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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이 사랑했던 미인
신윤복 <미인도>

신윤복, <미인도>, 18세기, 견본채색, 114×45.5cm, 간송미술관 소장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풍속화가 신윤복은 그 생애에 대해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가 그린 그림만으로 최고의 화가로 평가받는다. <미인도>가 그 대표적인 예다. 여성을 욕망의 주체로 당당히 드러냈던 그의 그림 세계 속으로 들어가 보자. 


절묘한 연출, 은근히 드러낸 관능미 

우리나라에서 여인을 그린 그림은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그려졌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여인도(麗人圖)’, ‘사녀도(仕女圖)’ 등으로 불리며 제작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미인도’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조선 중기 이후 풍속화에서부터 나타난다. 그중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미인도가 바로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다. 신윤복 특유의 섬세한 선과 아름다운 채색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간송미술관에 있는 <신윤복 필 풍속도 화첩>에 속해 있다. 이 화첩은 일본으로 유출되었던 것을 1930년 간송 전형필이 구입해 새로 틀을 짠 것으로, 18세기말 조선시대 생활사와 복식사 연구에도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미인도>의 모델이 된 여성은 풍류세계에 몸담고 있던 기생으로 추측된다. 당시 사회제도상 여염집 규수는 외간 남자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탐스런 가체를 얹은 머리에 가슴 윤곽이 보일락 말락 기장이 짧고 소매통이 좁은 저고리, 열두 폭 큰 치마가 풍만하게 부풀어 오른 차림새는 여체의 관능미를 드러내는 자태이다. 또한 쪽빛 치마 밑으로 살짝 드러낸 하얀 버선발과 왼쪽 겨드랑이 근처에서 흘러내린 두 가닥 주홍색 허리끈, 일부러 고를 매지 않고 풀어헤친 진자주 옷고름이 조선시대 사내들을 홀리게 했을 것이다.

 

생명의 활기를 품은 미인도 

현대인의 시각에서 보면 노출이 과한 것도 아니라서 통상적으로 ‘야하다’는 관념에는 부합하지 않는 그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당대에는 이 정도 자태와 암시만으로도 상당히 관능적인 그림이 되었다. 물론 현대의 관능미와 조선시대의 관능미의 기준은 다를 수밖에 없으니 그것 또한 감안해야 할 것이다. 특히 살짝 내리 깔은 눈매, 노리개와 고름을 매만지는 손길, 말려 올라간 치마 끝에 살짝 드러낸 하얀 버선발 등의 연출은 절묘하다. 마치 오늘날 사진작가가 패션잡지의 화보 촬영을 할 때 아름다운 모델을 앞에 놓고 여러 가지 자세와 표정을 세심하게 주문하여 사람들의 시선을 단번에 사로잡는 인상적인 사진을 촬영하듯이, 신윤복도 그러한 과정을 거쳐 그림을 그렸을지도 모른다. 그림의 왼쪽 상단 부분에는 신윤복이 직접 쓴 글이 있다. 이 글을 통해 우리는 작가의 의도를 짐작해낼 수 있다. 그 뜻은 대략 이러하다. 가슴에 그득 서린 일만 가지 봄기운을 담아 盤礴胸中萬化春 붓끝으로 능히 인물의 참모습을 나타내었다. 筆端能與物傳神 이 글을 잘 읽어보면 신윤복이 추구한 관능미는 일차원적인 성적 욕망이라기보다는 봄기운과 같은 ‘삶의 의욕, 생기’와도 같은 것이라고 유추할 수 있다. 즉 <미인도>는 ‘생명의 활기를 가득 품고 있는 여인상’이다.

 

채용신, <팔도미인도>, 20세기 초, 면본채색, 130.5×60cm, OCI미술관 소장 

 

조선의 여인을 전면에 내세우다 

서양화에는 인물의 초상화가 흔하지만 조선에서는 인물화가 아닌 산수화가 중심이 되었다. <몽유도원도>나 <십장생도> 그 어디에도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신윤복의 <미인도>처럼 여성의 전신을 단독으로 그린 그림은 신윤복 이전에 거의 없었다. 신윤복과 함께 풍속화의 쌍벽을 이루는 김홍도조차 미인도 같은 것은 그리지 않았다.

