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을 캐던 이와미 광산의 입구
글_ 안계환 금융칼럼니스트, <세계사를 바꾼 돈> 저자
연은분리법을 먼저 개발한 조선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반면, 일본은 이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어 조선을 침략했을 뿐 아니라, 가난한 봉건국가에서 상공업이 발달한 국가로 변모할 수 있었다. ‘은 제련법’이 역사에 미친 막대한 영향력에 대해 알아보자.
오늘날의 기축통화와 같았던 은(銀)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픽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은 성적이 좋으면 그 결과에 따라 금·은·동 메달을 수여받는다. 그렇다면 금메달은 순금으로 만들었을까? 금메달을 정확히 표현하면 ‘금으로 도금된 은메달’이다. 무게 150g 중 금 함량은 6g에 불과하고 은이 주성분이다. 이렇게 금도금된 은메달을 주는 이유는 24K 순금 메달을 제작할 경우 그 가격이 3천만 원이 넘기 때문이다. 금은 매우 비싸기에 귀금속으로서의 용도밖에 갖지 않은 반면, 은은 비교적 저렴한데 매장된 금보다 은의 양이 절대적으로 많다. 또한 은은 적당한 가격을 형성했기 때문에 예로부터 화폐로 가장 많이 활용되었다. 은행은 영어로 ‘Bank’이지만 한자어 ‘은행(銀行)’은 은을 취급하는 상인조합이란 의미다. 따라서 과거에 은이란 오늘날의 돈과 동의어였다. 만약 우리 지역에 대규모 은광이 발견되고 이를 정련해 은의 유통이 많아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이때의 은이란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오늘날의 기축통화인 달러라고 보면 이해가 쉽다. 달러가 많아지면 국내 산업을 일으킬 수 있고, 외국에서 필요한 물건을 수입해올 수 있다. 때로는 첨단무기를 수입해 이웃나라를 침략할 수 있게 된다. 바로 그 은광의 발견과 은의 대량 확보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임진왜란과 관련이 있었다는 사실, 그 이야기를 해 보자.
이와미 광산의 은 제련소 유적
조선이 먼저 찾아낸 첨단 은 제련법
은은 다른 광물과 섞여 있어 광맥을 찾고 광석을 캐낸 후 분리하는 제련과정을 거쳐야 한다. 순도 높은 은을 만드는 제련법의 개발은 불의 온도를 높이는 등 상당한 수준의 기술력이 필요했다. 따라서 국가적으로 보호해야 할 특급기술이었다. 기록에도 등장하는 선진 제련법이 있었으니, ‘단천연은법’ 또는 ‘연은분리법’이란 이름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연산군 재위 9년(1503년), 함경도 단천에서 김감불과 김검동 두 기술자들이 광석에서 은을 제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과거에 은 제련은 광석을 부수어 가루로 만든 다음 높은 온도의 불에 태우고 남은 재에서 은을 걸러내는 방법을 썼다. 그러다 보니 순도가 높은 은을 생산하는 데 고충이 많았다. 두사람은 연구과정에서 은과 납의 녹는점과 끓는점의 차이와, 비중의 분리를 이용하면 된다는 것을 알았다. 납석과 은 광석을 잘게 부수고 섞어 결합한 후 점차 가열하면 납이 먼저 녹아 산화되어 분리되고 순수한 은만 남아 추출하게 되는 원리다. 이렇게 개발된 제련법으로 함경도 단천은 조선 최고의 은 광산이 될 가능성이 있었고, 확보된 은은 경제 활성화에 쓰일 여지도 충분했다. 하지만 농업을 중시했던 조선왕조는 안타깝게도 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중종은 사치 풍조 척결을 내세우며 은광 개발을 억제했다. 민간 경제에서도 면포로 물물교환을 할 정도로 화폐경제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인데, 농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 왕조의 한계이기도 했다.
첨단 은 제련법으로 한때 크게 번성했던 오모리 은광 마을
일본에서 활성화된 연은분리법
1533년 여름부터 일본 시네마 현 이와미 광산에서는 갑자기 은 생산량이 늘기 시작했다. 은광이 발견된 지 7년째였는데 그때까지 재래식 제련법으로 은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첨단 제련법인 ‘연은분리법’을 조선에서 온 기술자가 와서 가르쳤다는 것이다. 헛소문이었을 수도 있고 조선의 기술자가 가르쳐주었을 수도 있지만 은의 생산량이 급격히 늘어난 건 분명한 사실이다. 은은 국제 화폐로 통용되었기 때문에 막대한 국부가 생겼다. 이로써 일본의 대외교역은 엄청나게 증가했고 명나라와 네덜란드 등 외국과의 무역에서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연은분리법으로 은이 생산된 지 60여 년이 지난 1592년, 전국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침략할 준비를 마쳤다. 이와미 은광에서 나온 엄청난 군자금을 활용해 포르투갈로부터 조총과 대포를 구입할 수 있었고 막대한 군축물자를 비축해두었기 때문이다. 안타까운 것은 연은분리법을 개발한 조선은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만 실제 덕을 본 건 일본이었고, 은으로 얻은 막대한 이익은 조선침략의 발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은 제련법으로부터 시작된 일본의 행운은 대륙 동쪽에 고립된 가난한 섬나라를 역사의 중심 무대로 올려놓았다. 막대한 은 생산량 덕분에 명나라의 물품을 살 수 있었고 서양의 산업재를 들여올 수 있었다. 덕분에 산지가 대부분인 가난한 봉건국가 일본은 상공업이 발달한 국가로 변모했고, 19세기 말에 이르러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근대 일본의 발전을 은 때문만으로 한정 지을 수는 없겠지만 행운과 노력이 겹치면 세상이 바뀔 수 있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