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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들이
사랑한 섬

글_ 신기환 미술칼럼니스트, <90일밤의 미술관> 저자 

 

많은 예술가들에게 섬은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곤 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포착한 쇠라, 타히티섬에서 생명의 근원을 탐구한 고갱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색채의 과학, 점묘법의 대가 조르주 쇠라

가로 3m, 세로 2m에 달하는 거대한 화폭에 휴양지의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프랑스 파리 인근의 그랑드 자트 섬에서 한가로이 휴일 오후를 보내고 있는 19세기 파리지앵들의 모습이죠. 재미있는 건 수십만 개의 점으로 이루어진 이 그림 속 인물들이 마치 움직임도, 표정도 없는 마네킹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산이 흩어지는 한낮의 햇살만큼은 유화물감으로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나 생생한데요. 점묘법의 창시자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가 2년에 걸쳐 완성한 대표작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입니다.

당시 대부분의 인상주의 화가들은 빛의 변화에 따른 순간적인 인상을 즉흥적으로 포착하고 거친 붓 터치로 화폭을 빠르게 채우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는데요. 반면, 쇠라는 선배들의 정리되지 않은 붓 터치를 다양한 색채 대비를 통해 법칙화하고 빛의 분석에 대해 엄밀한 이론과 과학성을 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화가였습니다.

그 결과 여러 가지 다양한 색의 물감을 혼합하는 대신 원색 그대로를 우리 눈에서 재조합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요. 이러한 자신의 이론을 작품에 적용하기 위해 쌀알 크기의 점을 수없이 찍어 다양한 색채와 빛, 형태를 만들어내는 점묘법을 고안해내기에 이릅니다. 마치 오늘날 디지털 이미지를 확대했을 때 보이는 픽셀 구조와 비슷한 이치라고 보면 이해하기 쉽죠. 이렇게 수많은 점을 배치하면 색의 채도가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 눈이 보기에 물감을 섞은 색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순수한 빛을 낼 수 있게 됩니다.

 

섬 하나를 그리는 데 2년이 걸려

그리고 쇠라는 자신의 점묘법을 완성하기 위해 그랑드 자트 섬을 찾아가 그곳의 풍경을 그리기로 마음먹게 되는데요. 그랑드 자트 섬은 센강을 따라 파리로 진입하는 뱃길 초입에 떠 있는 작은 섬으로, 당시 파리 시민들의 큰 사랑을 받던 휴양지였습니다.

쇠라는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을 포착하기 위해 틈만 나면 이곳을 방문했는데, 그림 속 인물들도 자세나 방향을 수십 번씩 스케치한 후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들을 모아 재배치한 것입니다. 이 작품에 들인 공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60점이 넘는 드로잉과 습작이 남아 있고, 완성하는 데에도 꼬박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이 그림은 가까이에서 보면 1cm가량 되는 매우 작은 원색의 점들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작은 점들은 더 이상 점으로 인식되지 않고 우리의 눈에서 자연스러운 색의 혼합이 일어나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는데요. 쇠라는 혁신적 기법으로 완성한 이 대작을 1886년 제8회이자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에 출품해 엄청난 화제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빛과 색채에 대한 점묘법의 과학적 원리에 수많은 예술가들과 대중들이 열광적으로 반응했던 것이죠.

하지만 안타깝게도 쇠라의 독창적인 실험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합니다. 새로운 전시회를 준비하는 도중 전염성 후두염이 악화되어 31살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죠. 고작 몇 개의 작품으로 19세기 프랑스 화단에 신선한 자극을 준 한 젊은 화가의 허무한 최후. 그러나 쇠라의 혁신적인 스타일과 기법은 이후 야수주의, 추상화 등 현대미술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는데요. 키를 훌쩍 넘어서는 거대한 캔버스 위를 묵묵히 점으로 채워 나갔던 쇠라, 그는 알고 있을까요? 자신의 그림이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과 평안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요.

