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_ 이영철 여행작가, <세계 10대 트레일> 저자
퀸스타운의 와카티푸 호수와 그 너머 드넓은 평원으로 이어지는 밀포드 트랙
구글 검색뿐 아니라 요즘 핫한 챗GPT까지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에 대해 물어보면 뉴질랜드의 ‘밀포드 트랙’이라고 답한다. 확 트인 초원과 눈 덮인 설산, 다양한 생물이 공존하는 습지까지, 밀포드 트랙은 ‘천태만상, 변화무쌍’의 매력으로 우리를 매혹시킨다.
퀸스타운 녹색 평원의 절경
구글 검색창에서 ‘The Finest Walk in The World(세상에서 가장 멋진 길)’이라고 쳐본다. 결과는 오직 하나의 길, 밀포드 트랙에 대한 내용들만 다양하게 뜬다. 같은 문구를 요즘 이슈인 챗GPT에 물어보자. 답변이 즉각 올라온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길은 밀포드 트랙으로 알려져 있다. 뉴질랜드 남섬의 남서쪽 피오르드랜드 국립공원에 위치하며, 총길이는 53.5km이다. 이 길은 웅장한 산들과 원시적인 호수 그리고 푸른 우림과 아름다운 폭포 등의 풍경을 통해 여행자들을 감탄하게 만든다. 도보여행자들에겐 일생에 꼭 한 번은 걸어봐야 하는 필수 코스로 소개되기도 한다. 종주에는 통상 4일이 걸린다.
워낙 인기가 많아 사전 예약이 필수적이다.’ 뉴질랜드 남섬의 퀸스타운에 내리기까지는 꼬박 하루가 넘게 걸렸다. 오클랜드행 직항 대신 상하이푸동공항을 경유한 때문이다. 덕분에 항공료는 수십만 원 절감됐다. 다음날 아침 테아나우행 버스에 오르는 발걸음엔 미련이 짙게 남았다. 퀸스타운은 너무도 아름다운 호반 도시였다. 전날 오후 한나절 둘러본 것만으로는 아쉬움이 너무 컸다. 퀸스타운의 상징인 와카티푸 호수가 오른쪽 차창으로 스쳐 사라지면서 드넓은 평원이 이어졌다. 한가로이 풀 뜯는 양 떼들 모습이 시야 가득 들어온다. 녹색 캔버스에 흰색 물감 방울을 무수히 뿌려놓은 듯하다.
세계 각지에서 온 트레커들과 쉽게 친구가 되는 밀포드 트랙
영화 <반지의 제왕> 속에 들어온 듯
잠깐 졸다 보니 두 시간 반 만에 버스가 섰다. 간단한 입산 신고 절차를 마친 후 선착장으로 이동해 유람선에 올랐다. 테아나우 호수는 넓기로 뉴질랜드에서 두 번째인, 서울 면적의 절반이 넘는 규모다. ‘바다 같은 호수’가 딱 어울리는 표현이다. 한 시간 이상 주변 설산들의 위용에 넋을 빼앗기다 보니 어느 순간 배는 호수의 북단 선착장 그레이드 워프에 도착했다. 배에서 내리며 가장 먼저 한 일은 신발 소독이다. 소독제가 들어있는 넓은 용기에 잠시 신발 신은 채 담그고 나오면 비로소 밀포드 입산 자격이 주어진다. 바로 눈앞 녹색 이정표에 ‘Milford Track’이라는 노란색 글씨가 선명하다. 꿈에 그리던 바로 그 밀포드 앞에 내가 서 있다.
짙은 적갈색 흙길에 발이 닿는 느낌이 푹신하다. 숲길 양옆으로 생소한 느낌의 나무들이 촘촘하게 들어차 있다. 가지마다 이끼 식물들이 얽히고설켜 치렁치렁 늘어져 있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봤을 법한 묘한 분위기의 숲이 계속되다 끝나는 순간, 확 트인 초원이 펼쳐진다. 저 멀리엔 거대한 산이 길을 막고 서 있다. 통나무집 다섯 동이 가지런히 있는 글레이드 하우스 풍경이 꽤 정겹다.
구름처럼 떠 있는 글레이드 브리지를 건너면 클린턴 강물이 오른쪽 가까이 착 달라붙어 계속 따라온다. 강 속 물고기 모습까지 생생할 정도로 물은 맑고 투명에 가깝다. 아주 오래전 호수였다가 물이 마르면서 지금은 수생 식물과 일반 식물들이 동거 생활을 하는 습지를 돌아보고 나오면 종착지 산장에 이른다. 첫날 거리는 선착장에서 클린턴 산장까지 5km에 불과하다.
