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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벌레로 그려낸
아름다운 소우주
신사임당 ‘초충도’

참고도서 : <예술을 사랑한 신사임당>, 레몬북스


눈 여겨 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쉬운 작은 동식물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초충도. 단순한 구도와 구성,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묘사 등은 한국 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현모양처의 틀을 넘어, 이미 당대 최고의 화가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았던 신사임당의 예술세계를 들여다보자.


살아 있는 듯 생동감 넘치는 그림 세계 

5만 원 지폐에 등장하는 위인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신사임당(申師任堂, 1504-1551). 대학자 율곡 이이(李珥)의 어머니이자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여류화가이기도 하다. 경전에 밝아 학문이 깊고, 시, 글씨, 그림에 모두 뛰어났으며 자수도 잘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녀가 화폭에 즐겨 담은 것은 이른바 ‘초충(草蟲, 풀과 벌레)’으로, 잠자리, 벌, 나비, 개구리, 도마뱀, 매미, 쇠똥구리, 쥐, 메뚜기 등의 동물을 비롯해 포도, 수박, 대나무, 매화 등 다양한 식물을 즐겨 그렸다. 너무나도 생동감 넘치게 그린 나머지, 마당에 내놓아 그림을 여름 볕에 말리려 하자 닭이 와서 살아 있는 풀벌레인 줄 알고 쪼아 먹으려 했다는 일화도 유명하다. 오늘날 남겨진 신사임당의 ‘초충도’는 여덟 폭의 그림과 두 폭의 발문으로 구성된 병풍으로 되어 있다. 원래는 화첩의 일부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현재는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의 발문 한 폭과 민태식이 옮겨 쓴 이은상(李殷相)의 발문 한 폭이 덧붙여져 총 열 폭의 작은 병풍으로 꾸며진 것이다. 각 폭에 그려진 내용을 살펴보면, ① 오이와 메뚜기 ② 물봉선화와 쇠똥구리 ③ 수박과 들쥐 ④ 가지와 범의 땅개 ⑤ 맨드라미와 개구리 ⑥ 가선화와 풀거미 ⑦ 봉선화와 잠자리 ⑧ 원추리와 벌 등이다. 수박, 생쥐, 나비 등의 표현에서 섬세한 필선, 선명한 색채, 안정된 구도 등을 보여준다.

 


신사임당, ‘초충도’ 중 ‘물봉선화와 쇠똥구리’

종이에 채색, 33.2×28.5cm, 국립중앙박물관



신사임당, ‘초충도’ 중 ‘가지와 범의 땅개’

종이에 채색, 33.2×28.5cm, 국립중앙박물관


신사임당, 초충도, 전체 10폭 병풍. 20여 가지의 풀과 벌레를 소재로 그렸다.


조기 영재교육을 받은 신사임당 

신사임당이 젊은 시절부터 예술과 학문을 깊이 닦을 수 있었던 것은 그녀에게 깊은 영향을 준 어머니와 외할아버지 이사온(李思溫) 덕분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의 어머니는 무남독녀로 부모의 깊은 사랑을 받으며 학문을 배웠고, 혼인한 후에도 부모와 함께 친정에서 살았기 때문에 일반 여성들이 겪는 시가살이의 정신적 고통이나 육체적 분주함이 없었다고 한다. 따라서 비교적 자유롭게, 그리고 소신껏 일상생활과 자녀교육을 병행할 수 있었다. 외할아버지로부터 학문을 배운 어머니로부터 다시 그 학문과 예술적 소양을 이어받은 사임당은, 여성의 예술 활동에 제약이 많았던 조선시대에도 불구하고 천부적 재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의 남편 또한 아내의 재능을 인정해주고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도량이 넓은 남자였다.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와 환경이 어우러져 신사임당의 예술혼이 활짝 꽃피울 수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이 처음 산수화를 그리게 된 것은 일곱 살 때부터의 일이다. 오늘날로 치면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산수화를 그렸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로도 굉장한 일이었다. 산수화를 그리려면 그림뿐만 아니라 동양문화권의 시문(詩文)도 잘 알아야 하고 옛날부터 전해져 오는 산수화의 화풍을 두루 알고 있어야 한다. 신사임당은 아마도 어릴 때부터 그러한 것들을 익숙하게 배우고 듣고 보며 자랐을 것이다. 그녀는 세종 때의 화가 안견(安堅)의 산수화를 놓고 그것을 교과서 삼아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절정을 이룬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오늘날까지도 명화로 손꼽힌다. 일곱 살 난 여자 아이가 그런 안견의 그림을 놓고 그림 공부를 했다는 것은 부모들이 얼마나 자녀교육에 관심과 애정을 기울였는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신사임당, ‘초충도’ 중 ‘맨드라미와 개구리’, 종이에 채색, 33.2×28.5cm,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적 예술의 백미를 보여준 ‘초충도’

다양한 그림을 다 잘 그린 신사임당이지만, 뭐니 뭐니 해도 그녀의 대표작은 ‘초충도’이다. 부드러우면서도 깊이가 느껴지는 색감, 절묘한 필선의 벌, 나비, 잠자리, 수박, 가지 등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빠져드는 묘한 매력이 풍겨난다. 산수화는 안견의 화풍을 따라 그렸다는 평이 많지만 초충도는 사임당의 독보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다. 그녀는 자칫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나치기 쉬운 작은 생물들을 따스하게 보듬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 들쥐는 혐오스럽다기보다 오히려 따뜻하고 귀엽게 그려냈다.

비교적 단순한 구도와 구성, 여성 특유의 섬세한 묘사 등은 한국 회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고 평가받는다. 율곡 이이의 스승도 그녀의 그림을 보고 안견에 견줄 만큼 훌륭한 화가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먼 훗날 숙종 임금도 신사임당의 그림에 발문을 지었다고 하니,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화가라는 명성은 이미 오래 전부터 확고했던 것 같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진취적인 ‘현모양처’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탁월한 예술가로서 그녀의 면모가 크게 조명받지 못하고 있는 점이 아쉽다.

 

가족의 행복을 염원한 그림 

그런데 신사임당은 왜 하필 이런 풀·벌레 그림을 그렸을까? 조선시대 여성들은 바깥출입이 어려워 집에만 틀어박혀 지냈기 때문에 주위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풀·벌레를 그렸으리라 지레짐작할 수 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 그림에는 매우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바로 신사임당이 한 가정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자식들이 잘 자라고 남편이 높은 벼슬자리에 오르기를 바랐던 어머니의 소원이 바로 이 ‘풀·벌레’ 그림에 담겨 있다. 초충도에 나오는 풀·벌레는 모두 나름대로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수박 그림부터 살펴보자. 그림 속 패랭이꽃은 장수와 젊음을 뜻한다. 가족의 무병장수를 바란 것이다. 나비는 알, 애벌레, 번데기를 거치는 변태를 한다. 자식이 자신의 한계를 깨트리고 새롭게 거듭나서 훌륭한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한 쌍의 나비는 금실 좋은 부부를 나타낸다. 쥐도 의미가 있다. 쥐는 왕성한 번식력으로 옛날부터 유명했다. 자식을 많이 낳으란 의미다. 또한 쥐처럼 부지런히 일해서 많은 재물을 모으라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이처럼 신사임당이 그린 초충도는 아무렇게나 자신이 좋아하는 소재

를 골라서 그린 것이 아니다. 그림 한 장 한 장마다 모두 가족의 행복을 염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