 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 더 큰 불안과 혼란이 온 마음을 휘감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은 이 대목에서도 참으로 지혜로운 분이었음을 다시 한번 느낀다. 12척으로 330척의 왜선에 맞서야 했던 절체절명의 위기를 다룬 영화 명량의 대사다. “육지라고 안전할 것 같더냐. 우리에겐 더 이상 살 곳도 물러설 곳도 없다. 이제 우리가 죽을 곳은 바다뿐이다. 목숨에 기대지 마라. 죽기를 작정하면 반드시 살 것이고, 살고자 애쓰면 반드시 죽을 것이다.” 두려움을 부정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용기로 바꾸고자 하신 지혜다. 윈스턴 처칠이 이순신 장군을 공부하고 난 뒤 깨달은 바를 말한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익숙한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바로 드는 두려움은 너무나도 자연스럽다.

인정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를 시도한 내 결정을 응원하자. 이 둘을 모두 해야 사람은 변화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갈 수 있다.

 

소통적 언어가 변화를 만들어 낸다.

필자의 책 《적정한 삶》에서도 한 번 소개한 적이 있는 의과대학 교수님 한 분의 에피소드다. 내분비내과 전문의인 그 분은 호르몬과 관련된 질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분야의 전문가다. 그런데 이분은 환자들에게 질병을 설명할 때 좀처럼 이런 표현은 쓰지 않는다. “이 병의 원인은 유전입니다.” 사실, 이 말은 많은 의사들이 자주 하는 말이다. 당연히 틀린 말도 아니다. 게다가 증상의 원인과 관련된 사실적 정보를 있는 그대로 환자에게 전달하는 것은 모든 의료인의 의무다. 하지만 이 말을 듣고 상처받는 것은 환자의 몫이다. 고통을 물려준 부모를 원망하거나 자신의 처지를 가엾게 여기는 등 심리적 아픔을 피할 길이 없다. 그런데 그 교수님은 이 말을 이렇게 바꾼다. “이 병 때문에 환자분 부모님께서도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심리학자를 감탄하게 만드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무엇이 다른 것일까? 심리학자들은 위의 두 표현 중 전자를 기능적 언어로, 후자는 소통적 언어로 구분한다. 그 교수님은 동일한 사실과 정보를 전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소통적 언어를 사용했기에 상대가 느낄 감정을 훨씬 더 배려한 셈이 된 것이다. 게다가 이 말을 듣고 부모님을 한없이 원망할 수 있겠는가. 오히려 ‘아... 내 부모님이 평생 많이 힘드셨겠구나. 하지만 나를 키워내기 위해 지금까지 고생하시면서 버티셨구나.’라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 것이다. 그리고 부모의 삶을 이해하며 새 희망을 찾기 한결 편해진다. 같은 내용을 전달하면서도 이렇게 표현하는 것을 소통적 언어를 사용한다고 심리학자들은 이야기하는 것이다.

물론 기능적 언어의 역할도 중요하긴 마찬가지다. 상대방에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역할에 충실한 언어다. 따라서 간결하고 명확하다. 하지만 소통적 언어는 좀 더 길다. ‘유전’이라는 명사로 함축시키기보다는 ‘이것 때문에 같은 고생을 하셨다.’라고 경험이 만들어내는 감정을 전달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소통 유형의 장단점과 필요한 상황은 확연하게 갈린다. 기능적 언어는 빠르고 간결하게 상황을 인식하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소통적 언어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힘을 만들어 낸다. 부모님을 원망하기보다는 부모님을 이해하고 나와 부모님이 더 나은 상태가 되기 위해 어떤 행동, 즉 변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좋을까,라는 고민을 하게 만든다.

한 번쯤 되돌아보자. 나와 주위의 사람 모두에게 우리의 언어가 지나치게 기능적이지 않은지 말이다. 기능적 언어가 문제의 인식과 핵심을 파악하는 데 유리한 반면, 소통적 언어는 우리로 하여금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 힘과 희망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잊지 말자.


작가 소개

김경일대한민국의 인지심리학자로, 아주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게임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고려대학교에서 심리학을 전공하고, 미국 텍사스 주립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어쩌다 어른’, ‘세바시’, ‘속보이는TV 人사이드’, ‘책 읽어드립니다’ 등 다양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심리학의 지혜를 널리 알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