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출처_ 공공누리
일제 강점기, 경주 노서리에서 식당 확장 공사를 하다 유물 일부가 발견된다.
신라 시대의 무덤에서 금관 및 금제관식이 출토된 것.
신라 시대 무덤 최초로 이름을 찾은 경주 금관총에 얽힌 이야기를 알아본다.
일본의 허술한 발굴
_국보 금관총 금관 및 금제 관식
1921년, 경주 노서리 마을의 한 음식점 확장 공사 중 뒤뜰에서 우연히 고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즉시 공사를 중지시키고 현장을 발굴하기 시작하는데 이윽고 화려한 금관이 모습을 드러낸다. 신라가 눈부신 황금의 나라임을 알리는 최초의 고분, 금관총의 발견이었다.
당시 금관총 수습 발굴에 나선 사람은 조선총독부 박물관 촉탁 모로가 히데오. 그와 같이 발굴에 나선 일본 사람들은 고고학 전공자나 발굴 경험이 있는 전문가가 아니라, 경주 보통학교 교장 등 문화재 애호가들이었다. 당시 경성에서 연락을 받은 일본 고고학자들은 금관총 수습 발굴을 멈추고 대기하라는 내용의 전보를 보내고, 나흘 만에 경주에 도착한다. 하지만 도착한 그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이미 금관총 발굴이 종료되었기 때문인데, 급박하게 발굴 작업을 한 이유가 고작 ‘사람들이 몰려와서’라는 무책임한 말이었다. 금·은 제 그릇, 귀금속, 무기 등 총 3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나 유물의 정확한 수를 알 수 없다. 발굴 작업을 위해서는 어느 지점에서 출토되었는지 하나하나의 지점을 기록해야 하는데, 도굴에 가까운 진행으로 현재까지 유물 출토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심지어 일부 유물은 현재 일본에 있다. 이후 일본은 ‘경주 금관총 발굴 조사 보고서’를 편찬했는데, 당시 최고의 인쇄 품질로 보고서를 작성해 외국 외교부와 도서관에 기증하여 선전하는 데 이용하였다. 그 내용은 이렇다.
“우리(일본제국) 영토 안에서 처음 발견됐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또한 전 세계에서도 가장 두드러진 고분 발굴 유물의 한 예다.”
고대 일본에서 신라는 동경하는 금의 나라이자 금을 뺏기 위한 침략의 대상이었다. 일본은 8세기 무렵에야 금을 생산할 수 있었는데, 그런 배경 때문에 신라 무덤에서 나온 금관에 흥분한 일본인이 충격을 받아 저지른 일이라 볼 수 있다. 왕릉은 역사와 전통을 상징하는 곳이며, 많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곳으로 일본은 아직 자국의 왕릉을 발굴한 적은 없다.
능(陵)과 총(塚), 이름이 다른 이유
천년 왕국 신라가 남긴 무덤을 지칭할 때, 능(陵)과 총(塚) 두 가지로 지칭한다. 능(陵)은 주인이 알려진 무덤으로 왕이나 왕비의 무덤을 일컬으며 총(塚)은 무덤의 규모가 왕이나 왕족에 준하는 규모이지만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무덤을 뜻한다. 그렇기에 무덤을 발굴하다 천마도가 출토되면 천마총, 금관이 출토되면 금관총, 이런 식으로 출토된 유물의 이름을 붙였다. 물론 이 또한 일제 강점기 시대의 잔존하는 형식이라 하니 바로잡을 필요가 있으나,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어 무덤의 이름을 바꾸기는 쉽지 않았다. 백제는 백제 25대 무령왕의 무덤인 무령왕릉처럼 주인이 밝혀진 무덤이 있다. 기록을 통해 무령왕의 무덤임을 알 수 있었는데, 상대적으로 신라의 무덤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기 어려웠다.
천년 왕국, 신라 무덤 금관총의 주인을 찾아서
_경주 금관총 환두대도, '이사지왕' 글씨가 새겨져 있다.
2013년 학계를 발칵 뒤집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경주 금관총에서 발견된 환두대도(고리자루큰칼)에서 중요한 글자, ‘이사지왕’이 발견된 것. 일제 감정기 때 금관총에서 출토된 후에 90년 동안 수장고에 잠들어 있다가 녹을 벗겨내는 과정에서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드러난 것인데, 신라 초기 고분의 주인이 최초로 밝혀질 수도 있는 사건이라 엄청난 주목을 끌었다.
