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이지혜, <나는 미술관에서 투자를 배웠다>, <아트 토크 머니 토크> 저자
프랑스어로 ‘날 것 그대로의’ 라는 뜻을 가진 단어 ‘brut’에서 출발한 예술 사조, ‘Art Brut’.
이는 1920년대 초 유럽에서 생겨난 ‘비주류 예술’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비교양적이지만 적나라한 예술
프랑스 출신의 작가이자 조각가 ‘장 뒤뷔페(Jean Dubuffet)’는 ‘광기가 창조적 풍요의 원천’이라고 확신하며 사회적 조건에 영향을 받지 않고 온전히 창작자 자신의 충동만으로 만들어지는 예술을 찾기 시작했다.
이후 다양한 정신병원과 감옥을 찾아다니며 이곳에 머물렀던 수용자들이 남긴 작품들을 수집했고 1945년, 마침내 ‘아트 브뤼’라는 새로운 예술 사조를 명명했다. 장 뒤뷔페가 주류 사회 밖에 존재하는 예술에서 새로운 개념을 발견한 것에 착안해, 아트 브뤼는 정신적 혹은 신체적인 결함이 있거나 미술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없는 작가들의 작품에서 보이는 비교양적이지만 적나라한 예술을 주로 의미하게 되었다.
이 시기 유럽 사회에서는 이러한 성격을 가진 작품들을 수집하는 컬렉터들이 많아졌고 특히 정신 의학자들은 자신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왕성한 연구활동을 펼쳤다. 이렇게 모두의 관심 밖에 있던 비주류 예술이 주류 사회로 자연스럽게 편입되기 시작했다. 이윽고 1972년에 들어 영국의 미술사가 ‘로저 카디널(Roger Cardinal)’이 아트 브뤼를 ‘아웃사이더 아트(Outsider Art)’로 영어로 재정의했다. 아트 브뤼는 최초 발생지인 유럽에 근간을 두고, 아웃사이더 아트는 영미권 문화에 뿌리를 두고 점차 다른 양상으로 발전해 나가며, 현재의 두 단어는 서로 다른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고흐도 아트 브뤼로 볼 수 있어
그러나 처음 아트 브뤼라는 단어를 만들어 낸 장 뒤뷔페와, 이를 아웃사이더 아트로 재정의한 로저 카디널이 정신병자, 신체 장애인, 사회 부적응자, 그 외 ‘괴짜’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이들의 작품을 주류 예술로 끌어당기고 전파시키는 데 헌신했다는 점 자체는 완벽히 동일하다. 이들의 열정 덕분에 미술 시장은 현대 미술에서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단 하나의 새로운 키워드를 발굴할 수 있었으며 극도로 소외된 나머지 세상에 존재하는 줄도 몰랐던 미지의 작가들이 점차 주류 사회에 알려지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이러한 배경들로 인해 아트 브뤼가 단순히 병리적인 예술만을 가리킨다는 또다른 오해를 만들어냈다. 아트 브뤼는 환경적, 외부적 영향 없이 작가 자신의 정신에서 비롯된 예술을 말하는 것이지, 작가가 가진 핸디캡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이는 여전히 미술계가 어떠한 통념이나 선입견 안에서 작품을 해석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아트 브뤼는 누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이미 아주 오래 전부터 존재해왔다. 100년 전에는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가 있었고 지금은 ‘쿠사마 야요이(Kumama Yayoi)’가 있다. 하지만 미술계는 자신들이 가진 통념을 내려놓고 이들을 제대로 받아들일 시간이 더 필요했다.
아트 브뤼라는 예술사조를 명명한
장 뒤뷔페(Italia, 1960) (출처: 위키백과)
스스로 귀를 자른 후 그린 빈센트 반 고흐의 초상화
한국에 아트 브뤼를 소개한
‘벗이 미술관’
로저 카디널이 아트 브뤼를 아웃사이더 아트로 재정의 한 지도 50년이 훌쩍 넘었다. 그 시간 동안 이 새로운 예술은 어디까지 발전했을까? 아웃사이더 아트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아트페어인 ‘OAF(Outsider Art Fair)’는 현재 파리와 뉴욕 두 도시에서 열리고 있으며, 그 중 2022년 파리의 아트페어는 벌써 10주년을 맞이했다. 모든 분야에서 ‘시장’이 형성되는 전제조건들과 마찬가지로 아웃사이더 아트 역시 작품을 공급하는 작가와 작품을 소구하는 컬렉터 사이 일정량 이상의 거래가 발생하면서 마침내 아트페어까지 자리를 잡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아시아 최초로 아웃사이더 아트 전문 미술관이 생겨났다.
