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갓집이 부산 해운대에 있어 어렸을 때 여름방학마다 해운대 바다에서 수영했던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는 한비야 교수. <부산은행 이야기>와 인연이 닿아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게 된 것도 너무 기쁘다고 말하며, 지나온 삶에 대한 회상, 그리고 ‘균형 잡힌 삶’에 대한 요즘의 생각 등을 들려주었다.
삶의 방향을 바꾼 오지 여행
요즘 ‘빠니보틀’, ‘곽튜브’ 등 여행 전문 유튜버들이 세계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우리가 잘 모르는 외국의 생활과 문화를 흥미롭게 알려주고 있다. 이들은 TV 방송 프로그램에도 자주 출연하며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린다. 그런데 유튜브도 없고, 지금처럼 여성 혼자 해외여행을 나가기 쉽지 않았던 30여 년 전에 세계의 각지를 육로로 여행한 후, 그 경험을 책으로 발간해 지금의 유튜버 못지않은 화제와 인기를 끌었던 인물이 있다. 바로 현재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특임고문을 맡고 있는 한비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다. 그의 책 <바람의 딸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덕분에 ‘여대생들이 존경하는 여성 1위’로 선정되기도 하는 등 큰 인기를 누렸다. “오지와 분쟁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고작 1~2천 원이 없어서 사람이 죽게 되는 현장을 많이 봤어요. 그래서 저는 이런 실태를 다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서 도움을 요청해 사람 목숨 구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결심을 이미 여행 중에 했지요. 여행을 다녀온 후 그런 내용으로 여러 군데서 인터뷰를 했더니, 그걸 보고 월드비전에서 연락이 와서 긴급구호팀장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좋은 습관은 하루아침에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을 몇 번만 넘어서면 평생 그 루틴을 계속 가져갈 수 있어요.”
은퇴 유예기간 3년, 다시 현장 속으로
한비야 교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경험했던 첫 구호활동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탈레반을 피해 산속으로 피난을 간 마을 사람들에게 식량 지원을 하러갔는데, 수백 명의 마을 아이들이 꼬챙이처럼 말라서 굶어 죽어가는 참상을 목격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긴급 영양 급식으로 죽을 먹여서 한 아이라도 더 살려내려는 활동에 즉각 돌입했다.
“그때 생후 6개월 된 아기가 있었는데 영양실조에 걸려 죽기 일보 직전이었어요. 다른 아이들은 저희가 준 죽을 먹고 어느정도 기운을 차렸는데 그 아이만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떠나는 날 마지막으로 간절히 기도를 하고 손을 그 애 입에 갖다 댔을 때였어요. 갑자기 그 아이가 조그만 앞니 두 개로 내 손가락을 힘주어 무는 거예요. 마치 ‘난 괜찮아요. 아직 살아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처럼.그런 아이들 때문에 제가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죠.” 그는 지난 2022년 남수단에서의 구호활동을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은퇴했다’고 언론에는 공식적으로 발표했다. 하지만 사실은 아직 끝이 아니라고 한다. 앞으로 월드비전 세계시민학교 특임고문을 3년간 맡으면서 교육청을 비롯해 여러 기관에 강의를 나가야 하는데 현장 상황을 모른 채 강의를 할 순 없다는 것.
“향후 아프리카, 아시아, 중남미, 이 세 군데를 다니면서 긴급구호가 필요한 지역의 상황을 파악한 후 그것을 강의 주제로 삼을 계획이에요. 그러니 은퇴가 3년간 더 유예가 된 셈이지요.”
새로운 결혼생활의 모델을 만들어나가다
구호활동을 떠나서 ‘자연인’ 한비야 교수의 생활은 현재 어떠한 모습일지도 궁금했다. 더구나 지난 2017년 59세의 나이로 네덜란드 출신 긴급구호 전문가 안토니우스 반 쥬드판 씨(이하 안톤)와 결혼을 한 후 삶의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있을 것이라 추측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사람 살리는 일이 좋아서 세월 가는 줄 모르고 늘 현장에 있었는데, 어느덧 돌아보니 결혼해서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는 시기가 이미 지나버린 거예요. 그래서 결혼을 안 하겠다고까지 생각하진 않았지만 굳이 서두를 필요도 없다는 입장이었지요. 그러던 차에 같은 일을 하며 오래 전부터 잘 알던 사이였던 남편과 더 가까워지며, ‘아,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좀 더 인간적으로 함께 성장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결혼을 결심했죠.”
그의 남편 안톤은 한비야 교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고 ‘삶의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라고 한다.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고 지켜주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이 부부는 1년에 3개월은 네덜란드에서, 3개월은 한국에서 같이 생활하고 나머지 6개월은 따로 살며 각자 자신이 해야 할 일에 몰두한다.
“제가 한국에서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보통 부부들처럼 1년 내내 같이 살 순 없잖아요. 처음부터 우리는 이런 조건하에서 어떻게 하면 최대한 풍요롭고 균형 잡힌 결혼 생활을 할 수 있을지 깊이 논의한 끝에 적절한 해답을 이끌어낸 것이죠.”
좋은 습관은 균형 잡힌 삶의 필수조건
이렇게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면서 물리적인 거리 차이를 극복하며 새로운 결혼생활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는 두 사람.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앞서 말한 데서도 언급한 ‘균형 잡힌 삶’이다.
“원래 제 삶의 모토는 ‘즐겁고 자유롭게 살자’였는데 거기에 이젠 ‘균형 잡힌 삶’이 더 추가되었어요. 옛날에 현장에서 일할 땐 잠도 안 자고, 계속 스트레스 받으면서 몸이 이 일을 감당 못할 때까지 해야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죠. 등산을 좋아해서 산에 갈 때도 (백두대간 종주처럼)지치도록 했잖아요. 하지만 이젠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고 무릎도 자주 아파요. 그래서 이제 내 나이에 맞게,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한비야 교수에겐 요즘 매일 꼭 지키는 루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하루에 1시간가량 요가를 하는 것, 또 다른 하나는 매일 일기를 쓰는 것이다. 이 같은 좋은 습관 덕분에 그는 일과 휴식, 그리고 결혼생활과 개인의 삶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며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한 가지 조언 드리자면, 좋은 습관은 하루아침에 내 것이 되는 게 아니랍니다. 요가나 일기도 내 몸에 스며들어 자연스럽게 하게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외국어를 익히는 것과도 비슷해요. 많은 사람들이 어느 단계까지 갔다가 그걸 뛰어넘지 못해 외국어 공부나, 좋은 습관을 몸에 익히는 걸 포기하곤 하죠.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을 몇 번만 넘어서면 평생 그 루틴을 계속 가져갈 수 있어요.”
하루 한 명씩 다른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것이 남은 인생의 행동강령이라는 한비야 교수. 그는 앞으로도 ‘나 혼자만의 행복’이 아닌, ‘전 세계인과 함께 행복한 세계시민’으로 살아가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는 다짐을 들려주며 인터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