둘째 날 민타로 산장까지 거리는 16.5km다. 이곳 산장들은 물과 가스만 공급되는 기본 취사 시설의 공용 주방이 있고, 넓은 숙박실에는 침상들만 수십 개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전기도 없고 외부와의 통신도 불가능하다. 침낭과 식자재 등 일체는 본인 배낭에 짊어지고 가야 한다. 클린턴 강의 두 지류 중 서쪽 지류를 따라 길이 이어진다. 울창한 숲길이 끝나면 확 트인 시야 양편에 거대한 산들이 나타난다. 깎아지른 절벽 봉우리들이 하나같이 흰 눈을 뒤집어썼다. 히레레 폭포와 퀸틴 폭포, 두 개의 시원한 물줄기를 지나며 고도 또한 서서히 높여간다. 버스가 올 일이 없는 산속에 ‘Bus Stop’ 팻말도 보인다. 시골버스 정류장 같은 조그만 양철 지붕 밑 자그만 쉼터이다.
테아나우 호수에서 느낀 개척 정신
14km를 걷는 3일째 날 압권은 정상인 매키넌패스다. 밀포드 트랙 전 코스 통틀어 하이라이트이기도 하다. 급경사를 완충하는 지그재그를 열한 번째 꺾으며 땀을 쏟고 나면 비로소 해발 1,154m 고지의 드넓은 초원에 올라선다. 주변을 에워싼 봉우리들은 11월 여름(남반구)인데도 흰 눈으로 덮여 있다. 정상 복판에는 십자가를 꽂아놓은 석탑 하나가 서 있어 장엄한 풍광을 연출한다. 그 뒤로는 1,000m에 이르는 수직 낭떠러지가 입을 벌리고 있다. 위험 표지판이 모두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석탑에는 ‘1888년 이 길을 개척하고 1892년 테아나우 호수에서 사망한 퀸틴 매키넌 경을 기리며 이 기념비를 세운다’는 글귀가 있다. 주변을 감싸는 짙은 안개구름과 어울려 한층 더 영적인 기운을 불러온다. 첫날 테아나우 호수에서 느꼈던 기운과 비슷하다. 호수를 건너는 배 위에서 주변 설산들 위용에 넋을 잃던 어느 순간, 수면 위에 떠 있는 하나의 십자가에 눈길이 꽂힌 바 있다. 바로 매키넌 경의 수중 묘비였다. 100여 년 전에 살았던 한 사람의 개척 정신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전 세계의 트레커들을 이 오지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남태평양의 따스한 햇살을 만끽
마지막 4일째의 종착지는 샌드플라이 포인트다. 샌드플라이는 밀포드에선 악명 높은 날파리의 이름이다. 물리면 모기처럼 가렵고 몹시 성가시다. 자기 전에 반드시 퇴치제를 발라야 한다. 밀포드의 아름다움에 취해 쉽게 이곳을 떠나지 못하는 이들을 얼른 쫓아내기 위해 마오리족 여신이 이 곤충들을 풀어놨다고 한다. 아더 강을 가로질러 맥케이 계곡과 포세이돈 계곡의 구름다리 그리고 자이언트 폭포 구름다리까지 건너다보면 이윽고 눈앞에 멋진 지붕이 나타난다. ‘Welcome to Sandfly Point’라는 반가운 환영 문구와 함께 총거리 53.5km의 종착지에 이른 것이다. 하루에 두 번 오는 배를 타고 건너편 밀포드사운드 선착장에 내리면 다시 도시로 나가는 도로와 연결된다. 배를 기다리는 동안 휴게실 옆 잔디밭에 배낭 내려놓고, 여느 트레커들처럼 등산화와 양말을 벗어 놓은 채 풀 위에 대자로 누웠다. 11월의 남태평양 따스한 햇살이 얼굴을 간질인다. 밀포드사운드에 둥둥 떠 있는 거대한 설산 봉우리들이 햇빛에 반짝이며 꿈속 한 장면처럼 가물가물 신비롭다. 주변 풍경을 열심히 사진에 담는 주변 트레커들의 셔터소리가 점차 자장가로 변하며 스르르 눈이 감긴다.
밀포드사운드 선착장과 햇빛에 반짝이는 설산 봉우리들
오래 전 호수였던 습지는 희귀한 식물들을 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