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덮인 마운트 쿡과 푸카키 호수
글·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아벨 타스만’이 서양인 최초로 ‘뉴질랜드’를 발견하였지만 그 후 100년이 지난 뒤 ‘제임스 쿡’이 이곳을 탐험하고 난 후부터 본격적으로 뉴질랜드에 서양인들의 이주가 시작되었다. ‘제임스 쿡’에서 이름을 딴 ‘마운트 쿡’ 트레킹 코스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트레킹 코스로 꼽힌다.
남쪽 망망대해에도 알프스가 있다
뉴질랜드는 남태평양 한가운데 두 개의 섬으로 이뤄졌다. 북섬엔 국내 제1의 도시 오클랜드와 수도 웰링턴이 있고, 남섬은 천혜의 자연으로 유명하다. 여행자들에겐 아무래도 북섬보다는 남섬이 더 끌린다. 이런 남섬의 서해안을 남북으로 길게 이어가는 험준한 산줄기가 서던알프스산맥이다. 아름다운 알프스가 유럽의 지붕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이름 그대로 적도 남쪽 망망대해의 섬에도 숨어 있는 것이다.
서던알프스산맥의 최고봉은 해발 3,754m의 마운트 쿡이다. 원래 이름은 ‘아오라키 마운트 쿡’이다. ‘구름 뚫고 솟아오른 봉우리’라는 뜻의 마오리어 ‘아오라키’와 이 섬을 발견하여 서방세계에 알린 제임스 쿡 선장의 이름이 합쳐져 산 이름이 되었다.
‘아오라키’라는 단어에는 어딘지 주술적이고 원시의 기운이, ‘쿡’이란 이름에는 서양 문명과 현대 세계의 분위기가 묘하게 섞인 듯하다.
마운트 쿡 주변에는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짧은 트레킹 코스들이 여덟 개 포진해 있다. 만년설로 뒤덮인 마운트 쿡 정상은 전문 산악인들에게 맡기고, 나 같은 일반 트레커들은 마운트 쿡 주변의 이 코스들을 느긋이 트레킹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쁨과 성취감을 느낄 수 있다.
노을 무렵, 마운트 쿡의 그림자가 비친 푸카키 호수
원시와 문명, 현실과 비현실의 혼재
남섬의 아름다운 도시 퀸스타운에서 6번과 8번 고속도로를 갈아타며 북으로 다섯 시간 가까이 달리던 버스가 드넓은 호숫가에 잠시 멈췄다. 마운트 쿡에서 녹아내린 빙하가 남으로 흐르고 흘러 모아진 푸카키 호수다. 극도로 미세한 얼음 입자들이 만들어낸 호수의 아름다움은 우윳빛 하늘색이나 에메랄드빛 같은 색감만으로는 표현이 아쉽다. 주변 여러 곳에 버스가 정차해 있고, 잠시 버스에서 내린 이들은 모두 호수와 그 건너 설산들을 응시하며 감탄하는 모습이다. 나 또한 그들처럼 한동안 넋을 잃고 서 있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나 좁아진 도로를 따라 30여 분을 달리던 버스가 마침내 섰다. 마운트 쿡의 관문인 마운트 쿡 빌리지, 거대한 설산들에 막혀 더 이상 길이 없어진 종점 마을이다. 원시와 문명, 현실과 비현실이 적당히 혼재된 듯한 분위기다. 넓은 평원이 거대한 병풍으로 둘러쳐진 모양새, 사방에서 수직으로 솟아오른 설산들의 위용이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푸카키 호수와 이전 밀포드에서 느꼈던 천연색의 아름다움은 없었다. 짙은 회색의 기운이 빌리지 주변을 잔뜩 에워쌌다. ‘황량한 아름다움’이란 표현에 어울리는 분위기다. 허미티지 호텔 인근 저렴한 유스호스텔에 여장을 풀었다. 마운트 쿡 트레킹 2박 3일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트레킹은 대개 허미티지 호텔 앞이 출발점인데 호텔을 중심으로 8개 트레킹 코스가 적절하게 포진되어 있다. 글렌코 스트림, 거버너스 부시, 후커밸리, 키아 포인트, 타스만 빙하호, 레드 탄스, 실리 탄스, 뮬러 헛, 이들 8개 코스 모두 마운트 쿡 일대의 산과 계곡 그리고 빙하 호수 주변을 오르내리는 트레킹 루트들이다. 이들 8개 중 뮬러 헛 코스와 후커밸리 코스가 가장 대중적이고 인기가 많다.
🚩뮬러 헛 코스(왕복 12km, 9시간 소요)
해발 1,805m의 뮬러 헛 정상에 있는 ‘뮬러(Mueller)’라는 이름의 산장(hut)까지 올라가는 코스다. 시작부터 코스는 매우 가파르다. 1,800개에 이르는 나무계단을 모두 밟고 나서야 산 중턱 넓은 평원의 작은 호수 ‘실리 탄스’와 마주한다. 호수 옆 의자에 앉아 잠시 숨 고르기 후 다시 정상을 향한다.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등 뒤의 시야도 시시각각 넓어진다. 뒤돌아보면 정면의 웨이크필드 산과 그 아래 짙은 회색의 뮬러 빙하 호수가 바짝 따라붙는 형국이다.
마운트 쿡 봉우리를 중심으로 주변 설산들의 위용이, 산 아래 빌리지 주변과 극명하게 대비를 이룬다. 정상의 뮬러 헛은 30여 명 수용이 가능한 산장이다. 해발 2,000m도 안 되는 산악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히말라야 설산 또는 알프스 산맥 깊숙이 올라온 듯한 분위기를 맛보게 해주는 곳이다.
🚩후커 밸리 코스(왕복 15km, 4시간 소요)
후커 호는 마운트 쿡의 빙하가 녹아내린 빙하 호수다. 고였다가 넘쳐흐르는 호수 물은 후커 강을 따라 남쪽 멀리 푸카키 호수로 향한다. 후커밸리 코스는 후커 강을 거슬러 후커 계곡을 따라 빙하 호수까지 다녀오는 루트다. 오르막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지 트레킹이다. 코스 초입에 홀연히 서 있는 알파인 추모탑이 거대 설산을 배경으로 깊은 인상을 남기고, 코스 후반엔 주변 전체가 한눈에 조망되는 후커 전망대가 압권이다.
‘100년 전 이 계곡은 빙하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이 전망대 자리가 빙하의 바닥이었다. 지금 그 빙하는 계곡 위에 조금씩만 남아 있을 뿐이다. 빙하가 녹다 남은 얼음들이 정처 없이 호수를 떠다니고 있다.’ 이 일대의 지질 변천을 알려주는 전망대의 안내 글도 인상적이다. 각각 20명 이내로 인원 제한이 있는 구름다리 3개를 지나면 비로소 후커 호수에 이른다. 둥둥 떠 있는 수많은 유빙들이 신비로운 연둣빛을 띠며 호수의 회색 톤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 호수 너머 끝자락에 후커 빙하로 덮인 마운트 쿡의 자태가 신비를 더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