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 홍콩관광청 서울사무소
화려한 겉모습 너머에 여전히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홍콩은 8090 홍콩영화를 보고 자라온 세대에게는
그 시절에 대한 향수를, 그렇지 않은 세대에게는 근원적인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여행지다.
여전한 레트로 열풍 속, ‘그 시절’을 만나러 홍콩으로 떠나보자.



추억을 따라걷는 <첨밀밀>의 캔턴로드와 스타의 거리
<첨밀밀>은 홍콩 반환 직전 혼란한 시대상을 은유하는 아련한 사랑 이야기로, 홍콩 영화를 논할 때 빠질 수 없는 명작이다. 1995년에 세상을 떠나 이미 추억이 되어버린 등려군의 목소리가 두 주인공을 연결하며, 영화의 여운을 더욱 깊게 만든다. 장만옥과 여명이 자전거를 타고 행복하게 ‘첨밀밀’을 부르며 사랑을 속삭이는 장면은 홍콩영화 황금기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첨밀밀>의 주인공들이 자전거를 타고 달렸던 캔턴로드는 홍콩의 대표적인 번화가이자 최고의 쇼핑명소로 손꼽힌다.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숍들이 화려한 외관과 디스플레이를 자랑하며, 홍콩에서 가장 큰 쇼핑몰인 하버시티도 이곳에 위치해 항상 사람들로 북적인다. 이제 영화 속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영화의 한 장면 속 금색 에스컬레이터를 찾아 인증샷을 남기곤 한다.
캔턴로드에서 남쪽으로 조금 걸어가면 스타의 거리를 만날 수 있다. 시계탑에서 시작해 해변으로 이어지는 이 짧은 산책로는 홍콩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꼭 들려볼 만하다. 유덕화, 장만옥, 곽부성, 여명, 양조위 등 그 시절 최고스타들과 왕가위, 천커신 등 감독들의 핸드프린팅이 빅토리아 하버와 홍콩의 스카이라인이 이루는 멋진 풍경을 따라 이어진다. 핸드프린팅을 남기지 못해 그림과 이름으로만 채워져 있는 장국영의 자리에서 잠시 멈춰 추억에 머물러보자.
<영웅본색>의 시작, 황후상 광장
낭만적인 갱스터 캐릭터로 주윤발이라는 시대의 아이콘을 만든 영화 <영웅본색>의 오프닝 배경인 황후상 광장은, 트렌치코트에 선글라스를 낀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며 홍콩 누아르의 전설을 시작한 곳이다. 30여 년이 흘렀지만, 이곳은 여전히 영화 속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하다. 주변에 고층 빌딩 몇 개가 더 들어섰을 뿐, 익숙한 빨간 택시와 풍경은 그 시절의 감성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주윤발이 장펀을 먹으며 경찰에게 능청스레 인사를 건네던 장면을 떠올리며 광장 주변을 거닐다 보면, 홍콩 누아르 전성기의 추억에 빠져들 것이다.
황후상 광장은 원래 영국 식민지 시절 빅토리아 여왕의 동상이 있어 붙여진 이름이지만, 현재는 홍콩 상하이 은행의 초대 은행장이었던 토마스 잭슨의 동상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홍콩 상하이 은행 건물과 종심법원, 만다린 오리엔탈 호텔 사이에 위치한 홍콩 정치와 금융의 중심지이며, 센트럴 역 출구에 위치해 있어 홍콩을 여행하는 이들이 자연스레 여러 번 찾게 되는 곳이다. 크리스마스 시즌에는 거대한 트리와 화려한 조명이 광장을 수놓아 로맨틱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홍콩의 도시적 정취와 옛 역사가 공존하는 상징적인 공간인 황후상 광장은, 주위를 둘러싼 고층 건물들 사이 유일한 녹지 공간으로 도시의 오아시스 역할을 한다. 밤이 되면 빌딩들의 화려한 조명과 100년이 넘은 빅토리아 후기 양식의 종심법원 건물의 따뜻한 조명이 어우러져 홍콩의 밤에 운치를 더한다.
영화와 현실이 교차하는 곳,
<중경삼림>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
영웅본색이 홍콩의 대표적인 누아르, 첨밀밀이 홍콩 멜로의 정수로 불린다면, <중경삼림>의 장르는 ‘왕가위’라 불린다. 흔들리는 화면과 슬로우 모션이 남기는 잔상, 다채로운 색감, 그리고 상실과 변화에 대한 불안을 담아낸 특유의 세기말적 감성이 그 장르를 정의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여전히 청춘들의 마음을 울리는 이 영화는 많은 이들에게 홍콩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영화에서 페이가 경찰 663과 그의 집을 엿보며 오르내리던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는 홍콩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센트럴의 번화가인 퀸즈로드에서 미드레벨의 주택가까지 이어지는 이 에스컬레이터는 세계에서 가장 긴 야외 에스컬레이터로, 그 길이가 무려 800m에 이른다. 부산의 산복도로처럼 높은 지대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출퇴근을 돕기 위해 건설된 이 에스컬레이터는 운행을 시작한 다음해, 영화 <중경삼림>에 등장하며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영화 속 모습과 똑같은 에스컬레이터에 설레는 마음으로 발을 디디면 마치 페이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어울리는 노래는 단연 몽중인(夢中人).
홍콩 관광청은 센트럴에 ‘올드 타운’이라는 부재를 붙여, ‘홍콩에서도 가장 오래되고 다이내믹한 지역 중 하나’로 소개한다. 우리에게는 영화 속 낭만적인 배경이지만, 현지인들에게는 생활의 중심이다. 에스컬레이터는 주민들의 생활 리듬에 맞춰 오전 6시에서 10시까지는 하행, 이후부터 자정까지는 상행으로만 운행된다. 에스컬레이터를 따라 올라가며 다닥다닥 붙은 각양각색의 건물들, 밖으로 튀어나온 베란다와 테라스, 바쁘게 오가는 행인들을 보며 홍콩의 생생한 일상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