그렇다면 이사지왕, 과연 그는 누구인가?
신라의 마립간(왕) 시기의 계보를 보면 내물왕, 실성왕, 눌지왕, 자비왕, 소지왕, 지증왕으로 이어진다. 계보에서 이사지왕을 찾아볼 수 없는데, 마립간 시기의 왕족들을 ‘~왕’이라 칭했기에 왕족의 일원일 가능성이 높다.
1989년 포항 냉수리 신라비가 발견되는데, 재판 판결문 성격의 비석으로 그 내용에 칠왕(七王)이라는 명문을 통해 회의에 참석한 귀족들을 ‘왕’이라 칭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그래서 금관총에서 발견된 이사지왕이라는 명문은 5세기 신라 왕족·귀족 호칭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증거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사지왕의 무덤이 확실치 않은 이유는 부장품의 위치가 허리춤에서 나왔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있는 반면, 머리 쪽에서 나왔다는 내용의 보고서가 있기도 해서이다. 부장품 위치에 따라 생전 무덤 주인의 것인지 혹은 그를 애도하기 위해 함께 묻은 것인지 모르기 때문. 실제 전문가들도 기록이 없으면 쉽게 헷갈리는 발굴 현장에서, 아마추어들이 감자 캐듯 유물을 수습한 탓에 여전히 그 인과관계를 명료하게 밝히기는 쉽지 않았다.
이후 일제 강점기에 엉터리로 발굴한 것들을 바로잡는 재발굴 작업을 하는데, 2015년에 금관총도 대대적인 재 발굴에 들어간다. 이때 이사지왕 이름이 새겨진 칼집 끝 부분이 발견되어, 이사지왕이 금관총의 주인이라는 것 이 일반적 견해가 되었다.
경주 금관총 보존전시관 개관
_현대적 전시공간으로 거듭난 경주 금관총
’22년 8월, 금관총 보존전시관이 경주 금관총이 재발굴 된 지 7년 만에 복원 정비를 마치고 일반에 임시 공개되었다. 공개된 전시 공간은 지상 1층, 70억여 원을 들여 신라 고분의 형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다. 국내 고분 정비 사상 처음으로 돌무지 덧널 무덤에 주요 축조 구조 물인 목조 가구를 실물 크기로 재현하였다. 바닥에 나열 된 나무 기둥 자국 등을 보정해 만든 높이 5m 바둑판 모 양인 목조 가구는 각 구획 안에 정연하게 강도를 쌓는 데 사용되었다.
“현재 공사용 비계1) 구조 같은 목조 구조로 안 쌓으면 돌 무지의 돌이 무너질 염려가 있기 때문에 당시 1,600년 전 신라 시대 장인들도 이렇게 치밀하게 짠 목조 가구를 통해 안전하게 돌무지를 쌓을 수 있었던 공사 구조물입 니다.” (박세웅/금관총 전시부분 감리원)
또 무덤 중앙에 목곽은 일제 강점기 때 진행한 첫 조사 와 달리 더 크고 높은 데다 이번 정비를 통해 새로 밝혀 진 사실도 무덤 바닥에 재현되었다.
이와 함께 출토된 환두대도에 새겨진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을 통해 신라 고분 중 처음으로 무덤 주인을 알 수 있다는 점도 이목을 끌고 있다. 경주시는 그동안 고고학 자와 문화재위원들의 자문 보증을 여러 차례 받아 충실 하게 콘텐츠를 마련했다. 또한 전시실에는 스크린 터치 설명을 비롯해 삽화 묘사, 첨단 증강현실 AR 기법도 도 입하여 관람객들의 이해를 돕고 있다.
금관총 보존전시관 바로 옆에는 올해 상반기 개관 목표 로 신축 중인 금관총 고분정보센터 조성공사가 마무리 되고 있다. 전시관의 정식 개관은 금관총 고분정보센터 조성공사가 마무리되는 ’23년도 상반기 예정이며, 이전 까지는 무료로 관람 가능하다.
1) 건축공사 때 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임시 가설물