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열 현악기제작가, 이성열 스트링랩 대표
“하고 싶은 일을 하셔서 참 행복하시겠어요” 이성열대표가 현악기제작가가 되고 난 후 종종 듣는 말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더욱 온전한 행복을 맞이한 그를 만나 보았다.
나무를 조각해 소리를 만들다
어느 오피스텔 2층, 간판도 없이 조용히 자리하고있는 현악기 공방 ‘이성열 스트링랩’. 커다란 스피커에서 클래식이 잔잔히 흘러나오고, 나무와 악기가 가득한 공간에서 이성열 대표를 만났다. “첼로, 비올라, 바이올린 같은 악기를 만들면서 수리도 하는 현악기제작가입니다. 현악기제작가라고 하면 너무 피상적이라 ‘나무로 소리를 조각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좋아해요.” 이성열 대표는 2008년에 이탈리아 크레모나 국제현악기 제작학교(IPIALL)를 수석으로 졸업, 칼슨&노이만 공방에서 도제 교육을 받은 후 2010년에 공방 문을 열었다. 재학 당시 피소녜 현악기제작 콩쿠르에서 첼로 1위로 금메달을 수상하였으며, 2018년에는 현악기제작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미텐발트 국제 현악기제작 콩쿠르에서 첼로 2위로 은메달을 수상하였다. 언뜻 보아도 현악기제작가로서 훌륭한 이력을 가진 이성열 대표. 그러니 자연히 그가 어렸을 때부터 줄곧 악기를 만들어 왔을 거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가 이탈리아 크레모나로 떠났을때, 즉 악기를 만들기 시작한 나이는 40대 중반이었다. 이성열 대표는 전자공학을 전공, 졸업 후 곧장 IT 업계에 취업했다. 슈퍼컴퓨터 제조사 크레이에서 12년간 근무하는 등 무려 20년을 IT 업계에 몸담았던 베테랑 엔지니어다. 직장인 오케스트라에서 취미로 첼로를 연주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악기 만드는 일을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런 그가 어떻게 현악기 제작가가 되었을까.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만나다
“은퇴 없는 일을 하고 싶었습니다. 한 번뿐인 인생, 딱 반으로 나눠서 한 번은 하고 싶은 일을 해보자는 생각도 있었고요. 어떻게 보면 동경하던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저를 이 길로 빠져들게 한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손으로 뭔가를 만드는 일과 클래식 음악을 좋아했다는 이성열 대표. 그는 첫 번째 직업도 적성에 잘 맞아 굉장히 신나고 즐겁게 일했다. 그런데 스타트업에 뛰어들면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맨땅에 헤딩을 하는 것과 다름없는 상황이 계속되면서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점점 에너지가 고갈되어 가는 그의 모습에 아내가 먼저 “이러다 죽을 것 같으니 좀 쉬어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성열 대표는 재충전을 위해 잠시 멈추기로 했다. 그렇다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MBA 과정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토플과 GMAT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이게 맞나’, ‘이거 말고 할 수 있는 건 없나’ 자꾸 의문이 들었다고. 종이에 생각나는 것들을 적어보기도 하고, 아내와 함께 상의하기를 반복, 인생에 첫 쉼표를 찍는 순간을 이렇게 보내도 되는 걸까 끊임없이 고민하며 1년을 보냈다. 고민 끝에 그에게 남은 건 ‘음악’, ‘소리’, ‘만들기’, ‘나무’ 같은 단어들이었다. “슈퍼컴퓨터는 IT 분야에서도 굉장히 특수한 분야였어요. 뭐랄까. 컴퓨터 덕질의 끝에 가면 있을 법한분야랄까요. 그런 특수한 분야에 매력을 느낀다는 점에서 제가 ‘장인(匠人)’ 쪽이랑 맞단 생각을 하게됐어요.” 이성열 대표는 진로를 결정하는 시기에 음악가를 꿈꿨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했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음악가가 되는 건 불가능했고, 현실적으로 선택한 진로가 전자공학이었다. 그렇게 잊고 살았던 꿈을 다시 마주한 그는 이탈리아에 있는 악기 제작학교를 찾기에 이르렀다.
두려움을 무릅쓰고 나아가다
하고 싶은 일, 또 그 일을 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았지만 도전은 두려웠다. 현악기제작가가 되기 위한 과정을 알아보니 적어도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는데, IT 업계는 변화가 빨라 몇 년만 지나도 다시 일하기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가 이탈리아로 떠난다는 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것이었다. “1년만 해보고 안 맞으면 돌아오겠다는 마음으로 이탈리아로 갔어요. 그런데 6개월도 채 되지 않아 ‘진작 올 걸’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악기를 만드는 게 적성에 정말 잘 맞았고 공부를 하는 동안 좋은 일이 많이 생겼어요.” 5년 과정의 이탈리아 크레모나 국제 현악기 제작학교에 입학한 이성열 대표는 시험을 통해 3학년으로 재학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에서 배우는 악기 작업과 별도로 집에서도 밤마다 악기를 제작을 하면서 관련 책과 논문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조금이라도 더 배우고 싶은 마음에 개인적으로 여러 마에스트로를 찾아가 지도를 받는 등 악기 만드는 일에 몰두하다 보니 시간이 모자를 지경이었다고. 그의 열정은 입학 2년 만에 콩쿠르 입상에 이어 수석 졸업이라는 결실을 보았다. 공부를 하는 동안 글로벌 금융위기 사태를 겪으며 난관도 있었지만, 아내의 적극적인 지원과 응원 덕분에 계획했던 5년이라는 시간을 배움과 경험으로 가득 채울 수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장인의 길을 걷다
“악기를 속성으로 만드는 방식을 아예 안 배웠어요. 학교와 공방에서 배운 대로 제작 공정 하나하나에 정성을 쏟다 보니, 마치 콩쿠르 제출을 앞둔 악기를 만드는 것처럼 시간이 굉장히 오래 걸립니다. 사실 악기를 구매해 주는 연주자가 심사위원이나 다름없죠. 저도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훌륭한 악기를 만들고 싶고요.” 이성열 대표는 악기를 만들며 기뻤던 순간이 너무 많아 다 이야기하기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그래도 꼭 하나 잊지 못할 순간을 꼽자면, 보통 2~3일이면 끝날 악기 앞판의 아칭 마무리 작업을 한 달이 넘도록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눈이 한 꺼풀 벗겨지는 것처럼, 부분적으로 보였던 첼로의 굴곡진 면이 아름다운 선의 연속으로 한눈에 보였을 때다. 이런 경험은 누가 알려준다고 해서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더욱 의미 있었다. 어느덧 10년 넘게 현악기제작가의 길을 걷고 있는 그는 지금도 한결같이 악기에 온 마음을 다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마음을 알아본 연주자들의 든든한 파트너가 되어주고 있다. 요즘 제2의 인생을 꿈꾸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성열 대표가 두 번째 직업을 선택한 과정을 공유하자면, 먼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딱 한 개만 생각할 게 아니라 4~5개 정도 찾아본 다음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맞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해 보길 바란다. 이성열 대표는 ‘혹시 내가 한 결심이 철없는 생각은 아닐까’라는 의심 속에서 최대한 현실적인 답을 찾고자 노력했다. 다만 결정을 했을 때는 ‘가지 않은 길을 한번 가본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한다. 그런 마음이라면 설사 좌절을 겪더라도 지금보다 더 나중에 아쉬움을 남기지 않을 좋은 경험을 했다 생각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