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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폐의
과다 발행은
나라 망치는 지름길

화폐 발행을 남발해 북송을 위기에 빠트렸던 황제 휘종

글_ 안계환 금융칼럼니스트, <세계사를 바꾼 돈> 저자 


과거 중국은 유럽보다 500년 앞서 지폐를 발행하고 유통시켰던 금융 선진국이었다. 하지만 북송의 사례를 통해 지폐를 지나치게 많이 찍어내면 나라가 망할 수도 있다는 교훈을 남겨주기도 했다.


동전 부족에 늘 시달렸던 북송·남송 시대 

예로부터 동아시아에서 주로 쓰인 동전은 가운데에 사각형 구멍이 있는 둥근 모양이었다. 역사상 가장 부유한 제국의 하나였던 북송에서 주조한 동전은 매우 진귀한 유물이었다. 정교한 금속가공기술을 갖췄고 황제의 친필이 새겨지기도 했다. 하지만 북송은 항상 동전 부족에 시달렸다. 1년에 100관이 넘는 동전을 주조했고 가장 많이 찍어냈던 신종 때에는 500관을 넘었을 정도로 많았는데 동전이 왜 부족했을까? 금속화폐의 통용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건은 액면가치와 실제가치의 부합 여부다. 액면가치보다 실제가치가 높으면 돈이 아니라 금속 자체로 여겨져 사람들은 금속을 녹였다. 반대로 실제가치가 액면가치보다 낮으면 그 화폐의 신용도는 추락한다. 북송과 남송에서는 경제 발전으로 인해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동전 주조를 위한 구리의 가치도 물가와 연동해 높아졌다. 사람들은 동전을 녹여 구리주전자, 구리화로 등을 만들어 시장에 내팔았다. 물자는 풍부했지만 일상적인 거래에 사용하는 동전의 부족 현상은 북송과 남송시대 내내 이어졌다


중국 최초의 지폐, 비전(飛錢) 


송 태종 때 발행된 본격적인 지폐, 교자(交子) 


유럽보다 500년 앞선 중국의 지폐 발행 

이럴 때 탄생한 것이 바로 지폐다. 지폐의 기원은 당 헌종 시절에 탄생한 ‘비전(飛錢)’이었는데 돈이 다른 지역으로 날아갔다고 해서 이름 붙여졌다. 상인이 관청에 동전을 제출하면 그만큼 액수가 적힌 증명서를 발급받을 수 있다. 그리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현지 관청에 제출하면 액면에 적힌 동전을 받을 수 있었다. 비전이 탄생함으로써 상인들은 무거운 동전을 지닐 필요가 없어 편리해졌고 동전거래가 줄어들게 됨으로써 동전 부족 현상도 일부 해소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전은 화폐가 아니고 한번 사용하면 폐기되었기 때문에 지폐라 보기 어렵다. 본격적인 지폐 발행은 송 태종 때 사천성에서 시작되었다. 성도의 대상인 16호가 협의해 교자포라는 조합을 결성하고 ‘교자(交子)’라는 어음을 발행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돈을 유망 사업에 투자해 이익을 얻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이 교자의 신용에 문제가 생겨 혼란이 생기자 정부는 직접 발행에 나섰고 사천성 전체에서 통용되는 유통 화폐가 되었다. 1161년에 이르러 정부 차원의 교자포를 설치하고 본격적인 발행을 시작했다. 이렇게 교자 발행을 북송 전체로 확장함으로써 본격적인 국가주도의 지폐 발행 시스템이 시작됐던 것이다. 유럽에서 지폐 발행이 시작된 것이 이때로부터 500년 뒤인 1661년이었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빨리 시작되었는지 알 수 있다.

 

돈을 찍어내고 싶은 유혹은 나라의 몰락을 자초한다 

지폐의 가장 큰 이점은 금속의 채굴량에 구애받지 않고 손쉽게 발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돈의 공급에 대해 완벽에 가깝도록 통제력을 지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 지폐는 무한정 찍어낼 수 있다는 특성으로 인해 인간의 욕망을 자극할 가능성이 크다. 만약 지폐 발행을 조심스레 시행할 경우 경제성장에 도움이 되지만 잘못하면 금융시스템을 마비시킬 우려가 있었다. 이런 특성을 알고 도입한 것이 태환 준비율 제도다. 일정액의 금속화폐를 예치해 두고 그만큼의 지폐를 발행하는 것인데, 북송 초기에는 화폐 발행액의 28%였다. 지폐의 특성을 꽤 잘 알고 준비한 셈이다. 지폐가 등장하자 동전 부족으로 발생했던 디플레이션 문제가 일거에 해소될 수 있었다. 초기에는 신중을 기해 발행했다. 태환 준비율을 엄격하게 지켰고 시장의 신용을 잃지 않도록 했다. 덕분에 인종부터 신종 때까지 50여 년 동안은 지폐 가치가 안정되어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런데 사치스런 궁정 생활이 이어지고 외국과의 전쟁 등 여러 이유로 돈이 부족하면 마구 찍어내고 싶은 욕망이 생겨난다. 북송 말기에 이르러 북방의 요와 금의 위협은 증대되고 있던 반면 휘종의 사치는 극에 달했다. 고상한 예술을 즐기던 휘종은 각지의 기석과 괴수를 모으기 위해 수만금을 썼다. 남부지역에서 방랍이 반란을 일으키자 조정은 군사 파견 대신 돈으로 회유했다. 1백만 명이 넘었다는 병력을 유지하기 위한 국방비도 엄청났다. 결국 휘종의 선택은 지폐의 발행이었는데 문제 해결의 가장 손쉬운 선택이었던 것. 하지만 지폐 발행의 남발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고 동전이 시중에서 사라지게 만들었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두고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라고 설명하는데 그 대표적 사례였다. 태환 준비율 개념은 사라졌고 지폐의 신용도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결국 북송 정권은 금나라의 철기군이 수도에 닥치기도 전에 지폐의 남발로 인해 이미 몰락한 상태가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