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최주식, <오토카 코리아> 편집장, 시인
현대 액션 영화에서는 온갖 슈퍼 스포츠카가 총출연한다.
하지만 이런 영화들 속의 스포츠카는 무작정 달리고 부수는 데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는 느낌이다.
이에 반해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본드카는 클래식한 멋으로 또 다른 에너지를 전달한다.
마초적인 이미지를 완성한 ‘본드카’
움직임은 에너지를 가진다. 영화는 대형 스크린에서 보여지는 움직임을 통해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또는 고요한 에너지를 전달한다. 많은 영화적 장치 중에서 자동차의 경우 빠른 속도감을 통해 그러한 에너지를 분출한다. 대표적인 예로 꼽을 수 있는 <분노의 질주> 시리즈는 페라리, 맥라렌, 람보르기니, 부가티 등 온갖 슈퍼 스포츠카가 총출연한다. 하지만 이 시리즈는 어느 순간부터 무작정 달리고 부수는 데 에너지가 집중되고 있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초기 시리즈는 좋아했지만 뒤로 갈수록 스케일이 커지면서 오히려 흥미가 줄어든 느낌이다.
이에 반해 007 시리즈에 등장하는 본드카는 클래식한 멋으로 또 다른 에너지를 전달한다. 제임스 본드는 오랜 기간 동안 대중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세계적 아이콘이며 수많은 첩보 영화에 영감을 주었다. 제임스 본드는 “마티니, 젓지 않고···”라는 대사로 표현되는 술과 여자(본드걸), 그리고 자동차(본드카)를 통해 독자적이고 마초적인 이미지를 완성한다. 이들 요소는 한 가지라도 빼먹으면 007 시리즈가 아닌 것이 될 만큼 필수 요소가 되었으며 특히 본드카는 결정적인 위기 순간에 등장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처음 애스턴 마틴이 등장한 영화 007 골드핑거
본드카로 사랑받아온 애스턴 마틴
역대 본드카로 로터스 에스프리, 토요타 2000GT 컨버터블, BMW Z8 등 다양한 차종이 등장했다.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8)에 나왔던 로터스 에스프리는 섹시한 스타일로 이상적인 본드카에 가깝다는 평을 받기도 했지만 더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는 브랜드의 전략과도 상충하는데 이 시리즈와 가장 좋은 파트너십을 맺어온 것은 애스턴 마틴이다. 수십 년간 007 시리즈에 차량을 제공해온 애스턴 마틴은 영화를 제품 홍보와 판매에 적극 이용해왔다. 심지어는 Q 디비전을 만들어 007 시리즈를 활용한 스페셜 모델을 제작, 판매하고 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역시 클래식 DB5다. 2인승 그랜드 투어러(GT) 애스턴 마틴 DB5는 DB4의 마지막 시리즈에서 발전한 모델로 1963년부터 1965년까지 생산되었다. DB라는 이름은 1947년 회사를 설립한 데이비드 브라운(David Brown)의 이니셜에서 따온 것이다. 물론 DB5가 시리즈의 맨 처음 모델은 아니다. 원작 소설가인 이안 플레밍(Ian Fleming)은 1953년 소설 <카지노 로얄> (Casino Royale)에서 벤틀리 4.5L라는 모델을 선택했다. 거대한 슈퍼차저를 달고도 느렸던 이 차는 크고 무거워서 다루기도 힘들었다. 모든 면에서 본드카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007 골드 핑거 영화 촬영 현장
고전적인 실내, 경쾌한 엔진을 자랑
소설 속 본드가 처음 애스턴 마틴을 만난 것은 <골드핑거>(Goldfinger)에서였다. 영국 정보국 M16이 그에게 준 차는 회색 DB3이었다. 그러나 1964년에 영화화되면서, 특수효과 전문가 존 스테어즈(John Stears)가 만든 비밀 무기를 실은 최신 DB5로 무장했다. 사실 1950년대에 경주용 스포츠카를 만들던 애스턴 마틴은 부드럽고 안락한 자동차를 만들기 시작하면서 주행감각이 시시해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렇지만 영화는 이미지를 만든다. 무엇보다 DB5는 상상력을 자극했다. 무기를 장착하고 옆 좌석에서 위협하는 악당을 버튼 하나로 날려 보내며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했다. 게다가 세련된 스타일과 고전적인 실내, 경쾌한 엔진이 제임스 본드역의 숀 코너리와 잘 어울렸다. 숀 코너리는 007 시리즈를 통해 스타덤에 올라섰고, 그는 제임스 본드의 전형을 확립한 배우로 인정받았다.
DB5 골드핑거 컨티뉴에이션 한정판 제조 현장
불사신 캐릭터의 주인공과 오버랩되다
이후 DB5는 <골든아이>(1995), <투모로우 네버 다이즈>(1997) 등에 출연했으며 <카지노 로얄> (2006)에서는 악당인 알렉스 디미트리오스 소유로 나온다. 하지만 본드는 카드 게임 내기에서 디미트리오스를 이긴 후 이 차를 얻는다. 진짜 주인을 찾아간 셈이다. 이러한 서사는 본드카가 단지 도구로서의 자동차가 아니라 제임스 본드의 분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리즈의 서사는 이야기가 끊어졌다가 이어지는 데서 찾기도 하는데 곳곳에 숨겨진 암호가 있다. 그것을 발견해내는 것이 오랫동안 이어지는 시리즈의 또 다른 재미일 것이다. DB5는 ‘스카이폴’(2012)의 피날레에서 파괴되고 <스펙터> (2015)에서 다시 등장한다. DB5는 Q의 지하 작업장에서 여러 단계의 재건 과정을 거쳐 완전히 복구된다. 그리고 엔딩에서 본드가 몰고 떠나는 모습이 나온다. DB5는 결코 죽지 않는 불사신 캐릭터의 제임스 본드와 오버랩된다.
