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_ 안계환 금융칼럼니스트, <세계사를 바꾼 돈> 저자
유럽에는 작은 도시에도 아주 큰 성당이나 교회가 매우 많이 세워져 있다. 그리 부유하지 않았던 중세 유럽의 작은 도시들까지 거대 교회를 세울 수 있게 했던 종교의 힘에 대해 알아보자.
<베리공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에 그려진 연옥을 묘사한 삽화, 1489년경 제작
고리대금업이 죄악이었던 시절
유럽에 가면 어느 도시에나 있는 오래된 교회의 규모와 숫자에 깜짝 놀란다. 물론 부산에도 교회가 많고, 파리나 밀라노 같은 대도시야 그럴 수 있다고 해도 프랑스의 사르트르나 이탈리아의 아시시 같이 작은 도시에 있는 중세성당도 매우 크다. 중세 유럽에는 부자들이 많았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고 당시 도시들은 크지도 않았다. 그런데 어떻게 거대 교회들이, 그것도 한 도시에 몇 개씩이나 세워질 수 있었을까? 무슨 돈으로? 이런 질문이 나올 수밖에 없다. 그 해답을 찾아보자.
로마가톨릭에만 있는 독특한 교리로 ‘연옥(煉獄, Purgatory)’이란 게 있다. 연옥은 죽은 영혼이 이승에서 지은 죄에 대해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으며 머무는 장소다. 인문학자 단테가 <신곡>에서 그려낸 연옥은 원뿔 형태로 일곱 개의 원반이 포개져 있는데 정상으로 갈수록 원의 반경이 줄어든다. 각 원에서는 이승에서 죄를 지은 영혼들이 교만, 질투, 분노, 음욕, 탐식, 탐욕, 나태의 순서대로 벌을 받는다. 영원히 끔찍한 벌을 받는 지옥에 비해 비교적 평화롭게 보이지만 지옥 못지않게 형벌이 참혹하긴 마찬가지다.
그 죄의 중심에 고리대금업이 있었다. 고대로부터 중동 지방에서는 노동을 하지 않고 돈을 버는 행위를 죄악시했다. 구체적 생산물이 없는데도 이자를 붙이는 것을 잘못이라 했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소를 빌려주고 대가를 받는 것은 괜찮다. 소에게서는 젖이 생산되지 않느냐? 하지만 돈은 불임이다. 따라서 돈을 빌려주고 추가금액을 받는 것은 부당한 처사다.”
구약성서에는 이자와 관련한 구절이 있다.
“주의 장막 안에 살 사람은 돈을 빌려 주면서 이자를 많이 받지 않고 죄 없는 사람을 억울하게 하지 않는 사람이다.” - 시편 15장 -
메디치 가문이 지어준 산 로렌초 성당

파도바의 은행가 스크로베니가 성모에게 봉헌한 예배당
벌금이 곧 고리대금업에 대한 면허세
로마교황청에서는 고리대금업은 치명적인 탐욕 죄에 속한다고 했고 일종의 도둑질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경제 발전이 이루어지면서 이자를 주고받는 행위는 필수일 수밖에 없었다. 돈이 필요한 이들은 많았지만 그렇다고 부자들이 아무 대가없이 돈을 빌려줄 수는 없는 법!
1462년 이탈리아 페루지아에서 ‘몬데 디 피에타(Monte di pieta)’라는 금융기관이 탄생했다. ‘자비의 산’이란 이름의 이 금융기관은 오늘날까지도 중세도시 시에나에서 영업 중인, 서민들을 위한 저리 또는 무이자 소액대출사업이었다. 서민들은 몬데 피에타에 값나가는 물건을 맡기고 시가의 2/3 범위 안에서 급전을 빌렸다. 전당포 형식의, 교회 차원의 자선사업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 상업 활동에 수반하는 이자 거래를 위해서는 교리를 위배하지 않으면서도 현실적인 타협안이 필요했다. 첫째는 교회법에서 정한 대로 고리대금업이란 혐오스러운 죄를 범한 대출업자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벌금의 규모는 매년 2천 피오리노였는데 당시 숙련된 기술자의 월평균 소득이 5피오리노였다. 오늘날 근로자의 평균 월 소득을 300만 원이라고 가정한다면 대략 12억 원 정도 되는 꽤 큰돈이다. 교회에 벌금을 내는 것은 대금업에 대한 일종의 면허세라고도 볼 수 있었다. 대금업자들은 많은 벌금을 냈으니 거리낌 없이 이자를 받을 수 있었고 교회도 나름대로 체면을 세웠다.
사후의 죗값을 빨리 치르기 위한 기부
둘째는 교회에 기부하는 방식이었다. 대금업자들은 자신들이 죄를 짓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죽은 후 연옥에서 장기간 머물러야 한다는 것도 깨닫고 있었다. 사제의 설명에 의하면 연옥에서 치러야 할 벌이 꽤 혹독할 텐데 그것을 줄일 방법이 있다. 그렇게 교회와 협의를 통해 탄생한 것이 교회시설에 대한 기부였다. 잘 알려진 방법 중 하나는 교회의 중앙제단 옆에 작은 기도실(경당)을 만들어 분양하는 것이었다. 적절한 비용을 내고 기도실을 받은 상인 가문은 지역 예술가들과 계약해 이곳을 치장하게 했다. 물론 그들이 예술적 소양이 깊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고 교회당에 찾아오는 민중들이 자신의 가문을 좋게 봐주었으면 했고, 연옥에서 받을 벌을 줄이고 싶어서였다. 오늘날 유럽에 있는 성당과 수도원에 있는 기도실과 작은 예배당은 이렇게 탄생했다.
교회를 통째로 지어 바친 이도 있었다. 파도바의 은행가 엔리코 스크로베니는 가문의 저택 옆에 성모에게 봉헌한 예배당을 지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연옥에서 죗값을 빨리 치르고 천국으로 가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도 교회를 지었는데 산 로렌초 성당이 그곳이다.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건축가 브루넬레스키의 설계를 바탕으로 도나텔로, 미켈란젤로 등이 참여했다 인근 산마르코 수도원에는 코시모 메디치 전용 기도실도 있었는데, 그가 제공한 막대한 기부금 덕분이었다. 로마교황은 코시모가 지은 죄의 벌을 모두 사면해준다고 기록된 공식 문서를 그에게 보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