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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사람의
여름 시간표

글_ 김신회, 에세이 작가 

 

나의 모든 여름날은 휴식이다.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니 열심히 누려야 한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충전된다. 

 

내가 여름의 하루를 보내는 방법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나머지 세 계절을 여름을 기다리는 데 쓴다. 여름이 내적 성수기인 셈인데, 몇 년 전 <아무튼, 여름>이라는 ‘본격 여름 찬양 에세이집’을 출간하고 나서는 외적으로도 성수기가 되었다. 감사하게도 여름이 시작될 때마다 밀려드는 각종 업무들로 몇 년째 여름휴가를 가지 못하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에 가장 바쁘다니, 이 무슨 아이러니인지!

하지만 여름이라는 계절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여름엔 뭘 해도 좋다. 얼마나 여름에 진심이냐면 작년에 직접 설립한 출판사 이름조차 ‘여름사람’이라 지었다. 이 지경이므로(!) 나는 모기를 제외한 여름의 대부분의 것들을 좋아한다. 일 때문에 바빠도 좋고 일 없이 빈둥거려도 좋고, 작열하는 태양도, 퍼붓는 비도 좋다. 무엇보다 뭘 하든 휴가 느낌이 드는 점이 최고다. 다 큰 어른에게 여름방학 따위 없지만, 매년 5월부터 9월까지는 여름방학을 맞이한 사람처럼 들뜬 기분으로 지낸다.

반면, 여름이 금방 지나갈 거라는 생각에 초조하기도 하다. 그래서 일상의 작은 순간들조차 알뜰하게 즐기려 애쓴다. 오늘은 내가 여름의 하루를 보내는 방법, 일명 ‘여름 사람의 여름 시간표’를 공개한다.




오전 9시_ 계절 밥상, 여름 샐러드 

나는 집에서 일하는 프리랜서다. 작업실이 따로 없어 눈 뜨자마자 씻고, 거실에 있는 식탁 겸 책상에 앉는걸로 일과를 시작한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거르지 않는 것은 아침 식사. 아침 식사는 끼니를 스스로 챙겨야 하는 프리랜서로서의 출근을 알리는 의식이자, 그날 하루를 뭘 하며 보내야 할지 계획하는 시간이다.

여름에 가장 많이 만들어 먹는 메뉴는 여름 샐러드다. 오이와 토마토를 필수로 준비하고, 그 외에 좋아하는 제철 과일을 마련한다. 샐러드를 만들기에는 딱딱하고 단맛이 나는 과일이 좋다. 대표적으로는 초록 사과, 딱딱한 복숭아, 자두, 참외 같은 것. 물이 많고 잘 으깨지는 수박, 망고, 멜론 등은 궁합이 별로다. 식감을 위해 모차렐라나 페타 치즈를 넣어도 맛있다.

준비한 모든 재료를 비슷한 모양으로 깍뚝 썰고, 그 위에 레몬즙을 뿌리고(1인분 기준, 레몬 4분의 1개에서 반 개), 갈아서 사용하는 소금과 후추를 일곱 바퀴쯤 갈아 넣는다. 그 위에 올리브유를 두세 바퀴 휘익 뿌리고 잘 섞어주면 끝. 여름의 맛이 가득한 샐러드를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으며 그날의 일정을 곱씹고 열의를 다진다. 언제 먹어도 맛있고 만들기도 간단해서 여름날 대부분을 이 샐러드와 함께 난다.


오후 3시_ 신비한 여름의 맛, 신비 복숭아 

여름 하면 빠지지 않는 과일이 복숭아다. 더불어 여름이 되면 빠지지 않는 대결이 딱복파 vs 물복파다(참고로 나는 물복파). 하지만 이 대결을 종식시킬 만한 전천후 복숭아가 있으니, 바로 신비복숭아다.

경산 지역을 중심으로 재배되는 신비복숭아는, 몇 년 전 혜성같이 등장한 하이브리드 복숭아다. 모양은 천도복숭아지만 그 안은 백도인 복숭아. 후숙을 거치지 않으면 딱딱한 복숭아로 먹을 수 있고, 후숙하면 물복숭아로도 먹을 수 있다. 달콤하고 탱글한 과육으로 복숭아 특유의 텁텁함이 없고 껍질째 먹을 수 있어서 간편하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먹을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다는 것. 마치 초당 옥수수처럼 채 한 달만에 판매가 시작되고 끝난다. 그러므로 신비복숭아가 눈에 보인다면? 주저 없이 집어 들어야 한다.

