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서은국,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어느새 의무가 된 듯, 맹목적인 행복 추구를 강요하는 현대사회. 그 속의 우리는 정작 행복을 오해하고 있지 않은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또 어디서 오는가에 대한 고찰. 이를 통해 우리는 낯설고 멀게 느끼는 그것에 조금씩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예술가의 불행한 삶
우리는 행복을 다소 거창하게 생각한다. 세상에 남길 큰 업적을 세우며 의미 있게 살 때 비로소 얻는 것이 행복이라고. 과연 근거가 있는 믿음일까? 행복이라는 주제에 대해 심리학자들이 본격적인 연구를 시작한 지 대략 30년 정도가 되었다. 그동안 지구 곳곳에서 수천만 명의 삶의 내용을 분석하였다. 여기서 나타난 행복한 삶의 중요 요인은 거창하지 않았다. 행복한 사람들은 크게 성공하거나 대단한 부호가 된 사람들이 아니다. 하지만, 직업이 무엇이든 나이가 몇 살이든, 행복한 삶을 위한 두 가지 필요조건이 등장한다.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성격(외향성과 낮은 신경증)과 양적·질적으로 풍요로운 사회적 경험을 갖는 것이다. 필요조건이란, 이 둘을 갖춘다고 해서 무조건 행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둘이 빠지면 이것 외의 ‘다른 것’을 아무리 많이 가져도 행복하기는 어렵다는 말이다. 특히 다른 사람과 함께 나누는 양질의 사회적 경험들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올봄 차를 가지고 몇 주 여행을 했다. 이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곳 중 하나는 여러 영화(대부, 시네마 천국, 말리나 등)의 촬영지였던 이태리 남쪽 시실리 섬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한 오랜 시골 도시들의 아름다움과 지중해의 검푸른 빛깔이 아직 선명하다(여행지 고민하시는 분들께 시실리 강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기억을 크게 차지하는 장면은 빈센트 반 고흐(Van Gogh)가 고독한 시간을 보냈던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들이다.
두 가지가 인상적이었다. 우선, 우리에게 친숙한 고흐의 그림들이 얼마나 사실적인지. 그가 머물던 아를(Arles)의 정신 병원의 노란 꽃밭 정원은 마치 고흐 캔버스에서 복사한 것처럼 그림과 똑같았다. 그러나 다소 충격적일 정도로 놀라웠던 것은 이 위대한 예술가를 기억해 주는 사람은 지금 거의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나 아는 고흐의 별이 쏟아지는 노란 카페 그림. 이 작품의 실제 소재였던 카페는 동네 명소가 아닌 흉물이 되어 버려져 있었다(폐업).
고흐가 말년에 창밖 밤하늘을 자주 그렸던 생 레미(Saint Remy) 수도원의 작은 침실에는 그의 캔버스와 붓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은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공간이지만, 내가 그곳에 머문 30분 동안 고흐를 찾아온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생전의 고흐의 삶이 떠올랐다. 그가 그토록 시간을 같이 하고 싶어 했던 친구 화가 폴 고갱도 백 년 전에 고흐를 시골에 홀로 두고 훌쩍 떠나 버렸다. 이 상실감 때문에 고흐가 자기의 귀를 베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추측이다. 오늘날 유럽의 여러 박물관들은 고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하지만 정작 그 인생의 주인공이었던 고흐는 행복과 거리가 먼 쓸쓸한 삶을 살았다.
빈센트 반 고흐, 아를 정신병원의 정원
빈센트 반 고흐, 생 레미 정신병동의 침실
타인 중심적 인생관에서 벗어나라
행복은 세상이 평가하는 인생 업적 크기와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행복의 본질은 사실 단순 명료하다. 그것은 본인이 주관적으로 느끼는 모든 ‘좋다’라는 경험의 합이다. 높은 지적 능력을 소지한 인간이 가진 특권 중 하나는 이 잠재적 즐거움의 영역이 그 어떤 생명체보다 넓고 다양하다는 것이다. 행복은 즐거움의 이유를 캐묻지 않는다.
인간에겐 아주 기본적인 생물학적 즐거움들이 있다. 겨울에 언 몸을 온천물에 담글 때, 아침 커피의 행복. 거기에 더해 높은 지능 덕분에 우리에겐 여타 다른 동물들은 경험하지 못하는 ‘고차원’적인 즐거움도 많다. 바흐의 피아노곡을 들을 때, 내가 후원하는 단체가 의미 있는 결실을 거둘 때. 이런 추상적인 자극과 이유를 통해서도 우리는 ‘좋아’라는 경험을 한다. 하지만 늘 우리 마음 한구석에서 누군가 손을 들고 이런 질문들을 한다. 나의 주관적 즐거움만으로 행복이 채워질 수 있을까? 특히 한국인.
