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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글_ 허서현 월간 ‘객석’ 기자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면, 클래식 FM에서는 브람스의 선율이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푸르게 시린 하늘과 색색깔의 낙엽들, 서늘해진 날씨에 마시는 따뜻한 음료 한 모금…. 이 모든 가을날의 풍경을 더욱 짙은 색채로 물들이는 브람스의 작품들을 소개합니다.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과 교향곡 3번  

사실 브람스가 왜 ‘가을 클래식’의 대명사가 되었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그의 작품에 쓸쓸한 가을과 어울리는 선율들이 많은 것도 이유 중 하나겠지요. 한편으론 브람스가 평생 결혼도 하지 않고 스승 슈만의 부인인 클라라의 곁을 지켰다는 일화는 가을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가을 남자 브람스’ 분위기에 힘을 실은 것 중 하나는 프랑수아즈 사강의 소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입니다. 여주인공 ‘폴’은 맑은 11월의 어느 날, ‘시몽’으로부터 편지를 받죠.


오늘 6시, 플레옐 홀에서 아주 좋은 연주회가 있습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어제 일은 죄송했습니다.

시몽에게서 온 편지였다. 폴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웃은 것은 두 번째 구절 때문이었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구절이 그녀를 미소 짓게 했다. 그것은 열일곱 살 무렵 남자아이들에게서 받곤 했던 그런 종류의 질문이었다.

(…)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그녀는 열린 창 앞에서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잠시 서 있었다. 그러자 “브람스를 좋아하세요?”라는 그 짧은 질문이 그녀에게는 갑자기 거대한 망각 덩어리를, 다시 말해 그녀가 잊고 있던 모든 것,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던 모든 질문을 환기시키는 것처럼 여겨졌다.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자기 자신 이외의 것, 자기 생활 너머의 것을 좋아할 여유를 그녀가 아직도 갖고 있기는 할까?


이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굿바이 어게인’에는 브람스의 교향곡 3번 3악장이 주제곡처럼 영화 전체에 등장합니다. 꿈결 같은 첼로의 노래로 시작하는 3박자 계열의 곡은 한 번 들으면 잊히지 않은 멋진 선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선율은 호른에서 오보에로, 바순으로 넘어가며 반복됩니다. 브람스가 이 작품을 작곡한 것은 50세,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계절이었습니다. 

 

완성된 이 작품은 빈 필하모닉에 의해 초연되었습니다. 추천 음반으로는 이 작품의 초연을 했던 빈 필하모닉의 연주 중, 이탈리아의 지휘자 카를로 마리아 줄리니가 만년에 남긴 음반(DG 4316812)이 있습니다. 줄리니의 음악이 선율을 따라가며 감상에 빠지기 좋다면, 오이겐 요훔이 지휘한 베를린 필하모닉 음반(DG E4497152)은 긴밀하게 움직이는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인상 깊습니다. 서로 다른 두 버전의 브람스 교향곡 3번 3악장을 모두 감상해 보며 보이는 삶 너머의 것을 즐기는 여유를 누려보시길.




  

호른과 클라리넷의 실내악 

가을과 어울리는 또 하나의 클래식 음악 코드는 바로, ‘실내악’입니다. 다양한 규모의 실내외 장소에서 음악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기에, 가을이 되면 실내악 공연이 늘어나기도 하죠. 브람스 또한 다수의 실내악 작품을 남겼습니다. 피아노 3중주나 첼로 소나타 등의 구성으로도 다수의 명작을 남겼지만, 가을을 위한 작품으로는 브람스와 깊은 인연을 가진 두 가지 관악기 곡을 감상해 보길 추천합니다.

첫 번째는 호른 3중주입니다. 호른은 브람스의 어린 시절 향수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브람스의 아버지는 호른과 콘트라베이스를 연주하는 사람이었고, 아버지의 연주를 따라다니며 호른의 소리를 들었던 것이 어린 브람스의 기억에 깊이 남았죠. 성인이 된 브람스는 그 시절 호른의 소리를 떠올리며 내추럴 호른을 위한 작품을 남겼습니다. (현재의 호른은 이후 개량된 것으로, 내추럴 호른보다 더 다양한 음역을 표현할 수 있는 밸브 호른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호른 본연의 울림을 담은 브람스의 호른 3중주는 피아노, 바이올린과 함께 풍부한 실내악의 농도를 보여줍니다. 영국의 호르니스트이자 고전과 낭만주의 호른 협주곡 명반을 다수 남긴 베리 터그웰의 음반(Tudor TUD771)의 음반 감상을 추천합니다.

두 번째는 호른과 마찬가지로 가을에 어울리는 따뜻한 음색의 관악기, 클라리넷의 실내악 작품도 빼놓을 수 없죠. 특히, 그의 말년에 영감을 준 클라리네티스트 리하르트 뮐펠트(1856~1907)의 존재는, 오늘날의 관객이 브람스의 원숙한 음악 세계를 맛보게 해준 고마운 존재입니다. 

1890년, 브람스는 현악 5중주 2번 작곡을 끝으로 더 이상 작곡을 하지 않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뮐펠트가 연주하는 클라리넷 음색을 듣고 브람스는 새로운 영감을 얻게 되죠. 그렇게 탄생한 클라리넷 3중주와 5중주, 연이은 두 개의 클라리넷 소나타는 만년의 브람스를 꽃피웠습니다. 그중에서도 클라리넷 5중주는 작곡가의 농익은 작곡 기법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현악기와 어우러지는 클라리넷의 음색은 절제 속에서도 풍성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독일 전통의 클라리네티스트 칼 라이스터가 1998년 발매한 아마데우스 콰르텟과의 음반(DG E4376462)을 추천합니다.





고독한 가을의 선율을 남기며 

브람스의 대표 명작들은 외에도 미사곡이나 가곡, 소개하지 못한 다수의 관현악 작품에 포진되어 있습니다.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모두 다루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공연의 앙코르와 같은 짧은 피아노 소품을 소개하며 글을 맺고자 합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브람스 말년의 작품에는 단순함 속에 숨어있는 작곡가 내면의 음악적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엿볼 수 있는 피아노 작품으로, 작품 번호 117, 118, 그리고 119가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세 개의 곡으로 구성된 작품 번호 117은 1892년에 작곡된 작품으로, 브람스 스스로가 ‘자신의 고뇌를 재우는 자장가’라고 부르기도 한 작품들입니다. 브람스의 평생 음악적 지지자였던 한슬리크가 이 곡들을 ‘브람스의 독백’이라고 언급하기도 했죠. 첫 번째 곡은 스코틀랜드 자장가 선율을 차용해 진행됩니다. 느린 3박자 계통의 음악은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줍니다. 두 번째 곡에서는 아르페지오가 화성을 펼치며 가라앉은 마음 한구석의 고독을 비추는 듯합니다. 마지막 곡은 어두운 옥타브로 시작, 비어 있는 듯한 화성이 공허하게 걸어가는 어느 한 남성의 뒷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 작품의 음반은 섬세한 음색을 보여주는 마법 같은 피아니스트, 라두 루푸의 연주(Decca 4175992)를 추천합니다. ‘피아니스트의 피아니스트’라 불리는 그의 연주는 브람스 말년의 작품이 가진 정수를 명징하게 드러냅니다.

 

작가 소개

허서현 _ 1984년 3월 2일 창간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음악, 공연예술 전문 잡지 월간 <객석>의 공연 전문 기자이다. 국내외 화제를 모으고 있는 유수의 공연과 아티스트에 대한 비평과 분석 기사를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