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나카타 오시마 코스의 언덕길에서 만난 풍차
글·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규슈는 열도의 변방이지만 일본 근대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한반도와는 거리상 가장 가까워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전진기지가 됐으므로 우리와는 역사적 악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랬던 규슈가 지금은 정서적으로 우리와 아주 가까워졌다. 제주올레가 2012년 일본에 수출되어 규슈올레가 생기면서 ‘길’을 통하여 더욱 친숙해진 것이다.
현해탄과 나란히 걷는 오시마 코스
규슈는 후쿠오카, 사가, 나가사키, 구마모토, 가고시마, 미야자키, 오이타라는 7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현마다 적게는 1개, 많게는 6개씩 총 18개의 올레 코스가 섬 전체에 분포되어 있다. 후쿠오카는 규슈의 관문이기에 관광도 좋지만 잠깐 짬을 내어 규슈올레 한두 코스라도 트레킹해 볼 경우 접근성이 좋다. 다른 여섯 개 현에는 올레 코스가 각각 1~3개씩인데 반해 후쿠오카 현에는 무려 여섯 개나 분포해 있다. 그중 한 코스를 추천한다면 규슈의 교통 중심 하카타 역에서 가장 가까운 무나카타(宗像) 오시마(大島) 코스가 좋다. 배를 타고 가야 하는 섬 중의 섬 코스, 후쿠오카현 무나카타 시에 속해 있는 조그만 섬 오시마를 걷는 코스다. 섬에 도착해 훼리선을 내리면 터미널 왼쪽으로 바로 올레길이 시작된다. 접근성도 아주 좋다. 태양신의 세 딸인 3대 여신을 모시는 나카미쓰야 신사를 만난 후 해발 224m의 미다케 산 정상까지는 땀을 한 줌 쏟아야 하는 오르막 숲길이다. 이후는 완만한 능선길, 풍차전망대로 향하는 내내 바람에 휘날리는 억새풀이 주변 하늘과 바다를 배경으로 멋진 장관을 선사한다. 한반도 남해와 일본 규슈를 잇는 대한해협 200km, 현해탄도 장쾌하게 펼쳐진다.

‘중앙대다원’이라는 이름의 야메 녹차 밭
광활한 녹차 밭과 아담한 신사, 야메 코스
야메는 후쿠오카 시에서 남동쪽, 자동차로 1시간 걸리는 소도시다. 녹차로 유명한 이 지역의 야메(八女) 코스는 광활한 녹차 밭과 함께 고대의 고분들을 두루 만날 수 있는 시골길이다. 하카타역에서 JR열차를 타고 45분 뒤 하이누즈카 역에 내려 시골 버스로 갈아타고 25분 뒤 카미야마우치 마을에 내리면 그곳이 바로 트레킹 출발점이다. 아담한 신사가 있는 야마노이 공원을 지난 후 마을 뒷산으로 오른다. 도난잔 고분에 이르면 야메 시 카미야마구치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누오 성터부터 ‘중앙대다원’이라는 이름의 야메 녹차 밭이 나타나는데, 옵션 구간으로 왕복 700m 거리인 대다원 전망대까지는 필히 다녀올 가치가 있다. 광활한 녹차 밭을 다 지나면 시골 농가가 이어지다가 아담한 절 이치넨지를 만나고, 전원주택들 사이 훈훈한 시골길이 이어지다가 마루야마쓰카 고분에 이르면 야메 시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후쿠오카 여행 중 한나절 일정으로 가볍게 다녀오기에 접근성이 좋다.