아침을 먹고 한참 업무에 몰두한 다음, 오후쯤 졸음과 허기가 몰려올 때면 냉장고를 열어 차게 해 둔 신비복숭아를 꺼낸다. 두 개쯤 대충 닦아서 소파에 털썩 앉아 크게 한 입 베어 문다. 뚝뚝 떨어지는 과즙 한 방울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오물오물 씹어 먹다 보면 당 충전과 함께 분위기가 환기된다. 신비복숭아를 만나고 여름이 더 좋아졌다.




오후 8시_ 반려견과 밤 산책 

그날 일정을 모두 마치면,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차례다. 여름날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덥기 때문에, 지열이 발에 직접적으로 닿는 개들은 해 있을 때 외출이 쉽지 않다. 그래서 저녁까지 챙겨 먹고 나면 슬슬 산책 준비를 한다. 주머니에 개가 좋아하는 간식을 잘게 잘라 집어넣고, 배변 봉투를 준비하고, 개의 체온을 낮춰주는 쿨 티셔츠를 입혀 산책줄을 잡아 함께 나선다. 작년에 이사한 동네에는 주변에 공원이 여러 개 있다. 이사할 동네를 둘러보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요소 중 하나다. 나도 지내기 편해야 하지만 개도 살기 편한 동네일 것. 그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주변에 산책할 공간이 넉넉히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택한 이 동네는 조용하고, 공원이 많고, 바로 앞에 초등학교와 파출소가 나란히 있어서 안심이 된다. 그리고 오래된 동네라 그런지 수령이 긴 나무도 많고, 어르신들도 많이 살고 있어 평화로운 소도시 느낌이 물씬 풍긴다.

매일 밤 동네 주변을 개와 함께 걷는다. 집 현관문을 나설 때마다 어떤 날은 한여름이 맞나 싶게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어떤 날은 대낮의 열기가 채 빠지지 않아 후끈한 공기가 온몸을 감싼다. 개는 기다렸다는 듯 앞서 걸으며 이곳저곳 냄새를 맡고 컴퓨터 모니터 앞에서 잔뜩 찌푸리고 있던 내 얼굴도 부드럽게 펴진다. 하루 중 유일하게 개와 내가 자연 앞에서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천천히 한 시간쯤 걸으면 몸 구석구석에서는 땀이 배어져 나오고, 개는 혓바닥을 잔뜩 내밀고 헥헥거린다. 그때쯤이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오후 10시 30분_ 탁상 선풍기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일찌감치 침대에 눕는다. 기계가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거나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것은 나의 오랜 밤 습관. 에어컨을 틀어도 목 부분에는 땀이 배어서 얼마 전, 침대 옆 탁자 위에 올려두고 쓸 탁상 선풍기를 마련했다.

앙증맞은 사이즈이지만 회전도 되고, 바람도 여러 강도로 조절할 수 있는 똘똘이 선풍기다. 에어콘을 26도쯤으로 틀어놓고, 탁상 선풍기를 회전으로 돌리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날씨가 조금이라도 더우면 침대 밑으로 기어들어가는 개도 이렇게 해두면 침대 위로 올라와 내 위에 눕는다.

은은하게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부드러운 개의 털을 매만지며 보내는 여름밤. 그날 하루를 돌아보면 아쉬운 일도 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그 모든 게 다 상관없어진다. 나, 오늘도 열심히 살았네. 너도 그렇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누워서 그릉대는 우리 개 역시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해 살았다는 걸 안다.

별것 없는 여름날이 또 이렇게 저문다. 하지만 내일도 나는 일어나 아침을 차릴 것이고, 냉장고를 열어 여름 과일을 맛볼 것이고, 밤이 되면 개와 함께 산책할 것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이렇게 개와 함께 누워 하루를 마무리할 것이다. 나의 모든 여름날은 휴식이다. 이 시간을 조금이라도 놓치고 싶지 않으니 열심히 누려야 한다. 그 시간을 통해 나는 충전된다. 이 계절이 준 위안으로 나머지 세 계절을 버틸 수 있다.


작가 소개

김신회 _ 10년간 TV 코미디 작가로 일했고 10년간 에세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렇지 않구나>, <가벼운 책임>, <서른은 예쁘다>, <아무튼 여름> 등의 에세이를 출간해 바쁜 일상에 쫓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따뜻한 위로를 건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