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적인 식수 부족에 시달리는 필리핀 민다나오 마을
글_ 윤제용 서울대학교 화학생물공학부 교수, 한국환경정책평가연구원 원장
지금은 기후 위기의 시대이다. 너무 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온 선진국의 책임이 크다. 이러한 시대에 지구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국제협력에서 새로운 적정기술 분야의 가능성을 볼 수 있다.
환경의 차이에 따라 적합한 기술도 달라져
적정기술이란 사회경제적 환경에 맞는 적합한 기술을 뜻한다. 그렇지만 적정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매우 다양하고 일부 오해도 있다. 자연 환경은 물론 사회 환경이 다르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의 필요도 다르다면 적합한 기술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면 노동력이 풍부한 사회에서는 지나친 자동화 기술 보다는 노동집약적 기술이 더 적합하다. 도시형 중앙식 수도시설이 없는 농촌 환경에서는 주변 지하수를 개발하여 이용하는 기술이 더 적합할 수 있다. 물론 경제적 수준도 고려되어야 한다.
세상의 모든 나라 사람들이 같이 잘 살면 좋겠지만 세상은 그렇지 못하다. 부자 나라도 있고 가난한 나라도 있다. 부자 나라는 과잉 영양으로 비만 때문에 건강을 잃기도 하지만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생필품의 부족이나 식량으로 고통을 당한다. 인공지능이니 생명 연장이니 하는 과학기술의 발전은 눈부신데 일부 나라의 지역 주민들은 당장의 의식주 해결이 어렵고, 화장실이 없기도 하며, 안전한 물도 없어 생활이 곤란한 경우가 많다.
필리핀 학교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경 없는 과학기술자’ 단체를 만든 이후 어떻게 활동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데 우연히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한 학교를 운영하는 성당 수녀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초등학교 학생들이 이용할 먹는 물과 생활용수가 부족한데 혹시 도움을 줄 수 있는가’하는 것이었다. 걱정도 많이 되었지만 어쩌면 좋은 기회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 현지답사, 지하수 이용 수처리 시설 설계와 공사, 시음회까지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우리 꼬마 학생들이 고마움의 표시로 그림을 그려주고 노래와 춤 등의 공연을 해준 것은 아직도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당시 음수대의 수도꼭지를 적정기술 성격에 맞는 저렴한 것으로 할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였던 기억이 난다. 나는 조금 가격이 높더라도 기왕이면 멋진 것으로 해서 우리 학생들이 자부심을 갖게 하자는 의견을 냈다. 한편 지금은 모 대학 의 교수가 되어 있는, 당시 우리 연구실 대학원생은 한 여름에 콘크리트 치는 일에 자원 봉사를 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적정기술을 활용한 미얀마 산촌마을 식수정수기 보급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를 낳진 않아
일반적으로 적정기술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과학기술을 통해 좋은 일들을 하기를 원한다. 적정기술이 적용되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이 향상되기를 원한다. 자신들이 참여하는 과학기술 활동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싶어 한다. 이런 맥락에서 적정기술 과학기술자들이 ‘특정 지역사회 또는 개발도상국에 더 필요한 기술을 개발하거나 제공하는 것이 좋지 않겠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특히 개발도상국이나 소외계층에게 과학기술의 혜택이 골고루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도 있다. 자신이 속한 나라의 소외계층에 대한 생각도 예외는 아니다. 좋은 일이다. 그래서 적정기술을 착한 기술이라고도 하고 따뜻한 기술이라고도 한다.
선진국들은 지구촌 공동체라는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국제협력 지원을 한다. 개발도상국을 지원하여 개발도상국이 보다 잘살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 의도는 좋았지만 좋은 의도가 항상 좋은 결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국제협력 활동이 이러한 가치에 부합하는 것도 아니다. 우리의 재원으로 도움을 주니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지나치게 반영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개발도상국의 필요에 따른 지원이라기보다는 선진국의 필요에 따른 국제협력이 될 수도 있다.
기후위기 해결에서 적정기술 가능성 찾아야
또한 경우에 따라서 적정기술이라는 말이 거부감을 주는 경우도 있다. 선진국 기술들은 무엇인가 화려하고 미래 지향적이고 개발도상국에게 제공해 준다는 기술은 왠지 구식이고 낡아 보인다. 이러한 오해 등으로 인해 적정기술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도 있었다. 나름대로 생각해볼 만한 점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지금은 기후 위기의 시대이다. 너무 많은 화석연료를 낭비해서 생기는 문제이다. 선진국의 책임이 크다. 선진국은 화석연료를 줄이는 저탄소 사회로 힘차게 전환 중이다. 개발도상국은 어떻게 하나? 화석연료의 남용은 해보지도 못한 가난한 개발도상국에 피해가 더 많이 돌아갈 가능성이 매우 많다. 얼마 전 홍수로 전 국토의
3분의 1이 잠긴 파키스탄을 생각하면 그러한 일들이 현실이 되고 있다. 나는 지구를 살리는, 아니 지구촌에 사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한 국제협력에서 새로운 적정기술 분야의 가능성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필리핀 민다나오의 초등학교에 지하수 이용 수처리 시설을 보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