앞서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도 여인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고 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왕실의 여성들을 그린 것이고, 그림 속에서 여성이 단독으로 나오지도 않고 여럿이 함께 나온다. 고려시대의 ‘사녀도(仕女圖)’라는 것도 중국 그림을 흉내 낸 것인데다가, 여인의 옷도 중국 궁중 복식이었다. 그러니 진짜 조선 여인다운 여인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신윤복이 최초라 할 수 있다. 이 점이 신윤복을 조선의 다른 어떤 화가들과도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가진 화가로 평가받게 한 것이다.


시대의 금기에 대한 과감한 도전 

<미인도>뿐만 아니라 신윤복의 그림엔 수많은 여성들이 중심에 등장한다. 어스름한 달빛 아래 담 모퉁이에 숨어 한 쌍의 남녀가 밀애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그린 <월하정인>이라든지, 단오절에 멱을 감는 여인들을 그린 <단오풍정>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의 그림에서 특유의 산뜻하고 세련된 색감은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더욱 돋보이게 한다.

신윤복은 왜 이렇게 여인들을 당당하게 그림 속에 등장시켰을까? 그것도 당대의 전형적인 수동적 여성이 아니라 욕망과 낭만의 주체로서 여성들을 과감히 드러냈다. 그 이유를 알고 싶어도, 신윤복에 대한 역사 기록이 거의 남아 있는 게 없어서 많은 학자들이 추측만 할 뿐이다. 첫째로는 신윤복의 개인적 취향에 따른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는 남성과 양반 중심 가부장제의 위선을 그림으로 폭로하고 비판하려 했다는 해석도 있다. 어쨌든 신윤복이 여성을 그림의 주인공으로 과감히 이끌어낸 것은 시대의 금기에 대한 과감한 도전으로 오늘날에도 높이 평가받

고 있다. 신윤복이 ‘미인도’라는 테마의 물꼬를 트자, 후대 화가들도 그에게 영감을 받아 여러 다른 <미인도>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 해남 윤씨 종가 녹우당에 소장된 작가미상의 <미인도>가 유명하다. 이 그림 속 여인은 신윤복의 모델보다 길이가 더 짧고 꽉 끼는 소매폭의 저고리를 입고 있으며 치마를 꽉 동여매

잘록한 허리를 강조하고 있다. 신윤복 이후 19세기로 갈수록 저고리 길이가 더 짧아진 풍조를 반영한 것이다. 신윤복 <미인도>의 높은 격조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 이후에 그려진 조선시대 후기 미인도 중에는 최고로 꼽힌다.

 

작자 미상, <미인도>, 18~19세기, 지본수묵담채, 117×49cm, 녹우당 소장 


남성들의 속마음을 대변하다 

그런데 조선시대의 미인도에 그려진 여인들을 보고 그 시대의 이상적인 여인상을 유추한다면 오류에 빠질 수도 있다. 대부분 그림 속 모델들이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기녀였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대부분 잘록한 허리와 하얀 피부, 붉은 입술, 작은 머리, 가는 목 등을 지녔는데 이는 쌍꺼풀 있는 큰 눈망울을 선호하는 부분만 제외하면 대부분 현대 한국에서 이상적으로 여기는 미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 조선시대에는 이런 기녀를 닮은 미인보다는, 조금 통통하고 배가 풍만해 아이를 잘 낳을 수 있는 여인들이 훌륭한 아내감이자 며느리감으로, 공개적으로 칭송받았다. 이는 실제 남성들의 속마음과는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속마음을 대변해 세간의 평가와는 다른, 자신들이 생각하는 진짜 미인상을 담아낸 것이 바로 신윤복 이하 후대 화가들이 그린 <미인도>라는 해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