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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라운 디자인 감각
기마인물형 토기

기마인물형토기, 신라 6세기

주인상 높이 23.4cm×길이 29.4cm×너비 10.5cm

 하인상 높이 26.8cm×길이 26.8cm×너비 9.9cm

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오늘날 생활용품은 디자인이 특이하고 예쁠수록 인기가 높은데, 그것은 옛 신라시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저 인기가 높은 수준을 뛰어넘어, 고귀한 신분을 가진 자의 무덤에 부장품으로 묻힐 정도로 신성시된 생활용품이 있었으니, 바로 기마인물형 토기이다.


알고 보니 주전자였을 수도… 

국사 교과서에서 사진으로 익히 보았던 문화재, 기마인물형 토기(騎馬人物形吐器)는 1924년 경주시 노동동에 있는 금령총(金鈴塚)에서 발굴되었다. 일제강점기 일본 고고학자에 의해 발굴된 금령총의 주인은 신라 왕족 중에서도 어린 왕자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발견된 허리띠의 길이가 무척 짧고 금관도 작기 때문이다. 기마인물형 토기는 얼핏 말을 탄 사람을 형상화한 조각품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물을 따르는 데 쓰던 주전자였다고도 한다. 말 등에는 깔때기처럼 생긴 구멍이 있어 그리로 액체를 넣을 수 있고, 말 가슴에는 대롱이 있어 액체를 따를 수 있는 구조다. 말 내부는 비어 있어 240cc 정도의 액체를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이는 오늘날 시중에 판매하는 작은 음료수 한 팩 정도의 용량이다. 또 한 가지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것은, 사실 기마인물형 토기는 총 2점이라는 사실. 하나는 주인을 표현한 상이고 또 하나는 그의 하인을 표현한 상이다. 자세히 보면 주인상이 더 화려하고 복잡한 장식을 하고 있으며 하인상은 크기가 약간 작고 손에 방울을 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금령총 발굴 당시 하인상은 주인상 바로 앞에 놓여있었는데 이를 두고 어떤 학자는 ‘하인이 주인을 하늘로 안내하는 모습 같다.’고도 하였다. 등잔으로 사용됐을 것이라는 주장한편, 최근에는 이 토기가 주전자라기보다는 등잔일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발표되기도 했다. 이 또한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다. 로마시대의 기마인물형 등잔,고대 근동의 등잔 등을 보아도 우리의 기마인물형 토기와 흡사한 모습이다. 말 등을 통해 기름을 주입하고, 앞서 주전자의 출수구로 여겨졌던 앞부분의 대롱에 심지를 넣어 불을 붙였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런 주장을 하는 학자는, 기마인물형 토기로 물을 따를 때 많은 양의 물을 빠르게 붓기 어려운 구조이며, 오히려 출수구 쪽으로 심지 같은 것을 넣을 때 편리한 구조라고 말한다. 아직 기마인물형 토기의 용도에 대해 명확하게 어느 한 쪽이 맞다고 정해지진 않았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토기의 다양한 용도에 대해 상상하고 추론하게 만든다는 점도 이 작품의 매우 흥미로운 요소라 할 수 있다.




“신라에서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 왕족과 연관이 있다고 믿어져 왔기에, 왕족이 세상을 떠날 때도 하늘로 가는 인도자 역할을 한다고 여겨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오늘날에도 사랑받는 뛰어난 디자인 

게다가 이 토기가 국보 91호로 지정될 만큼 중요한 이유는 당대 신라 사람들의 의장(意匠)과 생활상은 물론, 그들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는 데까지 매우 의미심장한 단서들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주인상을 살펴보자. 주인은 고깔 형상의 띠와 장식을 두른 삼각형의 관모를 쓰고, 다리 위에는 갑옷으로 보이는 것을 늘어뜨렸다. 허리에는 칼을 찬 늠름한 모습이다. 타고 있는 말의 갈기를 한껏 꼬아 올리고,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어서 첫눈에 보아도 높은 신분임을 알 수 있다. 이에 비해 하인상은 약간 작고 덜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말 탄 사람 외에도 말에게 입힌 말갖춤의 모습 또한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말을 다루는 장치인 고삐와 재갈은 물론, 말의 등에 착석하는 안장과 그 앞뒤를 장식하는 앞가리개 및 뒷가리개가 모두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말 앞쪽의 말방울과 말 뒷부분의 후걸이에 매달린 말띠꾸미개, 말의 몸통 중앙 하단에 있는 발걸이와 말다래까지, 말갖춤의 모든 요소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다. 이렇게 인물은 물론 말갖춤까지 섬세하게 잘 표현해, 다양한 각도에서 둘러보거나 자세히 들여다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다. 어쩌면 신라시대 당대에도 왕족이나 귀족층이 하나쯤은 갖고 싶어 하던 명품 주전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신라시대 사람들의 정신세계 알 수 있어 

그런데 신라 사람들은 왜 이 독특한 형상의 토기를 만들었을까? 그것은 ‘말’이 신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닌 동물이었는지를 이해함으로 알 수 있다. 말은 과거 빠른 육상교통 이동수단으로서, 전쟁은 물론 일생생활에서도 매우 중요한 교통수단이었다. 좋은 말 한 마리는 오늘날 럭셔리 세단 못지않은 사치품이었다고 한다. 또한 고대사회에서 말은 신분을 상징함과 동시에 죽은 이를 하늘로 인도하는 매개체로 인식되었다. 경주 천마총(天馬塚)에서 발견된 ‘백화수피제 천마문 말다래(통칭 천마도)’에는 갈기와 꼬리털을 힘차게 휘날는 말이 구름 위를 달리는 듯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또 <삼국사기>나 <심국유사>에 나오는 박혁거세 설화를 보면 양산 기슭에 말이 꿇어 앉아 울고 있어서 가서 보니 큰 알이 있어 이를 가르니 어린 아이가 나왔는데 그가 바로 박혁거세였다고 한다. 이처럼 말은 하늘에서 내려온 신성한 왕족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믿어져 왔기에, 왕족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올라갈 때도 말이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여겨 무덤에 부장품으로 넣은 것일 터이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서 전시되고 있는 이 작품을 더 많은 사람들이 직접 만나보고, 고대 신라인들의 독창적인 디자인 감각과 이 작품이 지닌 상징성을 음미할 수 있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