 

그랑드 자트를 위한 습작, 1884

 

 

타히티 섬에서 원시를 그린 화가, 폴 고갱

폴 고갱이 화가로서 예술적 영감을 꽃피운 타히티는 남태평양 동쪽의 프랑스령 섬나라로 오늘날 유명한 관광지지만 그 유명세의 은덕은 고갱에 힘입은 바가 크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고갱은 타히티에 10년 조금 모자라게 머물렀는데, 고갱의 역작과 걸작은 모두 타히티 시절 나왔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죠. 고갱이 화가로서의 승부수를 타히티에서 던지기로 마음먹은 가장 큰 이유는 이국적인 문화와 원시적인 이미지에 대한 이끌림 때문이라 할 수 있는데요. 그가 추구한 예술적 화두는 생명의 근원 탐구였고,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모티브를 바로 ‘원시성’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죠.

1891년 6월, 고갱은 두 달이 넘는 긴 항해 끝에 마침내 타히티 섬의 수도 파페에테에 도착하게 됩니다. 그러나 배에서 내려 처음 본 파페에테는 고갱이 머릿속에 그려온 풍경과는 너무도 달랐는데요. 이미 서양 문물이 유입되어 곳곳에 유럽식 자본주의 문화가 퍼져 있었던 것이죠. 다행이 파페에테를 조금 벗어나자 고갱이 생각했던 원시성이 고스란히 살아 있는 한적한 마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잠시 파리로 돌아간 2년 동안의 기간을 제외한다면 무려 8년 간 고갱은 이곳에서 생활을 했죠.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대자연의 야생성과 원주민들의 순수하고 천진난만한 모습은 화가 고갱의 예술적 본능을 단숨에 일깨웠습니다. <타히티의 여인들>이 그 첫 성취의 결과라 할 수 있죠. 화면을 가득 채운 두 여인, 구릿빛 피부가 우람한 체격에 날개를 달아 건강미를 한껏 고조시키고 있습니다. 얼굴이나 몸, 어디에서도 인공적인 흔적을 발견할 수가 없죠. 자연미가 어떤 것인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고독한 화가의 마음을 사로잡은 섬

남태평양 햇빛에 순응한 여인들의 검게 탄 피부는 화가가 태고의 비밀을 간직한 인간 존재의 원형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게끔, 시간을 과거로 이끌고 있습니다. 얼굴 생김새와 손과 발은 투박함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데, 이 순간 여성미에 대한 우리의 고정관념은 여지없이 무너지게 됩니다. 고갱은 아름답다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학습된 고정관념이 아니라, 스스로 그렇게 있는 자연의 본래 모습에서 찾고자 했고, 타히티의 여인들이 그 의도를 충족시켜준 것인데요. 

 

 

타히티의 여인들, 1891 

 

그러면서도 고갱은 슬쩍 문명의 흔적을 흘려 자신이 추구한 훼손되지 않은 문명 이전의 원시성의 속살을 일깨우는 예술적 감각을 드러냅니다. 식물 섬유처럼 생긴 풀을 꼬고 있는 오른쪽 여인이 입고 있는 분홍색 원피스를 통해서 말이죠. 이 원피스는 타히티 섬과 상관없는 서양에서 흘러 들어온 것입니다. 

 

 

언제 결혼할 것인가, 1892

 

반면 고개를 약간 숙이고 황금빛 모래사장에 오른손을 짚고 있는 왼쪽 여인이 걸치고 있는 붉은색 꽃무늬 치마는 파레오라 불리는 타히티 섬 전통 의상입니다. 오른쪽 귀와 치마에 장식된 꽃무늬는 타히티에서 피는 티아레 꽃잎이죠. 원시성과 문명의 상징을 동시에 내세워 원시성의 간절함을 부각하면서 이곳이 타히티 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인데요. 

“문명의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떠납니다. 나는 소박한 그림을 그리고 싶어요.” 고갱이 파리를 떠나며 남긴 말입니다. 사실 고갱은 지금의 명성과는 달리 사는 동안 호의와 풍요를 별로 누려보지 못한 고독한 화가였습니다. 그런 그에게 타히티 섬은 마음을 사로잡은 ‘즐거운 땅’이었는데요. 그곳에서 마주한 야생의 아름다움과 강렬한 색채를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고, 그것이 그만의 화법이 되어 미술사에 길이 남을 후기 인상주의의 대표 화가로 이름을 올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