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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을 지나서
북해까지

노스요크 무어스를 가로지르는 철도 교량, 리블헤드 비아덕

글·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걷고 싶은 곳이야말로 최고의 여행지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영국 브리튼 섬을 걸었던 그해 여름날 보름 동안은 그지없이 찬란한 나날들이었다. 야생화의 천국, 요크셔 데일스와 소설 <폭풍의 언덕>의 무대였던 노스요크 무어스의 추억을 되돌아본다.


시간이 흘러도 그리운 얼굴들 

레이크 디스트릭트와 요크셔 데일스와 노스요크 무어스, 3개의 국립공원을 누비며 잉글랜드 북부를 가로질러 횡단했다. 야생화 헤더 꽃이 만발한 계절, 잉글랜드 북부의 황무지 무어(Moor)는 완전한 보랏빛 낙원이었다. 길 위에서 만났던 이들은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정겨운 모습으로 내 머릿속을 맴돈다. 랑데일 골짜기에서의 뉴질랜드인 형제, 켈드의 숙소 버트하우스의 가일스 부부, 서너 번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던 미국인 셰릴리와 킨시, 그리고 산 밑에서 40분이나 나를 기다려준 테일러 여사와 그의 손자 에드워드, 모두가 하나같이 그리운 얼굴들이다. 일반적으로 영국 여행은 대도시 관광명소를 중심으로 이뤄진다. 런던이라면 빅벤이나 버킹엄 궁전 또는 코벤트 가든이나 웨스트민스터 등이 있고, 스코틀랜드로 올라간다면 에든버러캐슬 등이 필수 코스로 많이 등장한다. 그러나 CTC를 횡단하는 도보여행은 이런 명소 관광들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여정이다. 잉글랜드 동서 양쪽 해안과 만나고, 내륙의 산과 호수와 계곡 그리고 도시와 들판과 시골들을 두루두루 만나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에서 비롯된 서구 문명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이르러 만개되기까지는 영국의 역할도 컸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익숙해져 있는 서구 문화의 다양한 면들이 망라되어 있는 곳이 영국이다. 유럽을 지배하려던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정복하지 못한 땅이 또한 섬나라 영국이다. 그 섬의 가운데 허리 부분을 두 발로 뚜벅뚜벅 밟으며 횡단하는 CTC 트레킹은 유럽의 속살까지 경험하는, 영국 여행의 진수나 다름없다.


거침없이 펼쳐진 황야를 걷는 도보여행자들

  

계곡과 황무지가 공존하는 요크셔 데일스
요크셔 데일스
거리 112km. 소요기간 5일. 최저해발 30m.
최고해발 662m.

영국 횡단 CTC에서 만나는 두 번째 국립공원은 요크셔 데일스이다. 호수가 산재한 산악지방이었던 앞의 레이크 디스트릭트와는 완전히 다른 지세(地勢)를 보여준다. 사방은 거침없이 펼쳐진 황야와 그 너머 지평선뿐이다. 영국의 고산지대 황무지인 ‘무어랜드(moorland)’가 시작되는 것이다. 본디 바람이 거센 날이 아니더라도 제멋대로 설쳐대는 바람 물결에 눈을 제대로 못 뜨긴 하지만 무어의 바람은 트레커들에겐 청량제나 다름없다. 초원을 뒤덮고 있는 잡초와 야생화들은 그깟 바람 따위 면역이 되었다는 듯 대지에 바싹 붙어 저들끼리 똘똘 뭉쳐 있거나, 나무들은 한 그루 두 그루씩 서로 먼 거리를 유지하며 외롭게 서 있는 풍경이 잉글랜드 무어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풍기는 켈드와 리스 같은 작은 시골마을들은 물론 커비스티븐과 리치몬드같은 중세 이래의 대도시들도 이 구간을 지나며 만날 수 있다. 요크셔 데일스는 이십여 개의 ‘계곡(dale)’과 황무지 ‘무어(moor)’가 공존하는 국립공원이다.

 

소박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작은 시골 마을 풍경  

 

‘폭풍의 언덕’을 탄생시킨 노스요크 무어스 

노스요크 무어스

거리 98km. 소요기간 5일. 최저해발 0m.

최고해발 454m.

광활한 황야는 세 번째 국립공원까지 계속 이어진다. 노스요크 무어스는 아름다운 야생화인 헤더가 자생하는 무어랜드 가운데 영국에서 가장 넓은 지역이기도 하다. 잉글랜드 무어랜드는 헤더(heather) 또는 히스(heath)라고 불리는 야생화가 그 주인공이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 꽃밭이지만 가까이 다가서 보면 형형색색의 들꽃들로 이뤄진 덤불숲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메세타지역을 뒤덮는 누런 밀밭이 장관을 이루듯, 잉글랜드 북부의 무어랜드에서는 보라색헤더의 물결이 걷는 이들의 오감을 압도한다. 서른 살의 짧은 생을 살다간 작가 에밀리 브론테와 그녀 자매들의 삶의 터전도 이 지역이었고, 두 자매가 그려낸 두 편의 슬픈 이야기의 배경도 이곳 요크셔의 무어랜드였다. 명작 ‘폭풍의 언덕’과 ‘제인 에어’가 탄생할 수 있었던 토양인 것이다. ‘무어(moor)’라는 단어에는 누구든 시인이 되게 만드는, 시적인 무언가가 담겨있다. 무어랜드의 거센 바람에 맞서며 보라빛 헤더 꽃밭을 걷는 동안, 소설 ‘폭풍의 언덕’ 속 남녀 주인공이 함께 말 달리던 슬픈 환영과 마주칠 수도 있다. ‘The fool wanders, a wise man travels(바보는 방황하고 현자는 여행한다).’ 영국작가 토마스 풀러의 말이다. 여행하는 사람은 현명하다는 의미보다는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바보같이 방황만 하지 말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봐라, 그러면 뭔가 문제가 풀리고 새로운 길이 보일 것이다, 라는 의미일 것이다.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눈보라가 몰아치기 전에 멀든 가깝든 어딘가로 여행을 떠나보자.

 

노스요크 무어스에서 로빈후드 만으로 이어지는 길  

 

그로스몬트 역에서 만난, 석탄으로 움직이는 증기기관차


요크셔 데일스의 초원 위로 떠오르는 태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