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0년대 초반의 해운대 해수욕장 풍경
글_ 주철환, 작가 및 노래 채집가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 생각이 나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어떤 노래가 생각이 난다.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을 듣다가 갑자기 어떤 부분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철이 없어도 꿈꿀 수 있다면
“요즘 뭐하며 지내세요.” 은퇴자에겐 가혹한 질문이다. 이어지는 덕담(?)도 뻔하다. “이젠 연출 안 하세요?”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준비한 대답이 있다. “제가 아는 왕년의 축구선수가 있는데요. 그분께 이젠 축구 안 하냐고 여쭤보니 웃으시더라고요. 고령이지만 주말마다 공 차는 걸 자주 보는데 여전하시던데요.”
‘식객 허영만의 백반 기행’은 전국의 맛집을 순례하는 프로그램이다. 섭외만 된다면 ‘가객 나훈아의 백곡 기행’을 연출하고 싶다. 주제가도 정했다. ‘달려라 고향열차 설레는 가슴 안고 눈 감아도 떠오르는 그리운 나의 고향역’ 평생 고향과 인생을 노래한 국민가수가 전국의 간이역을 돌며 팬들과 함께 걷고 얘기하고 노래하는 모습은 상상만으로도 흐뭇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그분을 만나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만나도 은퇴를 공언한 분을 되돌릴 자신이 없다.
요즘은 주로 이러면서 지낸다. ‘장난감을 받고서 그것을 바라보고 얼싸안고 기어이 부숴버리는, 내일이면 벌써 그를 준 사람조차 잊어버리는 아이처럼’ 말이다. 서유석이 헤르만 헤세의 시에 곡을 붙여 부른 이 노래의 제목은 ‘아름다운 사람’이다. ‘철없는 사람’ ‘실없는 사람’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가. 철이 없어도 실속이 없어도 꿈꿀 수 있다면 아름다운 인생 아닌가. 리그에서 은퇴하고도 축구할 수 있듯이 방송사 퇴직한 후에도 얼마든지 연출할 수 있다. 앞서 말한 ‘나훈아의 백곡 기행’은 성사되기 어렵겠지만 PD가 북 치고 장구 치면서 할 수 있는 ‘주철환의 천일 야곡’은 지금도 가능하다. 그걸 누가 듣겠냐, 그거 해서 얼마 벌겠냐 머리만 굴리지 않는다면 당장 추진할 수 있다.
최백호 노래에 가슴이 먹먹해지고
내겐 나만의 보물 1호가 있다. 1991년 1월 1일부터 지금까지 무려 34년 동안 매일 어디서 누굴 만나고 무엇을 했다는 꼼꼼한 기록을 보관 중이다. 그 전 것들도 어딘가에서 잠자고 있을 것이다. 상황마다 노래 한두 곡이 내 인생의 OST로 등장하는데 그건 음악을 평생 친구삼은 내 경력이나 취미와 무관하지 않다.
어떤 노래를 들으면 그 사람 생각이 나고 그 사람을 떠올리면 어떤 노래가 생각이 난다.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최백호의 노래 ‘부산에 가면’을 듣다가 갑자기 어떤 부분에서 가슴이 먹먹해졌다.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익숙한 부산의 지명들이 노랫말 속에서 꿈틀거린다.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 아무 생각 없이 찾아간 광안리.
다이어리를 펼친다. 때는 1992년 8월 4일 화요일. 해운대에서 대규모 몰카 작전이 펼쳐졌다. 당시 ‘꿈’이라는 노래로 ‘가요톱10’ 연속 1위를 하던 신인가수 이현우가 희생양이다. 외모는 전형적인 도시 남자, 그러나 실상은 어리버리 그 자체였던 이현우는 부산 출신 개그맨 이경규에게 속절없이 낚였다. 수요일엔 당시 ‘질투’라는 드라마로 그야말로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최진실을 주인공으로 코믹콩트 ‘질투 2’를 찍었다.
대망의 목요일 수영만 요트경기장 앞은 아침부터 인산인해였다. ‘일요일 일요일 밤에’ 부산특집이 예고됐기 때문이다. MC 최수종, 이경규, 게스트는 최진실, 이현우 그리고 나중에 ‘대장금’으로 뜨는 신인 탤런트 이영애가 수많은 부산 시민들 앞에서 공개녹화를 했다. ‘제2의 서태지를 찾아라’ 코너에서는 부산의 끼 있는 청소년들이 다 모여 댄스 기량을 뽐냈다.
너도 없는데 우리만 시간이 멈춘 듯
녹화는 사고 없이 잘 끝났다. 저녁 식사를 마치자 누군가 말했다. “그냥 갈 순 없잖아.” 일행은 겁도 없이 시내 모처의 호텔 나이트를 급습했다. PD 시절 가장 화려했던 추억의 장면이 여기서 펼쳐진다. 최수종, 최진실을 단박에 알아본 디제이는 블루스 타임 도중에 갑자기 ‘질투’의 주제곡(원곡 가수 유승범)으로 분위기를 단숨에 바꿔버렸다.
“넌 대체 누굴 보고 있는 거야. 내가 지금 여기 눈앞에 서 있는데. 날 너무 기다리게 만들지 마.” 전주가 나오는 순간 플로어에서 춤추던 남녀, 홀에서 맥주 마시던 손님들 전부 우리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환호성을 지르며 주제가를 합창했다. 그야말로 광란의
5분이었다. 기록을 보니 그 주 일요일에 방송된 ‘일요일 일요일 밤에’ 시청률이 자그마치 58%였다. 그땐 그랬다.
이현우의 ‘꿈’은 여름마다 수영만 요트경기장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두 눈을 감으면 꿈처럼 다가오는 너의 모습을 내 마음 깊은 곳 새하얀 캔버스에 그려보네.” 그때마다 또 한 사람, 당시 스물네 살의 최진실이 모래밭 위로 사뿐사뿐 걸어서 온다. 오늘은 최백호의 ‘부산에 가면’을 한 번 더 들어야겠다. “너도 이제는 없는데 무작정 올라가는 달맞이 고개에 오래된 바다만 오래된 우리만 시간이 멈춰버린 듯….”
작가 소개
주철환 _ 전 MBC PD로 ‘일요일 일요일 밤에’, ‘우정의 무대’ 등 다수의 히트 예능을 제작했으며, OBS 사장, 아주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서울문화재단 대표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현재 문화일보에 ‘주철환의 음악 동네’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