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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이불루’
백제 미의식의 절정
무늬벽돌(文樣塼)

산수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진제공_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공주박물관  


백제의 무늬벽돌은 간결하고 균형 잡힌 구도에서 오는 편안함과 특유의 완만하고 부드러운 조형미가 돋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식 벽돌로 평가받는 ‘산수문전(山水文塼)’을 비롯해 ‘연화문전(蓮花文塼)’, ‘귀형문전(鬼形文塼)’ 등을 통해 백제인들의 뛰어난 미적 감각과 그 안에 담긴 소망을 들여다 보자.   


백제 회화예술의 정수, 무늬벽돌 

193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 있는 한 절터에서 무늬가 새겨진 벽돌 8매가 출토됐다. 각각 산수문전, 산수봉황문전, 산수귀문전, 연대귀문전, 반용문전, 봉황문전, 와운문전, 연화문전으로 명명된 이 벽돌들은 모두 정사각형에 가까우며, 한 변이 29㎝ 내외, 두께는 4㎝로, 네 모서리에는 홈이 파여 있다. 이를 통해 벽돌을 레고 블록 조각처럼 연결하여 건물의 바닥이나 벽면에 부착할 수 있도록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무늬벽돌은 고구려 고분 벽화 외에 삼국시대의 그림 유물이 극히 드문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발견이었다. 특히 동적이고 날카로운 표현이 특징인 고구려 회화에 비해 박진감은 좀 떨어질지라도, 안정감과 유연한 필치가 느껴진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그 말 그대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인들의 뛰어난 미의식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들이다. 


이상세계에 대한 믿음을 표현하다 

먼저 가장 유명한 산수문전(山水文塼)부터 자세히 살펴보자. 아래쪽으로는 우뚝 솟은 완만한 바위들이 줄지어 서 있고, 하늘 위로는 뭉게구름이 바람을 타고 흘러간다. 화면의 중심을 이루는 봉우리들은 아기자기하게 묘사된 나무를 이고 서 있다. 아마도 당시 사람들이 그리던 이상향, 봉래산일 것이다. 

한 가운데는 암자 같은 집 한 채가 있고, 우측 바위 앞으로 스님인 듯한 인물 한 명이 산길을 따라 올라가고 있다. 과연 저 인물은 수도를 하러 신성한 곳으로 찾아가는 구도자일까? 아니면 속세에 염증을 느끼고 자연인이 되기 위해 산속으로 들어가려 하는 것일까? 어느 쪽이든 자신만의 이상향을 찾아 길을 떠나는 고독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처럼 멀리서 보면 잘 보이지 않았던 디테일들이 가까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하나씩 뚜렷이 드러나는 것이 산수문전을 비롯한 백제 무늬벽돌의 매력이다. 

산수문전에 표현된 문양은 1993년에 발견된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 형태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부드러운 곡선의 산봉우리가 중첩된 모습, 그리고 부수적으로 들어가 있는 인물 등이 두 작품의 공통된 특징이다. 또 다른 무늬벽돌인 ‘산수봉황문전’에 묘사된 봉황도 백제금동대향로 꼭대기에 우뚝 서 있는 봉황과 흡사하다. 때문에 어떤 학자들은 무늬벽돌 세트를 만든 장인과 금동대향로를 제작한 이가 혹시 동일인물이 아닌가 하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게다가 산수문전에서는 좌우대칭의 안정적인 구도와 원근법까지 적용되어 있는데, 이러한 표현은 고대 산수인물화의 발상지인 중국 육조시대 회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백제인의 뛰어난 디자인 감각을 잘 보여준다. 조원교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산수문전에는 상상 속의 해중신산(삼신산)을 이상세계로 여기는 믿음이 녹아있다”면서 “이러한 삼신산 그림의 원류는 백제금동 대향로와 무령왕릉 출토 은제 탁잔은 물론 조선시대 도자기에까지 구현되어 있다”고 말한다.

 


산수귀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산봉우리를 살짝 공그르면서 윤곽선을 슬쩍 집어넣은 기교와, 구름과 소나무를 문양으로 처리하면서도 생동감을 부여한 것은 거의 백제인의 마술에 가깝다. 사실상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의 미학을 단 하나의 유물로 표현해보라고 할 때 여기에 표를 던지는 분이 많다.”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3권> 중에서 



산수봉황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실용성에 장식성까지 겸비한 걸작 

외리에서 출토된 무늬벽돌 세트 중에는 오늘날 캐릭터 상품 디자인에 활용해도 좋을 만한 도깨비 무늬 벽돌 2매도 있다. 하나는 ‘산수도깨비무늬벽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연꽃도깨비무늬벽돌’이다. 머리와 상체가 하체보다 더 크고 몸체가 통통한 것은 오늘날 사랑받는 캐릭터나 마스코트에도 자주 적용되는 형태이다. 

그래서인지 크게 벌린 입, 튀어나온 이빨, 치켜 뜬 눈꼬리와 커다란 눈에도 불구하고 이 도깨비들은 귀엽게만 보인다. 원래 이런 도깨비는 악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려넣는 것이지만 백제의 장인들은 벽사(귀신 퇴치, 辟邪)의 실용성뿐만 아니라 장식성과 해학미까지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연화문전(蓮花文塼, 연꽃무늬벽돌)은 정확한 대칭과 균형을 이루고 있어 다소 평면적인 느낌을 줄 수도 있지만, 연꽃잎에 넝쿨무늬를 돋을새김하여 그러한 단점을 상쇄시켰다. 꽃잎의 끝은 살짝 올라간 모습으로 이는 사비를 수도로 했던 시기 특유의 연꽃 형태라고 한다. 벽돌의 네 모서리는 꽃잎으로 장식했는데 다른 벽돌들과 맞추어 보면 하나의 꽃으로 보이도록 정교하게 분할하여 새긴 것이다. 

 

연대귀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제의 부흥을 염원했던 노력의 결정체   

이처럼 백제 예술의 정수라 할 수 있는 무늬벽돌 세트는 어디서 제작되어 규암면 외리에 묻히게 되었을까. 학자들은 벽돌들이 낙화암과 백마강 맞은편에 있는 왕흥사를 장식했던 것들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조’에는 “634년 2월 왕흥사가 완성됐는데, 채식이 화려하고 장엄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제 문화의 절정기였던 무왕 시절에 지어진 사찰이었다면 당연히 당시 기와 예술의 최고봉인 무늬벽돌로 치장했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이 벽돌들은 바닥재라기보다는 실제로는 사찰 건물의 벽을 장식한 인테리어 소품이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백제가 망하면서 왕흥사에 있던 유물들은 대거 반출되었고, 이때 무늬벽돌들도 뿔뿔이 흩어져 일부가 근처 외리에 묻혔던 것이다. 

백제 말기, 기울어져 가는 국운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염원으로 지어졌던 왕흥사. 백제인들은 자신들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을 아낌없이 쏟아 부으며 무늬벽돌을 제작해 사찰을 최대한 장엄하게 꾸미고자 했다. 하지만 그러한 염원에도 불구하고 백제는 허망하게 무너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러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백제인들의 탁월한 예술적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걸작들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 유물들을 통해 우리는 후대에 길이 자랑할 수 있는 선조들의 자랑스러운 유산들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점이다. 



연화문전 크기: 세로 29cm×가로 29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기타 문양전 크기: 너비 15cm×길이 36cm×두께 4cm, 재질: 경질토제, 국립공주박물관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