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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인사대천명의 삶
이상찬 세화병원 원장



이상찬 세화병원 원장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출산까지 가는 과정은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신의 영역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하려고 합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다 하고서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뜻이다. 세화병원의 이상찬 원장은 자신이 하는 일이 이와 같다고 말한다. 난임 치료에 매진하며 수많은 새 생명의 탄생과 함께해온 그의 삶에 대해 들어본다.


‘난임 치료’라는 운명의 부름   

1978년 7월 25일, 이상찬 원장이 부산대학교병원 에서 레지던트로 일하던 시절이었다. 밤새도록 당직 하고 당직실에 들어왔는데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시험관 아기가 탄생했다는 아침 뉴스를 듣게 되었다. 처음엔 말도 안 되는 얘기라고 흘러 넘겼다. 당시 우리나라 상황을 생각하면 그의 반응도 이해가 될 만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 정부는 경제 수준에 비해 인구가 지나치게 많다고 판단, 산아제한 정책을 추진했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구호 아래, 남성들의 정관수술도 적극 장려했다. 당시 정관수술을 받으면 수술비 면제는 물론이고 예비군 훈련 면제 등의 병역 혜택이나 청약 통장과 같은 보상금을 지급받을 수 있었다.

“그땐 조교가 예비군 훈련장에서 한 트럭씩 남성들을 데리고 와, 많으면 하루에 70~80명씩 정관수술를 해주곤 했어요. 그러니 아무리 산부인과에 있었다 해도 난임 치료를 하거나 시험관 아기를 낳거나 하는 일들이 저와는 별로 관계없는 일로 느껴질 수밖에 없었죠.”

그러나 해외에서 시험관 아기 수술이 성공했다는 소식은 점점 더 그의 마음속에 어떤 운명의 부름처럼 깊고 넓게 메아리치기 시작했다.

세상 모든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출산할 때 그 어떤 순간보다도 기뻐한다. 반면, 아기를 갖고 싶은 부부에게 불임은 조금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크나큰 좌절감과 불행을 안겨주는 일이다. 

그는 임신이 어렵더라도 난임 부부를 돕는 일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행복과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돕는 일이라 생각했다. 이에 전문 난임 치료에 뛰어들기로 마음먹었다. 또 거기에는 수많은 남성들을 임신 못하게 만든 것에 대한 속죄의 마음도 있었다고 한다.



▶︎ 세화병원 중정에서 전문의들과 함께


난임 치료의 불모지를 개척하다  

당시 우리나라는 난임 치료의 불모지나 마찬가지였다. 산부인과를 전공했지만 의과대학에서조차 난임 치료를 가르치지 않던 시절이었다. 자신이 우리나라에서 이 분야의 개척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한 그는 과감히 미국 뉴욕의 코넬대학병원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시험관 아기 및 불임 초청 펠로우 과정’을 연수하였다. 

난임 전문병원인 ‘세화병원’을 설립한 후에는 부산·경남권 최초의 정자은행 운영, 난자 동결, 수정란 동결 등 난임 치료 관련 혁신적인 치료법을 국내에 지속적으로 소개해왔다.

“난임 치료에 관해선 국내에 연구소도, 인재도 없었으니 완전 백지 상태에서 시작을 한 거죠. 외국에 가서 많은 것을 배워올 수밖에 없었어요. 지금은 사람들이 시험관 아기 수술에 대해 어렵게 생각 안 하지만 처음엔 시행착오나 어려운 점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30여 년간 끊임없이 연구하며 난임 치료에 매달리다 보니 많은 성공 사례를 만들며 입소문이 나 전국에서 환자들이 그를 찾아오게 됐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지 않는다. 어떤 부부는 수년간 온갖 노력을 다했는데도 임신이 안돼서 결국 입양을 하겠다기에 난임 진단서까지 떼 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이 됐다는 소식을 전해오기도 했다. 그러니 생명의 탄생을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늘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 한다.

“저 보고 난임 부부의 임신을 많이 성공시켰다는 얘기를 하면 좀 불편하게 들립니다. 성공한 케이스도 많지만 임신이 안 된 사람들도 함께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니까요. 인간이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수정란이 착상되고 그것이 출산까지 가는 과정은 사람이 어떻게 해줄 수 없는 신의 영역이란 생각이 들어요. 그래도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다하려고 합니다.”



▶︎ 사직동금융센터 이금조 PB와 함께

임신 성공에는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해 

이상찬 원장은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던 임신이 갑자기 된 경우는 여성이 ‘마음을 편안히 가졌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손주를 갖기 바라는 시댁의 압박, 임신이 마음대로 잘 되지 않는 것에 대한 당사자의 초조함과 자책 등이 될 임신도 잘 되지 않게 한다. 차라리 포기하고 입양을 하자고 마음먹은 덕분에 임신에 대한 스트레스가 사라진 여성이 쉽게 자연임신이 돼버린 케이스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저는 난임 치료를 시작할 때 남편에게도 신신당부를 합니다. 아내가 임신에 대한 강박관념과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않도록 남편이 앞장서서 아내를 보호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이죠.”

특히 세화병원은 남편 측에 생리적 문제가 있더라도 임신이 가능케 하는 치료 개발에도 공을 들여왔다. 남성 무정자증의 경우라도 고환조직수술, 정자 냉동보관, 수정란 체외배양 등의 방법을 적용하면 가능하다. 이처럼 임신은 여성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난임 전문의, 가족, 남편 등이 모두 협력해야 하며, 그렇게 한 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더 많은 이들에게 생명 탄생의 기쁨을 

세화병원은 승효상 건축가가 설계한 건물로, 산부인과 병원으로선 보기 드물게 건축미가 빼어나 2005년 ‘부산시 최우수 건축상’을 받았다. 이 건물을 지을 때 부산은행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35년 가까이 부산은행과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이상찬 원장은 한결같이 친절했던 모든 부산은행 직원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다고 전했다.

“금융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는데 부산은행에서 제가 모르는 점을 많이 알려주시고 항상 좋은 쪽으로 이끌어주시니까 지금까지 병원 운영에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상찬 원장은 인문학에도 관심이 많다. 수많은 환자를 진료하면서 과학을 초월한 생명의 신비, 인연의 소중함 등에 눈을 뜨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더 많은 사람이 인문학과 소통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난임 치료 세미나와 인문학 강의를 결합한 ‘세화아카데미’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이런 그가 가장 큰 행복을 느낄 때는 언제인지, 그리고 앞으로 더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엇인지 궁금했다.

“시험관 시술을 받은 분이 임신에 성공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 다음으론 일마치고 제 방에 들어와 믹스커피 한 잔 마시는 순간입니다.(웃음) 또한 세화병원이 난임으로 힘들어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임신의 희망을 주는 병원으로 신뢰받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저희도 나름대로 계속 열심히 공부하고 연구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