앞서 언급한 ‘벗이 미술관(VERSI Art Museum)’이 바로 그 곳이다. 의료법인인 용인정신병원을 모회사로 두고 있는 배경에서도 짐작할 수 있듯, 이곳은 장애인과 비전문가, 영세민과 같이 문화적 경험을 충분히 하지 못하는 소외 계층을 위한 문화예술 공간이다. 이곳은 다양한 미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직접 작품을 만들어 보는 아트 클래스를 꾸준히 제공하고 있을 뿐 아니라 벌써 3년째, 국내외 신진 아웃사이더 아트 작가들의 창작을 양성하는 레지던시 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미술관의 이름도 특별한데 한글로는 친구를 의미하는 ‘벗’이라는 뜻이 되지만 영문 이름의 ‘VERSI’는 ‘Diversity(다양성)’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즉, 모든 차별을 배재하고 다양성을 포용하여 친구가 되겠다는 이념이 미술관 전체를 관통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 아트 브뤼를 소개한 벗이 미술관 홈페이지(versi.co.kr)
농장 노예에서 세계적인 예술가로
크리스티와 소더비는 아예 아웃사이더 아트 작품을 출품하는 경매를 선보였다. 아트 브뤼와 아웃사이더 아트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미술관과 아트페어의 탄생 역시 유의미하지만 경매 회사의 프로그램 편성은 미술 시장에서 해당 작품들의 강한 수요가 있다는 판단을 전제로 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욱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크리스티는 2020년 새해를 맞아 뉴욕에서 처음 열리는 ‘이브닝 세일(Evening Sale)’에 아웃사이더 아트 경매를 전면 배치했다. 세계에 포진된 각 경매소에서 열리는 다양한 프로그램 중 가장 중요도가 높고 고가의 작품을 주로 선보이는 경매가 바로 이브닝 세일인 만큼, 총 128점이 출품된 해당 경매에서 41억 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리는 쾌거를 얻기도 했다.
특히 이날의 경매에서 가장 높은 매출고를 올린 작가는 단연 ‘빌 트레일러(Bill Traylor)’였다.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던 그는 미국 알라바마 주의 면화 농장에서 노예로 살았고, 노예제도가 끝난 후에는 소작농으로 일하며 평생 자신 주변의 풍경이나 동물, 사람들과 같은 소박한 모습들을 그렸다. 그의 작품은 동굴 벽화의 한 조각을 보는 것 같다. 원근법이 없는 것은 당연하고 사람이 서 있는 방향과 개가 서 있는 방향이 각각 다르기까지 했다. 그는 그저 기록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다고 알려졌을 뿐 정확히 어떤 이유로 무엇을 표현하고자 했는지도 정확하지 않지만 녹록치 않았던 그의 삶 속에서 세상과 소통하기 위한 유일한 창구가 그림이었던 것만은 확실해 보인다.
Bill Traylor, Untitled(Yellow and Blue House with Figures and Dog)
단순하지만 독창적인 작품
하지만 빌 트레일러가 2천여 점의 작품을 남기는 동안에도 세상은 그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으며 사망한지 30여 년이 지난 1970년도 후반에 이르러서야 미술계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까지 온 데에는 빌 트레일러가 가진 예술적 가치를 알아주었던 후견인의 역할도 컸겠지만, 동시에 로저 카디널이 아웃사이더 아트를 새롭게 명명했던 시기와도 맞물린다.
비록 빌 트레일러는 평생의 반을 노예로, 나머지 인생은 소작인으로 척박한 삶을 살다 갔으나 1980년대에 들어서자 미술계 사람들은 모두 그를 ‘작가’로 불렀다. 2018년에는 미국의 ‘스미스소니언 미술관(Smithsonian American Art Museum)’에서 그의 개인전까지 열렸다. 그렇다면 2020년 새해에 크리스티 뉴욕의 경매에 출품된 그의 작품은 얼마에 팔렸을까? 이날 경매에는 총 8점의 빌 트레일러의 작품이 출품되어 모두 새로운 소장자를 만났다.
특히 작은 종이의 반절을 다시 접어 양면으로 그려진 작품 ‘Man on White, Woman on Red/Man with Black Dog, double sided’은 무척 특별했다. 접혀진 면마다 남성과 여성, 그리고 검은색 개를 그려 넣고 여성이 그려진 면에만 배경이 칠해진 것이 단순하지만 독창적인 작품이었다. 추정가를 훌쩍 뛰어넘은 이 작품은 결국 50만 7,000 달러, 한화 약 6억 6천만 원 선에 낙찰되었다.
Bill Traylor – Untitled (Chase Scene)
작가 소개
이지혜_ 부동산 시행 및 마케팅사 대표 겸 아트 컬렉터로, 미술품과 부동산이라는 양대 시장의 교차점에 서 있는 MZ세대의 대표 인사이다. 그는 역동적인 미술시장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들을 SNS ‘#제이니의미술관’을 통해 공유하며 신입 컬렉터들의 ‘랜선 아트테크 가이드’ 역할을 맡고 있다. <나는 미술관에서 투자를 배웠다>, <아트 토크 머니 토크> 등의 저서를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