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오늘의
‘부산 사람’을 만든
따뜻한 정(情)

감천문화마을


글_ 김한근 부경근대사료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당시 부산은 임시수도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많은 시민들은 임시수도기념관과 유엔기념공원을 통해 그 시절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3년 가까운 기간 동안 임시수도였던 부산은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그때야말로 오늘날 부산 사람의 진짜 정체성이 탄생한 시절이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쟁,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진 부산 

한국전쟁은 민족 내분과 분단 고착화라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전쟁이 발발하자 정부는 세 차례에 걸쳐 임시수도를 옮겼다. 처음에는 대전, 그 다음은 대구, 그리고 마지막으로 부산으로 이전했다. 부산은 1950년 8월 18일부터 10월 27일까지, 그리고 1951년 1월 4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총 1,023일 동안 대한민국의 임시수도였다.

전쟁 발발 전날인 6월 24일, 부산에서는 한미경제위원회의 전차 시운전이 있었다. 시민들은 새로 도입된 전차에 환호했지만, 전쟁 발발 후 피란민들이 몰려들면서 부산은 곧 혼란에 빠졌다. 매일 새벽, 수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역에 도착했고, 시청과 도청 직원들은 피란민들을 수용할 장소를 찾느라 분주했다. 통행금지 시간이 연장되고, 예금 인출이 제한되는 등 긴급 조치들이 시행되었다.

피란수도 부산 시절, 화폐 교환과 화폐 개혁도 있었다. 북한군이 조선은행권 지폐 원판을 입수해 남발한 ‘빨간 딱지’ 지폐를 발행하는 바람에 경제가 혼란에 빠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한국은행은 급하게 새 화폐를 발행했다. 또한, 전쟁으로 인한 통화 남발로 물가가 100배나 급등하자 1953년 2월 제1차 화폐 개혁이 단행되었다.

하루아침에 100원이 1환으로 바뀐 화폐개혁 조치가 발표된 직후 부산 시내의 버스, 택시 등은 운행을 중지하고 다방들도 바쁘게 문을 닫아버렸다. 노상에서 멋모르고 물건을 팔던 담배 및 잡화 장사들은 의외로 물건이 잘 팔리자 기분 좋게 다 팔고 난 후에야 사실을 알고 땅을 치고 우는 등 웃지 못할 비극도 연출되었다. 



1951년 6월 하늘에서 내려다 본 모습

방을 비워주고 먹을 것을 나누다

피란 시절 부산은 주택난, 식량난, 식수난, 전력난, 숱하게 발생한 대형 화재 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정부는 피란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곳곳에 수용소를 마련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학교, 극장, 교회, 사찰 등에도 수용소를 마련하고 시내 곳곳에 별도 피란민 수용소를 조성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피란민들뿐 아니라 원거주민들의 어려움도 매우 컸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부산시와 부산시민들은 적극 나서서 피란민들을 도와주었다. 1950년 12월 부산 시내 모든 주택을 조사해 피란민을 받아들일 만한 집에는 사회부장관 이름으로 ‘입주 명령서’라는 것이 발부되었다. 뿐만 아니라 1·4 후퇴 이후 1951년 11월 17일 부산시 사회과에서 전쟁 이재민을 위한 ‘방 비워주기 운동’을 펼치자 수많은 부산시민들이 이에 동참하여 방 한 칸씩을 비워 피란민 가족을 받아 들였다. 부산시민들의 ‘방 비워주기 운동’은 곧 닥쳐올 겨울을 앞둔 수많은 피란민들에게는 그야말로 하늘이 내려준 천운과도 같았다.

방 비워주기 운동뿐 아니라 피란민들에게 음식을 나누거나 우물과 화장실을 사용하도록 편의를 주었다는 이야기들도 숱하게 전해온다. 이렇게 부산 시민들이 큰 동포애를 발휘한 덕분에 많은 피란민들이 부산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오늘의 부산 인구를 형성하는 데 가장 큰 요인이 된 것은 해방 후 귀환동포들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내려온 피란민들의 정착으로 보고 있다. 부산 사람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기에 부산에 대한 애정과 더불어 그들이 모두 부산시민으로 남아 오늘날까지 뿌리를 내린 것이다. 

부산에서의 피란 생활은 재기와 새로운 생활로 이어지는 발판이 되었고, 피란학교를 통해 많은 학생들이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또한, 피란수도 부산의 다방과 각종 공간에서 이루어진 전시회, 발표회 등을 통해 비록 국토는 전쟁에 휩싸여 있어도 문화예술 활동은 미세하나마 그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한국전쟁으로 인한 피란수도 부산은 이후 대한민국의 경제, 교육, 사회, 문화, 예술 분야의 발전과 지속에 큰 힘이 되었다.



1952년 공동수도 앞에 늘어선 물받는 모습



1953년 1월 발생한 국제시장 대화재 후 폐허처럼 변한 모습


전 세계가 주목할 부산의 따뜻한 정(情)

한국전쟁이라는 혼란 속에서 이 나라를 지탱하며 타지에서 흘러든 피란민들을 따뜻하게 받아들여 ‘부산 사람’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모두를 하나로 만들었던 부산의 역사는 이제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을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2023년 5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5개월 만인 2023년 10월 22일 유네스코 공식 누리집에 게재되었다. 이는 지난 2015년 6월 1일 부산연구원에서 ‘피란수도의 건축·문화자산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방안’이라는 BDI포커스를 발간하면서 한국전쟁 당시 1,023일 동안 피란수도(임시수도)*였던 부산의 역사·문화자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고자 하는 활동을 시작한지 8년 만이다.

이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은 2028년 유네스코 최종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많은 국민들에게 애환과 불행이 마치 소낙비처럼 쏟아졌지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저변의 힘이 활화산처럼 불타올랐던 곳이 당시 부산이었다. 어쩌면 이런 역사적 상황 속에서 큰 동포애를 발휘한 따뜻한 부산의 정신은 이제 다양성을 이해하는 문화로 정착되어 글로벌 시티로 발돋움하는 큰 기반이 될 것으로 믿는다.



글로벌 허브도시로 발돋움하는 오늘날의 부산


* 한국전쟁 당시 이전한 정부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임시수도’라 표현하지만 최근엔 ‘피란수도 부산’을 유네스코에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중이어서 좀 더 적극적이고, 구체적 표현을 위해 ‘피란수도’라고 표현하고 있다. 


작가 소개

김한근 _ 부산향토사 관련 원본 사료 수집과 목록화에 평생을 바친 향토사학자로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어린이 역사문화탐방단을 이끌고 전국의 역사문화탐방을 다니기도 했다. 부산의 근현대사 관련 희귀 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학자로 명망이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