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이나 파산을 초래했던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의 초상화
“죽음과 세금 외에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없다.” 이 문장은 원래 프랑스 옛 속담에서 유래했던 것으로 벤자민 프랭클린이 자서전을 정리하며 영국의 지인들에게 보냄으로써 유명해졌다. 그만큼 우리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세금,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 역사에서 지혜를 찾아보자.
글_ 안계환 금융칼럼니스트, <세계사를 바꾼 돈> 저자
유럽 왕이 강력하지 않았던 이유
중세 유럽에서는 세금을 받아가던 존재가 국가가 아니라 교회였다. 교회는 왕이나 황제보다 힘이 셌다. 관혼상제와 호적관리 등 민사적 영역에서부터 교육과 학술연구, 복지, 지역공동체의 도덕규범을 모두 담당했다. 외교와 국방 그리고 형사재판 정도만 영주의 영역이었을 뿐 사실상의 정부였다. 프랑크왕국의 경우 거의 유일한 전국 조직망이던 교구가 기사계급의 조악한 행정조직을 대신했다고 할 정도다. 따라서 민중들은 소득의 10%를 지역교회에 냈다. 567년의 투르 공의회와 585년의 제2차 마콘 공의회에서 교회의 징세권이 확립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부터 십일조는 민중의 의무로 명문화되었고 만약 납부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교회 출입금지, 파문 등의 벌칙도 부과될 수 있었다. 교회에 갈 수 없거나 파문된다면 누군가에게 살해되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 누가 세금을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후 교회세는 1789년 발생한 프랑스혁명 때까지 천년 이상 유지되다가 점차 폐지되었다. 이러한 교회세의 납부 구조는 유럽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끼치는데, 종교개혁의 빌미가 되기도 했고 왕권 약화에도 기여했다. 교회가 가장 먼저 소득세를 거두어가니 지역을 다스리는 영주나 왕은 추가로 세금을 부과하기 어려웠다. 프랑스 왕이라 해서 프랑스 전체의 세금을 거둘 수 없었으며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정말 이름뿐인 황제였다. 왕이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니 전쟁을 치러야 할 때 특별히 세금을 부과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귀족과 제후들이 반발할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따라서 왕은 돈이 되는 광산을 확보하거나 통행세, 관세와 같은 간접세를 마련해야 했다.
안토니오 반 다이크 그림
카를 5세는 과중한 세금으로 민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소비세에 의존도가 높았던 에스파냐
17세기 영국에서는 차, 담배, 와인, 증류주 등에 관세를 매겨 국가의 수입에 보탰다. 한때 프랑스산 와인 판매가격의 80%는 관세이기도 했다. 유통과정에서 관세가 많이 붙던 대표적 물품이 후추였다. 인도네시아의 향료제도에서 유럽 소비자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관세가 붙었던지 후추 1g가격이 무려 은 1g과 같았다. 관세는 수출과 수입 모두에 붙여졌는데 오스만제국에서는 수입에 5%, 수출에 2~5%를 부과했다. 유럽의 대항해시대는 이렇게 붙여진 관세로 인해 수입물품의 가격이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에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에스파냐의 군주들은 교회세의 한계를 피하기 위한 세금으로 소비세를 생각해냈다. 이는 오늘날 세계 각국에 보편적으로 도입되어 있는데 나라마다 세율이 다르다. 문제는 이 ‘세금’과 ‘종교’가 에스파냐 몰락의 원인이었다는 사실이다. 군주들은 자신들이 기독교 선교의 최전선에 있다는 사실을 자각해 유대인과 무어인을 이베리아에서 몰아냈고 이로 인해 경제가 몰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기에 소비세를 도입함으로써 민중들의 인기까지 잃었다. 대항해시대가 열려 가장 큰 과실을 얻은 나라가 에스파냐 아니던가? 남미대륙에서 확보한 은만 잘 관리했어도 강대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는 합스부르크와 에스파냐에 이르는 영토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자금이 있었다. 하지만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등 주변국과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다. 또한 이 나라의 소비성향이 지나치게 높았다는 데도 문제가 있었다. 자국에서 쓰는 생활필수품과 식민지에 보낼 물품의 거의 대부분을 수입에 의존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아메리카에서 들어온 은은 에스파냐에 머물지 않고 네덜란드 무기상인과 이탈리아와 영국의 은행가들에게 넘어갔다. 이 때문에 펠리페 2세는 1557년과 1575년 두 번의 파산선고를 해야만 했다.
세금 관리 잘 못하면 인기 떨어져
이의 해결책으로 국왕은 소비세의 세율을 대폭 올렸다. 초기에는 부동산과 일부 상품거래에만 부과되었고 세율도 5%정도로 높지 않았다. 점차 소비세율은 두 배로 올랐고 제국 내로 확대되었다. 덕분에 국가세수는 증가했지만 지역의 반발을 불러왔다. 그 대표적인 곳이 네덜란드였다. 당시 네덜란드는 에스파냐의 영토였지만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늘면서 독립 분위기가 무르익던 중이었다. 소비세로 시작된 네덜란드의 반발은 무장봉기로 이어졌다. 1568년부터 시작해 약 80년간 이어진 독립전쟁 결과 네덜란드가 떨어져 나갔다. 1588년에는 아르마다가 영국에 패했고 30년 전쟁에서도 패했다. 1640년에는 포르투갈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28년 후 에스파냐제국에서 독립했다. 결국 에스파냐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자금(아메리카의 은)을 잘 관리하지 못했고, 국내 산업도 일으키지 못했다. 자원관리에도 무능하고 통치력이 부족한 군주는 민중에게 인기가 없다. 군주의 인기가 없었던 건 세금 문제가 상당히 큰 영향을 준 것은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