한국을 비롯하여 일본, 싱가포르 등의 아시아의 신흥 경제 강국들은 행복학자들에게 늘 의문 부호를 남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안정적인 복지 체계를 갖춘 나라들인데 왜 객관적 환경이 더 열악한 중남미 국가들 보다 행복감은 낮은 것일까? 여러 복잡한 이유들이 있지만, 그중 하나는 위 국가들의 유교적 가치관과 관련 있다. 전통적으로 유교적 사고가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사적 경험이나 선호보다는 개인이 속한 집단의 평가와 목표가 우선시된다. 그래서 늘 이런 교육을 받으며 살아온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너의 개인적 경험이 아니라 너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야.’ 즉, 본인의 주관적 경험 향상에 주력하는 것이 아니고, 타인의 눈에 “좋아 보이는” 삶을 이루고 보여주는 것이 인생 목표가 된다.
그래서 위에서 언급한 여러 유교권 국가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행복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것들(객관적 성공, 출세)을 행복과 동일시하기 때문이다. 이미 일상의 삶 속에서 즐거운 경험들을 충분히 하며 살고 있는 사람도 세상이 공인하는 행복의 ‘객관적 증거’들을 제시하라고 하면 당혹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미 행복한 많은 한국인과 일본인들이 엄격한 사회적 잣대에 눌려 자신이 행복하지 못하다는 ‘착각’을 하게 된다. 한국인의 행복을 생각할 때, 우선 과도한 타인 중심적 인생관에서 벗어나는 것이 필요하다. 뭐든 내가 좋으면 충분한 것이다.
행복과 관련된 또 하나의 대표적 오해는 그것이 ‘마음먹기’나 의지로 성취된다는 생각이다. 많은 행복 관련 지침서들이 제안하는 방법이지만, 그것은 행복과 같은 감정적 경험이 마음속 어떤 신비한 원인으로부터 생긴다는 중세의 비과학적 생각의 연장선이다. 최근 심리학은 수천 년간 우리 생각을 지배했던 인간 중심적 사고(특별한 생명체)에서 벗어나 내면의 심리적 경험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없다면 천국도 부질없다
가장 큰 뉴스는 마음의 경험(감정, 생각 등)은 몸의 작동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심장은 혈액을 순환시키기 위해 뛰고, 눈은 외부 상황 변화에 대처하기 위해 시각 정보를 모은다. 이렇게 신체 기관들이 생물학적 과제(생존, 재생산) 해결을 위해 움직이듯이 행복의 기초가 되는 쾌감이라는 경험도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활성화되는 일종의 ‘생존 도구’이다.
행복이 즐거움의 합이라는 말을 했는데, 뇌는 이 즐거운 경험을 아무 이유 없이 만들어내지 않는다. ‘그냥 즐거워지자’라는 희망만으로 즐거움을 느낀다면 뇌가 고장 난 것이다. 뇌는 생물학적으로 이득이 되는 명확한 상황에서만 즐거움이라는 전구를 켠다. 배고플 때는 음식이 있을 때, 사춘기 때는 사랑 고백을 받을 때, 회사에서는 중요한 존재로 인정될 때(승진). 그러나 즐거움 유발 자극 중 우리 뇌가 가장 절실히 찾는 것은 다른 사람이다. 그 이유는 집단으로부터 소외된 호모사피엔스는 진화의 여정에서 낙오자가 되었다는 큰 교훈이 우리 뇌 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행복한 사람의 대표적 특성이 높은 외향성으로 밝혀졌다. 외향적인 사람들이 인생 설계를 잘 해서가 아니다. 외향성이 높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자극과 뇌가 늘 애타게 찾는 자극(이때 쾌감 발생)이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다.
내 인생 작품이 루브르 박물관에 걸리든, 세상 반을 소유하든. 이런 것들이 행복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행복하지 못한 인생은 즐거움이 메마른 인생이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웃고, 나누고, 대화하는 것만큼 호모사피엔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경험은 없다. 그래서 중동에는 이런 속담도 있다고 한다. “사람이 없다면 천국도 갈 곳이 못된다.”
작가 소개
서은국 _ 일리노이대학교 어바나샴페인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 현재 연세대학교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인간 행복의 요건과 근원에 대한 고찰을 토대로 기업 강연과 저술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저서로 <행복의 기원 – 인간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초저출산은 왜 생겼을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