DB5는 55년 동안 18개 시리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최근작인 25번 째 시리즈 <노 타임 투 다이>(2021)에서 DB5는 마지막 임무를 수행한 제임스 본드, 다니엘 크레이그와 함께 했다. 이탈리아의 오래된 소도시 마테라의 아름다운 풍광 속에 본드가 모는 DB5의 등장 장면은 과연 팬들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사운드가 흐르고 긴박한 카 체이싱이 시작된다. 방탄 차체로 적들의 총탄 세례를 막아내는 DB5는 앞 펜더 안에 330 구경 쌍둥이 기관총을 장착하고 있다. 헤드램프 뒤에 숨어있던 총구가 튀어나와 불을 뿜는다. 총신은 높이거나 낮출 수 없으므로 오직 차를 회전시켜 목표를 조준해야 한다. 본드는 제 자리에서 차를 360도 회전시키며 양쪽 각각 분당 650발을 발사한다.
007 노 타임 투 다이에 나왔던 DB5
시간을 초월한 클래식카의 가치
1964년 <골드핑거>로부터 57년이 지난 후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등장한 DB5는 시간을 초월한 클래식카의 가치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노 타임 투 다이> 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차는 랜드로버 시리즈III 초기 디펜더였다. 퇴역 후 자메이카에서 몰고 다니는 클래식 디펜더는 본드의 야성적인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잠깐 등장하기는 하지만 애스턴 마틴 발키리나 후임 007이 타고 나오는 V8 밴티지 등 현대식 슈퍼 스포츠카는 그다지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다.
영화에는 엄청난 액션과 추격 장면을 위해 여러 대의 DB5 복제품이 만들어졌다. 중고 섀시에 탄소섬유 차체를 결합하는 방식이었다. 액션에는 복제품이 사용됐지만 대부분의 클로즈업 장면은 오리지널 DB5로 촬영했다. 또한 랠리 드라이버로 유명한 마크 히긴스가 스턴트 운전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또 하나 흥미로운 사실은 애스턴 마틴이 영화 속 DB5를 완벽하게 재현, 25대 한정판으로 만들어 고객에게 판매했다는 것이다. DB5 골드핑거 컨티뉴에이션이라는 이름의 이 특별한 모델 제작을 위해 오스카상을 수상한 특수효과 디자이너 크리스 코보울드(Chris Corbould) 감독을 불렀다. 3단 회전식 번호판과 기관총, 후방 방탄 스크린, 기름띠와 연막 장치 등을 그대로 되살렸다. 대시보드 중앙에는 모의 지도 역할을 하는 원형 브라운관 스크린이 장착되어 있고, 기어 셀렉터 상단의 빨간 버튼은 동반석 탑승자를 밖으로 날려버리는 장치. 엔진은 오리지널 모델의 직렬 6기통 4.0L 버전을 살짝 상향 조정해 최고출력 290마력을 낸다. 액셀러레이터를 지그시 밟을 때 트리플 SU 카뷰레터에서 발생하는 사운드가 레트로 감성을 더한다. 애스턴 마틴은 공식 발표에서 DB5 골드핑거가 도로에 합법적이지 않다는 단서를 달았지만 이 차를 소유하려는 열정을 막지는 못했다. 가격은 275만 파운드(약 45억 원).
2023년 애스턴 마틴 DB5 6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차 내부
인생은 무상하고 클래식카는 남는다
<카지노 로얄>(2006)은 시리즈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가 제임스 본드가 살인면허를 받기 전의 활약부터 소개한다. 이 영화가 전환점이 되는 이유는 이때부터 다니엘 크레이그가 제임스 본드 역을 맡았기 때문이다. 그가 제임스 본드가 되면서 시리즈의 분위기와 성격이 확연히 바뀌었다. 이전에 볼 수 없던 스케일의 로케이션과 한계치를 모르는 맨몸 액션, 그리고 오늘만 사는 남자 특유의 시니컬한 페이소스가 다니엘 크레이그라는 배우의 얼굴과 온몸에 녹아들어 새로운 버전의 제임스 본드가 탄생한 것이다. 관객은 더 넓은 범주로 확장되었다.
<카지노 로얄>부터 15년간 제임스 본드역을 맡은 다니엘 크레이그는 <노 타임 투 다이>를 마지막으로 007 시리즈에서 완전히 은퇴했다. 영화에서 그의 최후를 다루는 방식은 팬으로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하는 수 없다. 그는 숀 코너리 이후 가장 제임스 본드 역에 어울렸던 배우로 평가받는다. 다음 시리즈의 주인공은 누가 될지 알 수 없지만 애스턴 마틴 DB5는 계속 등장할 것이다. 한때의 제임스 본드, 숀 코너리는 지난 2020년 생을 마감했다. 인생은 무상하고 클래식카는 남는다.
007 주연배우 다니엘 크레이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