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제공 : 국립중앙박물관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고려 후기 충목왕 때 조성된 석탑으로 기존의 신라계 석탑과는 달리 화려한 양식을 자랑하는 특이한 석탑이다. 이 탑에는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까지 된 기황후의 기세등등했던 권세를 알 수 있는 부분이 있다는데, 어떤 연유인지 자세히 살펴보자.
약탈에서 반환까지, 사연 많은 탑
1907년 일본 궁내대신 다나카 미츠아키(田中光顯)는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의 가례식에 참석하려고 왔다가 경천사지 석탑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개성으로 가서 이 탑을 보고 그 아름다움에 매료된 후, 그는 황태자가 이 탑을 자기에게 하사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무단으로 해체해 일본으로 가져가버렸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영국인 출신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은 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7일자 논설을 통해 다나카의 석탑 약탈을 폭로하였다. 그러자 일본 정부 대변지 ‘재팬 메일’이 해당 논설은 거짓이라며 석탑 약탈을 부인하였다. 당시 헤이그 특사를 준비하던 미국의 감리교회 선교사 호머 헐버트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해 개경 경천사에 가서 반출 현장을 촬영하고 해당 주민의 증언을 인터뷰하였다. 이후 ‘재팬 크로니클’이란 고베 신문에 이 석탑 약탈 사건에 대해 기고했고, 일본이 그래도 반환하지 않자 헤이그로 가서 이 사건을 폭로해 뉴욕포스트 등 세계 언론이 대서특필하는 등 사건은 일파만파로 커졌다. 조선은 물론 일본 내에서도 반발 여론이 들끓자 일본은 마지못해 10년 후인 1918년이 되어서야 석탑을 반환했다. 이 석탑은 그 뒤 오랫동안 경복궁 근정전회랑에 방치되었다가 1959년 재건에 착수하여 1960년 완공되어 경복궁에 전시되었다. 1980년대 경복궁 복원계획이 진행됨에 따라 1995년 해체되어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작업을 거친 뒤, 2005년부터는 신축 개관한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실내에 전시되고 있다.
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다.
섬세한 솜씨로 빚어낸 뛰어난 걸작
일본인들이 그렇게 탐냈던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도대체 어떤 매력을 갖고 있는 것일까?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우리나라의 다른 일반적인 석탑과는 달리 매우 독특한 모습으로 만들어졌다. 원나라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이는 외래 요소와 고려 전통적인 불
탑 양식이 혼재되어 있을 뿐 아니라 흔치 않은 재료인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석탑이지만 전체적인 모습은 목조 건축물처럼보인다. 그리고 석탑의 모든 면에 불회도(佛會圖), 부처, 보살 등이 빠짐없이 조각되어 있다. 조각의 예술성 또한 뛰어난데, 석탑이 무른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덕분에 섬세한 조각이 가능했다. 조각의 전체적인 구성을 살펴보면 아래서부터 기단부 1층에는 사자, 용, 연꽃이, 기단부 2층에는 당(唐)의 현장(玄奘) 법사가 구법을 위해 서역에 다녀오는 서유기(西遊記) 내용이 순서대로 그려져 있으며, 기단부 3층에는 서유기 장면과 나한상이 새겨져 있다. 서유기 조각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도상으로 원에서 희곡으로 공연되던 현장의 취경설화(取經說話)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탑신에 새겨진 불회도는 매우 섬세하고 아름다워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2회상(會相)을 새겨 인물이 살아 있는 듯하고 형용이 또렷또렷하여 천하에 둘도 없이 정묘하다.”라고 기록하였고, 채수는 “더할 수 없이 정교(精巧)하여 인력으로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원나라 기황후와의 깊은 인연
특히 탑 1층부에는 원나라 황제, 기황후, 황태자 아유시리다라의 만수무강과 원나라의 만세불변을 기원하는 글이 있는데, 당시 고려 사람으로서 원나라에 공녀로 끌려가 황후까지 된 기황후와 그녀를 둘러싼 권력가들의 권세를 잘 보여주는 예라서 흥미롭다. 당시 중국은 원의 순제(順帝)가 집정하던 시기였는데, 순제의 부인이 바로 고려인 기 씨였다. 순제의 후계자로서 그녀의 아들 아유시리다라가 황태자로 책봉되자, 기 씨는 기황후의 칭호를 받고 있었다. 중국의 정세가 이렇게 돌아가자 고려에서는 기 씨 일족과 이에 부응하는 친원세력의 권세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원의 탈탈 승상이 경천사를 원찰(願刹)로 삼고 진령군(晉寧君) 강융이 원에서 공장(工匠)을 뽑아다가 이 탑을 만들었다는 말이 세간에 전해진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경천사에 탈탈 승상과 강융의 초상화가 남아 있었다고 한다. 탈탈은 석탑을 건립하고자 원의 기술자를 고려에 보냈으며, 탈탈의 인척인 강융이 실무를 주도했다. 그런데 탈탈은 기황후의 아들인 태자 아유시리다라를 자신의 집에서 기를 정도로 사적으로 기황후와 친밀하였으며 사재를 바쳐 태자의 축원을 비는 사찰을 세우기도 했다. 또한 그는 원나라뿐만 아니라 멀리 고려에 있는 경천사에도 석탑을 건립하였다. 개경에 들어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경천사에 원의 번영과 원나라 황제, 기황후, 황태자 등의 천수만세를 기원하는 석탑이 세워진 것은 이러한 배경에서였다.
석탑 탑신에 새겨진 불회도(佛會圖)
기단부 3층까지는 티베트·몽골의 영향이 뚜렷하다.
조선시대까지 계승된 아름다움
경천사지 십층석탑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특수형의 석탑으로 분류되고 있는데, 아(亞)자형의 사면 돌출형의 평면과 다포식 조영 등이 그 이유가 되고 있으며, 조선의 원각사지 십층석탑으로 그대로 계승되었다. 세조(世祖)는 불교를 옹호하여 원각사(圓覺寺) 창건을 통하여 조선 건국 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 불교를 다시 일으키고자 하였다. 세조는 원각사 창건에 큰 의미를 부여한 만큼 원각사에 최고의 석탑을 만들고자 했다. 이에 가장 아름다운 석탑 모델로 경천사지 십층석탑을 선택하여 탑의 재료부터 구조, 조각까지 유사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우리나라에 유사한 형태를 가진 두 기의 석탑이 전해 내려오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