나고야 성 박물관의 거북선 모형 / 하도미사키 해수욕장의 돌하르방
역사의 현장을 되돌아보는 가라쓰 코스
후쿠오카현과 인접한 사가현에는 가라쓰, 우레시노, 다케오, 3개 코스가 있는데, 규슈올레를 이야기할 때 세 코스 중 어느 한 곳도 빠지는 경우가 없다. 가라쓰는 임진왜란 때 왜군과 물자를 실어 나른 전초기지였다. 나고야성터 등 당시의 유적들이 가라쓰(唐津) 코스에 많이 남아 있다. 임진왜란 관련 자료들을 모아놓은 나고야 성 박물관에선 이순신 장군 화상과 모형 거북선이 도요토미히데요시의 유물들과 대등한 위치에 배치되어 있어 은근한 감동을 준다. ‘일본은 조선에 불평등 조약을 강요해 1910년에는 조선반도를 식민지로 삼았다’로 시작되는 전시 안내문에도 역시 한국인 도보여행자들을 위한 규슈올레의 배려가 엿보인다. 하도미사키 해수욕장 백사장 끝에는 우리 제주도의 돌하르방 두 개가 반갑게 서서 맞아준다. 가라쓰 코스의 종점임을 알리는 상징물이다. 종점의 포장마차 촌에서 사먹는 소라구이의 맛이 쫀득쫀득하니 일품이다.

우레시노 코스의 메타세쿼이아 숲길 / 13개 보살상이 눈길을 끄는 우레시노의 산길
메타세쿼이아 숲과 온천물의 촉감, 우레시노 코스
전국 차 품평회에서 5년 연속 최우수상을 받을 정도로 녹차밭이 유명한 사가현 우레시노 마을은 차를 담는 도자기로도 유명하다. 그에 걸맞게 이 마을의 히젠요시다 도자기 회관이 우레시노(嬉野) 코스의 출발점이다. 코스 초입에 다이죠사와 요시우라 신사를 지나면 마을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산길로 들어가 급경사의 오르막을 오르고 나면 13개의 보살상이 모셔져 있는 곳을 지나간다. 깎아지른 바위 밑으로 샘물이 흐르는 가파른 골짜기에선 묘한 영적 기운도 감돈다. 100년 후를 기약하며 조성되었다는 메타세쿼이아 숲에는 ‘22세기 아시아의 숲’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녹차 밭과 삼나무 숲으로 이어지는 하이라이트 구간이다. 쿠마노 신사에서 맛있는 샘물 한 모금 마시고 내려오면 3단 폭포인 두 줄기의 도도로키 폭포를 지나 한동안 고즈넉한 하천길을 누빈다. 코스 종점인 시볼트 족욕탕에서 무료로 담그는 온천물의 따뜻한 촉감이 오래 기억되는 코스다.

다케오 코스의 올레길 표지판 / 다케오 코스의 고즈넉한 대나무 숲길
3천 년을 버틴 녹나무의 신비, 다케오 코스
사가현 다케오 시는 하카타역에서 기차로 1시간 걸리는 인구 5만의 작은 전원도시다. 이곳의 다케오(武雄) 코스는 2012년 규슈올레란 이름을 달고 세상에 처음 나온 코스로 유명하다. 현 18개 올레 코스들 중 개장 순서로 1번인 것이다. 시작점 다케오 온천역을 나서면 전원주택들과 시라이와공원을 가로질러 대나무 숲길을 걷게 된다. 일본식 전통 사찰 기묘사에는 조그만 연못이 있고 바로 밑에는 납골탑들이 즐비해 있다. 여섯 동자승 석상들 표정도 앙증맞다. 다시 전원주택 거리를 지나 이케노우치 호숫가에 이르면 A, B 두 개의 산길 옵션 코스가 기다린다. A코스를 올라 정상 지점에서 다케오 시 전체를 조망한 후 내려온다. 다케오 신사는 거대한 녹나무로 유명하다. 3,000년 동안이나 나무의 생명이 유지되어 왔다는 게 신비롭다. 로마 가도를 연상시키는 나가사키 가도를 지나 다케오 온천 로몬(樓門)에서 걸음을 멈춘다. 일본적인 요소들을 가장 많이 담아낸 올레 코스에서의 다섯 시간 피로를 따뜻한 온천욕 한 시간으로 말끔히 씻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