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텐베르크가 고안한 인쇄기
글_ 안계환 금융칼럼니스트, <세계사를 바꾼 돈> 저자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은 독일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 그런데 금속활자를 통해 돈을 벌 생각을 한 것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독일이었다는 데서 엄청나게 큰 차이가 발생했다.
새로운 세상을 연 구텐베르크 인쇄술
오랫동안 인류의 대부분은 문맹이었기에 파피루스나 양피지에 기록된 지식들은 특정계층의 전유물이었다. 그러다 15세기 중반에 등장한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은 문자 소비의 대상을 성직자와 귀족에서 대다수 민중으로 넓혔다. 대량으로 인쇄한 문서를 누구나 구입해서 읽어볼 수 있었기에 문화의 폭발적 성장이 이루어졌다. 구텐베르크 인쇄혁명이 일으킨 가장 유명한 사건은 종교개혁이다. 그의 인쇄기로 처음 찍어낸 건 연옥의 벌을 감면해 준다는 ‘면죄부’였고 이것의 대량 인쇄와 판매는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으로 이어졌다.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발명한 것은 독일인이 아니라 한국인이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안다. 고려시대에 인쇄되었으며 현재 프랑스 박물관이 소장중인 『직지』가 그 최초다. 이는 1377년 7월 청주 부근의 흥덕사에서 찍어낸 책인데 이것이 세계최초의 금속활자 인쇄본으로 인정되었으니 구텐베르크가 인쇄한 『42행성서』보다 무려 80년이나 앞섰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그런데 여기에는 오랫동안 잘못 알려진 오해가 있다. 구텐베르크의 작업에서 진정한 의미는 금속활
자가 아니라 인쇄술의 혁신이라는 것. 즉, 금속으로 활자를 만들고 이를 인쇄기에 넣어서 출판 가능하도록 만든 인쇄술이었다. 이에 비해 고려의 금속활자 스토리에는 이전의 목판 인쇄술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는 이야기가 없다. 이는 결정적으로 금속활자의 활용성에 중대한 차이를 만들었다. 그렇다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과 고려, 그리고 조선의 인쇄술이 차이 나게 된 근본적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비즈니스 마인드 덕분
유럽에 종이가 전파된 후 인쇄술이 등장해 14세기까지는 부분적 목판인쇄 기법이 사용되고 있었다. 그때까지 일반적인 서적 보급은 필사에 의존하고 있었기에 가격이 너무 비쌌다. 수도사 한 명이 책 한권을 필사하는 데 2개월 정도가 걸렸기에 대량으로 복제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기업가정신에 눈을 뜬 사람이라면 이렇게 좋은 사업기회를 놓칠리 없다. 구텐베르크는 바로 이런 사업가적 마인드를 가진 사람이었다. 1398년, 독일지역의 마인츠에서 태어난 요한네스 구텐베르크는 부모의 유산을 물려받아 자기 사업을 시작했다. 1434년이 되자 마인츠를 떠나 스트라스부르로 가서 본격적으로 인쇄술을 연구했다. 그가 연구한 것은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아버지가 일한 조폐국에서 사용한 금화 제조기술이었다. 당시 금화는 금 덩어리를 문양이 새겨진 펀치로 때려 제조했다. 여기에 착안해 주형에서 제작한 인쇄용 금속활자를 나무틀에 하나하나 심어 조판하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두 번째 관심을 둔 기술은 포도 압착기에서 얻었다. 오늘날 ‘인쇄기’(press)를 가리키는 단어는 원래 포도주나 올리브유를 만드는 ‘압착기’(press)와 동일한 단어다. 로마시대 와인 제조업자들은 압착기를 썼는데 나사를 돌려 포도를 압축하는 기계였다. 구텐베르크는 여기서 나사 압착 기술을 가져와 인쇄기에 적용했던 것이다. 이렇게 개발된 금속활자 인쇄술 덕분에 유럽에서 폭발적 인쇄 수요가 탄생했다. 필사본에 비해 가격이 싸고 대량생산할 수 있다는 이점이 부각된 때문이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초상화
조선에서는 돈의 욕망을 자극하지 못했다
인쇄술이 유럽을 획기적으로 바꾸고 있을 때 조선의 인쇄술은 답보 상태를 면치 못했다. 금속활자 인쇄라면 한 권의 책을 수천 부씩 발행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한 번에 인쇄된 책이 수십에서 수백 부에 지나지 않았다. 대량으로 인쇄할 경우에는 여전히 목판 인쇄가 쓰였다. 초기에 목판에 글자를 새기려면 엄청난 노력이 들어가지만 인쇄공만 충분하다면 목판으로 인쇄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쇄를 담당하던 이들은 관아에 소속된 천민들이었고 그들의 인건비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더욱 중요한 문제는 지식독점이 해체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쇄를 국가가 담당하였기에 통치를 위한 서적 위주로 간행되었다. 또 몇 가지 원인이 더 있었는데 한자라는 문자의 특성도 그 하나였다. 라틴 알파벳은 조합해 글자를 만들 수 있지만 한자는 그렇지 못해 수많은 활자를 만들어 두어야 했다. 따라서 조선의 금속활자 제작에는 비용절감 요소가 없었다. 활자 제작에 소요되는 구리는 매우 비싸고 귀한 물건이었다. 더구나 국내 산출량은 미미했고 일본해서 주로 수입해야 했기에 국가적으로도 이를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결국 민간에서 활성화된 유럽에 비해 조선에서는 국가사업으로 인쇄를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국가 통치에 유리한 지식만 소통될 수밖에 없었고 새로운 생각의 정립이나 소통을 어렵게 했다. 인쇄를 통해 돈을 벌려고 했던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지 못했고 유럽처럼 혁명적 변화를 기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간행한 구약성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